소설리스트

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63)화 (263/266)

제263화. 저항하는 자 (2)

아니지, 아니지.

저게 뭐라고 내가 신경을 써?

그 개고생을 하고 얻어 낸 기회였으니 천기에서 본 광경이 거짓일 리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과 별 상관 없어 보이는 나이까지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천기가 보여 주었던 장면 속 천사는 지금의 자신이 아니다. 한건주 역시 그곳의 악신이 아니다. 자신은 권사윤이었고 한건주는 한건주라는 이름을 가졌다. 이름은 사람을 대변하고 위치와 존재를 증명해 주는 수단이니, 그간 알지도 못했던 과거가 아닌 지금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니 내가 연상이지. 그래, 그 새낀 여전히 애새끼고.

사윤은 신화를 옮겨다 놓은 그림에서 막 튀어나온 것처럼 성스러워 보였던 금발 한건주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 얼굴 위에 제가 익히 알고 있던 얼굴을 그려 놨다.

예민해 보이고, 불퉁해 보이고 고혹적이란 말이 떠오를 만큼 한없이 아름다웠다가 웃거나 입술을 삐죽일 때면 어린 티가 풀풀 나는 풋내기 청년.

역시 이게 더 어울린다. 머릿속으로 한 차례 정리하니 만족스러운 미소가 입꼬리에 걸렸다. 마음이 차분해지자 조금 전 보았던 천기의 내용이 다시금 머릿속에서 되풀이되었다.

꼭 잊지 말라는 것처럼.

“…….”

하늘이 덮어 둔 비밀이라고 했었나.

사윤은 혀를 차며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솔직히 말해서 당황스러웠다. 깨끗한 백지에 과거라는 그림을 강제로 붙여 넣은 듯 어색했고 낯설었다. 모든 게 남의 이야기같이 느껴져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래도 시스템이 괜히 보여 준 광경이 아닐 테니 받아들이긴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건 전생으로 봐야 하는 건가?

요약하자면 전생의 한건주가 악신이 된 걸 구해 줬다가 그 업까지 제가 짊어지게 됐다는 소리인 것 같은데….

차분히 정리해 나가다 말고 돌연 눈썹 사이가 홱 좁혀졌다. 이마에 깊은 우물을 만든 사윤이 눈살을 찡그렸다.

갑자기 이건 왜 알려 주는 거지?

여태껏 모르고도 잘 버텼다. 오히려 왜 자신이었는지 물었을 때도 알려 주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진실을 드러낸다고?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애초에 시스템은 신이 아니던가. 그런데 왜 갑자기….

의문을 강하게 품었을 때였다.

“씁.”

머리가 지끈거렸다. 문득 눈앞이 점멸하고 어디선가 뇌를 관통하는 신성한 선율이 들려왔다. 아아아아아. 아리아처럼 들리는 노랫소리에 사윤은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았다. 누군가의 비명이 퍼진다. 무언가가 살려 달라 손을 번쩍번쩍 들었다가 다시 물속으로 빠지는 광경이 암흑 속에서 펼쳐졌다. 그게 꼭 광란에 빠진 춤 같다고 인식된 순간 몸이 무너졌다. 사윤은 무릎을 꿇었다.

아아아아아.

노랫소리가 들린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며 코피가 쏟아졌다.

천사가 나팔을 불고 악마가 춤을 추는 곳으로 들어오리라.

저주는 가장 선량한 것에게

축복은 가장 악랄한 것에게.

운명, 그리고 운명.

영속된 운명은 머리가 꼬리를 물어 되풀이되니

묵시. 이것은 묵시.

익숙한 가사의 운율이 세뇌처럼 달팽이관을 툭툭 건드린다. 두통이 심해져 머리를 붙든 사윤이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쾅쾅쾅! 몇 번이고 내리찍으며 통각을 찾아 헤맸다. 마침내 얼얼한 통증이 느껴져 고개를 들자 피 한 줄기가 흘러내려 미간에 붉은 선을 그었다.

꿈에 젖은 듯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아….”

사윤은 탄식을 흘렸다.

