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2화. 저항하는 자 (1)
아무래도 자신의 말은 그에게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분명 이름을 불렀는데도 답이 없는 걸 보면. 이건 파편 속 장면을 볼 때와 비슷했다. 아니면 그의 이름이 한건주가 아니던가.
생각해 보니 얼굴의 생김새 말곤 모든 게 낯설긴 했다.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긴 장발이라든가, 음침하다 못해 가끔 우울함을 선보이는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금발이라든가, 거슬리도록 치렁치렁한 흰 의복이라든가.
현재의 한건주가 정돈된 화려함 속에서의 우울이 있다면 눈앞의 한건주는 그저 화려했다.
장발의 남자는 정원을 느릿하게 걸었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켜다가 콧노래를 부르다가 한다. 과장되었다 느낄 만큼 즐거움이 가득한 안색이었다. 그때 작은 소년 하나가 한건주에게 달려왔다. 단단한 무릎에 쾅 부딪힌 소년이 뒤로 나자빠진다.
어이쿠.
장발 남자가 놀라며 몸을 수그렸다. 엉덩방아를 찧은 소년이 고개를 든다.
사윤은 이번에도 호흡을 멈췄다.
저건 얼굴이 왜 저래.
소년의 얼굴은 자신의 모습을 본떠 만든 듯 어릴 적 집에 걸려 있던 액자 속 자신과 똑같았다. 장발 남자와 마찬가지로 하얀 의복을 입고 있는 것 말고는.
아, 하나 더 다른 게 있다면 눈이 푸르다는 것 정도?
그러고 보니 한건주는 또 금안이었다.
「괜찮니?」
넘어진 소년을 일으켜 세운 남자가 묻는다. 소년은 화려한 얼굴에 홀린 듯 입을 벌리고 멍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싱긋, 남자가 웃는다. 소년의 얼굴이 붉어졌다.
「괜찮아요!」
씩씩한 대답이다. 남자는 소년의 옷에 묻은 흙을 털어 주며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못 보던 얼굴인데.」
「아, 이번에 선정된 수습 천사예요.」
남자의 눈썹이 위로 들썩였다.
「가장 선하다던?」
「네?」
「…아무것도 아니다. 네가 좀 유명해서 명성만 들어 봤을 뿐이야. 주신의 후예라지?」
「아….」
소년이 조금 쑥스러운 미소를 품었다. 사윤은 기분이 더러워졌다.
누구 얼굴로 저딴 표정을 지어?
분명 같은 얼굴인데 개차반으로 살아온 저와 달리, 저 소년은 악인 상대로도 화 한 번 못 낼 만큼 순해 보였으며, 눈앞의 한건주가 꼬시면 꼬시는 대로 홀라당 넘어가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정도로 호구 기질이 있어 보였다. 얕보일 만한 표정을 시도 때도 없이 지어 보이는 건 덤이었다.
밤쥐 길드원이었다면 뒤통수 한 대 치면서 인상 좀 쓰고 무섭게 다니라고 뭐라 했을 태도다. 근데 그런 태도를 보이는 이가 하필이면 제 얼굴을 하고 있어 기분이 묘했다.
장발 남자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직은 예비인가? 열심히 해야겠네.」
「네…! 저, 신님은 따로 준비하지 않는 건가요?」
「무엇을? 승급?」
「네…. 주신님께 들었는데 곧 별자리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하하하!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경쾌한 웃음이었으나 결코 긍정적이지 않았다. 사윤은 꾸며 낸 미소 아래 숨겨진 질척한 감정을 눈치챘다.
저거 심기 뒤틀려 있네.
눈앞의 소년은 그걸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관록이 없어 보였으나 사윤은 아니었다. 장발 한건주는 어딘가 꼬여 있는 놈이었다. 그러니 투명해야 마땅할 웃음이 저렇게 뱀처럼 미끈거리고 불투명한 채 집요한 거다. 그 아래 깔린 그늘을 가리기 위해서 안달 났기에.
비슷한 미소를 수도 없이 지어 본 경험자라 알 수 있었다.
「뱀 새끼라고 무시당한 것만 천 년인데 별자리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그가 작게 뇌까린다. 소년은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건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남자는 알 거 없다는 듯 소년의 머리를 매만졌다. 전보다 거친 동작이었다. 힘이 꽉 눌러 담긴 손길에 소년이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네 말대로 별자리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걸 위해서 따로 승급을 준비할 생각까진 없어.」
「왜요?」
「내가 승급한다 한들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거거든. 깨끗하고 고귀한 척들 하시지만 더럽게도 근원을 중시하는 늙은이들이니.」
신랄한 말에 소년이 숨을 헉 들이켰다. 미소의 뜻은 몰랐으면서 저 말뜻은 또 아나 보다. 다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린 그가 검지를 입술 위에 세우곤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런 말 하면 주신님이 잡아가요!」
「잡아가 보라지….」
겁을 주는 말에 오히려 으름장을 놓는다. 소년은 아연실색해 할 말을 잃었다. 얼빠진 표정이 마음에 든 건지 또 한 번 웃은 장발의 남자가 나른한 호선을 입가에 내걸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판을 벌여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판을 벌여요?」
「그래. 천 년을 지지부진한 승급이니, 기폭제라도 걸어 줘야지…. 날 인정 못 하시겠다는데 다른 방식으로라도 인정받아야 하지 않겠어.」
수상쩍은 이야기다. 사윤이 보기엔 아무래도 저 소년이 장발 한건주를 자극시킨 것 같았지만 소년은 인지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남자가 문득 장난기 어린 미소를 꾸며 냈다.
「너는 내가 마음에 드니?」
「어, 어떻게 아셨어요?」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를 수가 있나. 왜, 네가 주신이 되면 그 보좌에 나를 앉히고 싶어?」
「……!」
정곡이었나 보다. 표정을 더럽게도 못 숨기는 소년이 입을 가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남자가 고개를 젖히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안에 억눌러 담긴 지독한 열등감을 사윤은 느낄 수 있었다. 종국엔 허리까지 고꾸라트리며 감정을 토한 이가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 내더니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뱉었다.
「천 년이나 먼저 자격을 얻어도 결국 발아래에 깔릴 신세란 말이지.」
오싹함이 몸을 스친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햇살이 밝게 비춰 따사로웠던 정원에 한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이럴 거면 그냥 판을 엎을까?」
그가 소년에게 묻는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소년은 말없이 손만 꼼지락거렸다. 작은 꼬마가 제 눈치를 보는 게 마음에 들었는지 시원하게 웃다가 자조감 어린 시선을 흘린 이가 목이 드러나도록 고개를 젖히고 햇빛을 마주했다.
「내가 마음에 든다고 했지….」
「네.」
「그럼 무슨 일이 생겨도, 내 편을 들어 줄래?」
목소리는 간악했으나 제3자의 시선으로 판단했을 때 그건 동아줄을 내려 달라는 간청이었다. 어딘가에 기대고 매달리고 싶어 티를 내고 있는 거다. 소년은 본능적으로 그걸 눈치챈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웃는다.
환하게.
눈꼬리를 최대한 휘어 보이면서.
…왜 내가 지랄이야.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는 것 같아 사윤은 불편함을 호소하며 장면을 지켜봤다.
「그럼 약속 하나 할까. 네가 내 편을 들어 주면, 나도 언젠가 네 아래에 들어갈게.」
눈웃음을 지으면서 현혹하는 말에 소년은 알겠다 대답했다. 남자의 미소가 짙어졌다.
화면이 바뀐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걸 보여 주듯 영상을 수백 배로 빨리 감은 양 모든 장면이 훅훅 지나갔다. 사윤의 동체 시력은 그중에서 몇몇 장면을 제대로 잡아낼 수 있었다.
어린 소년이 장발 남자와 노는 장면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남자가 보이질 않는다. 소년은 그를 찾아 정원에 방문했지만, 그때마다 허탕을 쳤다. 낙심한 소년의 어깨를 붙잡은 누군가 말한다. 신이 타락했대! 인간을 십만 명이나 죽였다는데? 이례적인 비상사태였다.