거대한 체구의 일곱 신이 눈앞에 서 있다. 정확히는 사윤을 가운데에 두고 둘러싸고 있었다. 당황한 사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고개를 숙였다.

어.

손이 조그맣다.

마치 천기를 엿보았을 때 확인한 작은 천사의 몸처럼.

쾅쾅쾅!

일곱 신이 집중하라는 듯 창대를 내리쳤다.

사윤아.

태양을 닮아 갈 소년아.

감히 죄인을 풀어 주고 그 업을 덮어쓰게 된 아이야.

천둥처럼 내리친 음성은 구슬프게 들리기도 했고 조롱하듯 느껴지기도 했다. 쾅쾅 다시 한번 창대가 바닥을 난도질했다.

일곱 신이 네 운명을 선언하니.

너는 십만의 영혼을 학살한 죄인의 업을 넘겨받아 영원토록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미물로 천 번을 살고 사람으로 죄를 지을 것이다. 죄를 죄로 씻어 영혼의 격이 떨어지리라. 영원히 떨치지 못한 죄업은 계속해서 너를 옭아맬 터니 너는 끝이 없는 삶과 죽음을 반복하며 네가 짊어진 죄의 무게를 깨닫게 될 것이다.

선언이 내려지자 나팔 소리가 커졌다. 일곱 신이 입을 모아 노래를 부른다.

천사가 나팔을 불고 악마가 춤을 추는 곳으로 들어오리라.

저주는 가장 선량한 것에게

축복은 가장 악랄한 것에게.

그건 정말로 저주의 주문 같았다.

사윤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심장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누군가 입을 강제로 벌리게 해 불꽃을 삼키게 한 것처럼 속이 뜨거워 견딜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머리도 깨질 듯 아팠다. 전기톱으로 갈아 버린다 해도 이보다 고통스럽진 않을 거였다.

수많은 고통을 겪어 봤다 자부했건만 그 무엇도 이리 영혼에 아로새겨질 만큼 잔인하게 아프진 않았다. 당장이라도 숨이 꺼질 것처럼 헐떡거리며 몸부림친 사윤이 고개를 홱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천장에 쓰인 무수히 많은 글씨가 보인다. 저건 죄인이 죽인 십만 영혼의 이름이었다.

운명, 그리고 운명.

영속된 운명은 머리가 꼬리를 물어 되풀이되니.

허억!

살고자 하는 본능으로 숨을 들이켰던 사윤은 곧 후회했다. 모든 호흡 기관이 파업이라도 선언한 양 날숨이 불가능해졌다. 삼킨 것을 뱉어 낼 수도, 더 삼킬 수도 없어 공백을 물고 컥컥거렸다. 고개가 반사적으로 추락한다. 시커멓게 변한 두 동공에 바닥이 비쳤다.

묵시. 이것은 묵시.

그 순간 사윤의 눈동자에 이채가 번뜩였다. 바닥에서 올라온 불투명한 세 쌍의 손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 감싸 쥐었다.

사윤의 온몸에는 뱀 비늘이 돋아나고 있었다. 뜨거웠던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 가는 사윤을 잡아 준 손이 부드럽게 얼굴을 어루만지며 온기를 나눠 줬다. 사윤은 숨도 쉬지 못하고 그 손을 지켜봤다.

사윤아, 우리의 작은 태양.

선량한 너를 위해 한 가지 축복을 내리니.

사윤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인다. 이마에 따뜻한 무언가가 닿았다.

너를 불행에서 구제하는 것 오직 너란다.

눈앞이 번쩍거린다.

‘가장 불행할 당신에게(L)’

그 문구가 각막에 낙인처럼 찍혔을 때 작은 사윤은 계시처럼 깨달음을 떠안았다. 구원은 그 어디에도 없고 동시에 모든 곳에 깔려 있다.

“허억!”

몸을 뒤덮었던 지고한 기운이 해일처럼 과격하게 밀려들어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숨통이 트였다. 다시 성인의 몸으로 돌아온 사윤은 부족했던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호흡을 확보하고 허리를 바로 폈다. 곧바로 상태창을 켰다.