난리가 난 신적인 존재들이 바쁘게 뛰어다녔다. 소년은 눈치를 보며 작은 체구를 이용해 신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이리저리 치인 끝에 겨우 빼꼼 고개를 내밀자 진행 중인 재판이 보였다. 일곱 신에게 둘러싸인 한 신이 고개를 처박은 채 미치광이처럼 웃고 있다. 창대 같은 것으로 바닥을 내리친 일곱 신이 호통친다.
「왜 그랬느냐?」
엄중한 목소리에 시선을 아래로 두던 이가 고개를 들었다.
「불공평해서.」
그의 눈엔 염화 같은 분노가 이글거렸다.
「수백 년간 생각했지. 왜 나는 안 되는 거지? 왜 나만 이런 취급이고 왜 같은 시기에 신좌에 올랐으면서 나만 하급 신에 천 년을 머무른 거지? 운이 좋은 누군가는 1년 만에 주신의 후계자가 되는데 왜 나만?」
덧붙인 웃음기엔 광기가 깃들어 있었다.
「계속 생각해 보니 알겠더라고. 내가 뱀이라서, 미물 주제에 신좌에 올라서 하대한 거지. 나를 천박하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그러니!」
그건 오랫동안 쌓인 울분을 토해 내는 목소리였다. 눈에 핏발이 선 이가 주신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 모습이 처절하다고 사윤은 느꼈다. 소년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재판을 보며 혀를 차고 욕하고 조롱하는 다른 신과 달리 소년의 얼굴은 연민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러니 너희가 올려 주지 않는다면 나라도 천 년의 노고를 입증해야지. 너네가 빌어먹을 주신이라, 나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악신이 되어 너희와 동등한 위치에 서겠다.」
한쪽 입꼬리만 삐뚜름하게 올린 남자가 선언했다. 화려한 금발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초라했고, 볼품없었다. 찬란한 빛을 잃은 머리카락이 서서히 검게 물든다. 햇살을 품은 듯한 금빛의 눈동자도.
온기를 모조리 잃어버린 건지 뼈마저 얼릴 지독한 한기가 남자를 에워쌌다. 신들이 수군거렸다. 웅성거림이 커지고 불안감이 조장되었을 때 한 번 더 쿵! 창대를 내리친 주신이 소란에 제동을 걸었다.
「타락했구나.」
죄를 알리는 목소리가 묵직하다. 남자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분노만 드러냈다.
「십만 명을 살해하고 악신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건 타락이다. 네 신좌를 뺏고 진명을 빼앗아 천계에서 추락시키마. 타락한 신에게 내어 줄 별자리는 없다.」
이례적인 일이었는지 신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남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너희와 내가 같은 위치인데 나를 어떻게 추락시키려고.」
「대가를 제공한다면 못 할 것도 없지. 그러니 네가 여기 잡혀 있는 것 아니겠나?」
주신들이 조롱하듯 웃었다. 남자가 입술을 꽉 깨물고 그들을 노려보다가 포기한 듯 고개를 돌린다. 그 순간 그와 소년의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놀란 얼굴을 했고 소년이 절망을 드러냈다. 그를 확인한 이가 피식 웃는다.
「나는 못 지켰는데, 너는 내 편을 들어 주네….」
작은 속삭임을 들은 소년이 경직됐다. 소년의 심장이 출렁거렸음을 사윤도 인지했다.
다시 장면이 빠르게 감긴다. 이번에는 아무리 눈에 힘을 주고 전력을 다해 봐도 어떤 상황인지 분석할 수 없었다. 마침내 정신없이 바뀌던 화면이 새로운 공간을 천천히 비추었다.
춥고 어둑한 지하 감옥. 그곳에 추락한 신이 구속돼 있었다. 그 굳센 철장 앞으로 작은 소년이 다가갔다. 사윤을 닮은 그 소년이었다.
기척을 눈치채고 기운 없이 고개를 들었던 남자가 작게 탄식했다.
「이야, 대단하네. 여긴 어떻게 왔대. 선임이 들여보냈어?」
악신이 된 영향인 건지 아니면 선함의 가면을 집어 던져 본성이 드러난 건지 남자의 어투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경박하게 느껴졌다. 소년은 철장 앞에서 머뭇거리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왜, 하는 눈을 마주하고 우물쭈물한다. 남자는 그런 소년을 흥미롭다는 듯 지켜봤다.
이리 움직였다가 저리 움직였다가.
한참을 정신없게 좌우를 오가며 고민하는 듯했던 소년이 돌연 쾅! 철장을 붙잡았다. 와씨 깜짝이야. 놀란 남자가 몸을 살짝 물리고 소년이 데굴, 눈을 굴리다 입을 열었다.
「…도와줄까요?」
「…뭐?」
「…약속했으니까. 편들어 주겠다고. 그리고 신님도 약속을 지켜야 하니까….」
얼버무리듯 말하면서도 원하는 바는 확고하다.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가 소년의 결심을 증명하고 있었다.
남자는 어떠한 생각도 비치지 않는 검은 눈으로 소년을 응시했다. 복잡한 눈길이 닿았다가 사라진다.
「네가 날 돕겠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남자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음. 알고 있어? 날 도우면 네가 내 운명을 대신 짊어지게 되는 거야. 그게 무서워서 다들 죄수랑은 말도 안 섞으려 하지. 자기 것도 아닌 운명을 대신 감당하게 되는 건데 누가 원하겠어?」
자조적으로 말한 이가 감옥을 훑는다. 봐, 근처에 아무도 없잖아. 불길해서 안 닿으려고. 그가 말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소년의 얼굴은 더 단호해졌다. 남자가 헛숨을 흘렸다.
「그래도 괜찮아?」
「…그쪽이 사람을 죽인 건 나쁘지만,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게 된 원인에 제가 있다는 것도 알고요. 그러니 괜찮아요. 모든 책임은, 제가 질게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입술을 꾹 씹었다가 웃음을 터트린 이가 벽에 머리를 기댔다.
「너 정말로 가장 순수한 선이구나? 장담하는데 네 선임은 어리석었어. 나였다면 널 절대로 이곳에 들이지 않았을 거야. 원래 아무것에도 물들지 않은 선이 가장 무서운 법이거든. 그래, 그럼 이렇게 하자.」
결론을 내린 남자가 두 손이 묶인 채로 몸을 앞으로 숙였다.
「네가 이번에 날 구해 주면, 다음에 내가 널 구해 줄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도 은혜는 갚아야지.」
「날 구해 줘요?」
「그래. 네가 날 구하면 너는 너무 많은 죄업을 짊어지게 될 거거든. 타천 되는 건 물론이고 미물로 천 번의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며 업을 치르다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 업적을 쌓을 수 있게 되어도 고통받을 거야. 주신이란 새끼들이 좀 고약해? 배신한 널 작정하고 죽이려고 들걸. 그러니 네가 정 날 돕고 싶다면, 나도 널 도울게. 그래, 그땐 전에 약속했던 것처럼 네 아래에 한 번 들어가는 거로 하자. 내가 누구 밑에 있을 성격은 아닌데 너한테는 한번 그래 보지, 뭐.」
자존심도 안 상하는지 아래로 들어가겠다는 얘기를 태연하게 했다. 소년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도와주든 말든 자신은 그를 구해 줄 생각이었으니까.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거래를 마친 소년이 철장에 손을 뻗고 무어라 읊조리자 단단했던 철이 녹아내렸다.
그것으로 장면이 끝났다. 반응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오게 된 사윤은 암흑 속에서 멍하니 서 제가 본 이야기를 곱씹었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내가 이 꼴이 된 게 한건주 때문이라는 거네?
인상을 홱 찌푸렸다가 손으로 입가를 감쌌다.
이거, 한건주한테는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
시발 그 새끼가 연상이었잖아.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