‘가장 불행할 당신에게(L)’

한때는 기만이라고 생각했던 특전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모든 게 시리고 차가우며 또 지독한 노기가 서려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제 상태창 중에서 단 두 문장만이 온기를 지니고 있다. 하나가 비활성화로 떠 있는 저항하는 자였고, 나머지 하나가 저 빌어먹을 특전이었다.

사윤은 요란히 날뛰는 심장을 느끼며 특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름을 누르자 자동 제세동기라도 작동시킨 듯 심장이 쿵! 한 번 격렬하게 뛰고 강한 빛이 눈앞에 번진다.

<축하드립니다! 특수 게이트, ‘진정한 인류의 악?’을 클리어하셨습니다.>

<게이트에 남겨진 표식이 발현됩니다.>

<악으로서 삶을 끝낼 것인가?>

한 번에 세 알림창이 뜨며 빛이 번졌던 시야를 채운다. 사윤이 멍하게 있으니 이어서 띠링! 하고 알림음 한 번이 더 울렸다.

<(º □ º l|l)>

사윤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나씩 모아 두었던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진다. 잠금이 풀린다. 드디어 정체를 모르겠던 그림의 완성본을 알 것 같아 눈을 흐리게 뜬 사윤이 입술을 감쳐물었다.

활성화를 위한 퀘스트가 처음 생성되었을 때, 한건주를 만났을 때, 이재희를 만났을 때. 그 모든 순간에 희망을 품었다. 그것들이 저를 이 지독한 삶에서 구제할 줄 알았다. 끝도 없이 이어져 온 불행을 끊을 열쇠가 될 줄 알았고 그들이 자신을 구할 줄 알았다.

죽여 줄 줄 알았다.

그게 전부 멍청한 착각인지도 모르고.

저 정체 모를 시스템은 저항하는 자 성향을 제게 드러냈을 때부터 묻고 있었다.

악으로서 삶을 끝낼 거냐고.

뜨거운 숨이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다. 온기가 녹아 있는 숨이다. 심장의 박동과 삶의 활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숨이었다.

닥쳐온 불행을 향한 저항은, 억울한 삶을 향한 저항은 남이 대신 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인생을 남이 대신 살아가 주는 것도, 내 고통을 남이 대신 껴안아 주는 것도 아니다.

삶의 주체는 자신이다.

결국 체념하는 것도, 순응하는 것도, 발버둥 치는 것도, 저항하는 것도.

구원하는 것도 삶을 살아가는 본인의 의지가 뒤따라야 하는 일이었다.

그 간단한 걸 몰라서 한참을 되돌아왔다.

<당신의 페어의 체력이 1% 이하로 하락합니다!>

경고하는 알림창이 떠 사윤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는 저게 위험 신호로 보이지 않았다. 저를 향한 재촉 같았고 종용 같았으며 응원처럼 보였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

어이가 없어 중얼거리다가 손을 뻗었다.

나는 이미 너를 위해 공포에 맞서기로 했다. 그럼 더 망설일 게 있나?

눈동자에 초점이 바로 잡힌다.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시스템이 다시 한번 알림을 띄웠다.

<악으로서 삶을 끝낼 것인가?>

“아니.”

사윤은 대답과 함께 알림창을 껐다. 기분 좋은 빛이 몸을 감싼다.

<활성화를 위한 걸음 퀘스트 클리어 조건 달성! 새로운 성향이 활성화됩니다.>

<당신의 두 번째 성향은 ‘저항하는 자’입니다.>

<성향 대립으로 기존 성향 ‘진정한 인류의 악’이 일시적 비활성화됩니다!>

<조력자와 함께 당신들을 둘러싼 운명에 저항하세요! (º □ º l|l)>

알림과 함께 끝없는 어둠이 걷히며 사윤이 딛고 있던 땅이 훅 하고 꺼졌다.

“…형!”

저승의 강 위에 뜬 나룻배에서 마침내 열린 출구로 향하려 했던 한건주가 추락하는 사윤을 보고 놀라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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