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1화. 잃을 수 있는 것과 잃을 수 없는 것 (3)
발을 내디딜 때마다 철퍽거리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쇠 비린내가 난다. 고인 물이 핏물이던가. 의문을 품으면서도 아래를 내려다보진 않았다. 물소리가 짙어질수록 애써 그냥 넘기려 했던 장면이 계속해서 생각났다.
머릿속이 제법 어지럽다. 개미 하나를 주워다가 제 사고 기관에 심으면 복잡하게 꼬인 길에 허둥지둥 헤매다 출구를 찾지 못하고 죽어 버릴 것이다. 딱 그 정도로 생각이 많았다. 뇌수가 들끓는 느낌이라 아무나 붙잡아 자신이 겪은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반응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내가 미쳐서 이렇게 과민하게 구는 건지, 아니면 누구나 이렇게 굴 수 있는 상황인 건지 알 수 없어서.
그래서 강제 집행은 모두 환각이었다는 건가?
그럼, 아저씨도, 대피소의 사람들도 모두….
마지막 빛 무리만 찾으면 알아낼 수 있을 진실이다. 그 잠깐을 기다리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던 사윤은 저 멀리 반짝거리는 빛을 발견하고 숨을 참았다.
쿵!
심장이 곤두박질친다. 인지하지 못한 사이 들이닥친 중압감에 사윤은 걸음을 멈추고 빛을 노려보았다. 순간적으로 실소가 스쳐 갔다.
“기다리지 못한 게 아닌가….”
이성은 당장 달려가라 외치고 있었는데 발은 같은 자리에 머무른다. 감정과 이성, 행동이 모조리 충돌하고 있었다.
저것을 확인하면 정말로 끝이다. 선택의 여지 없이 이 아늑한 공간을 나가야 할 거고, 다시 태양 아래에 서 해가 뜨고 짐을 관찰하며 덧없는 삶이 지나고 있음을 체감해야 할 거다. 자신만 제외하고 모두가 멀쩡히 살아가는 것을 봐야 할 거고, 바쁘게 굴러가는 차 소리, 사람이 다투는 소리, 개가 짖어 대는 소리, 자신의 생명력이 얼마나 방대한지 증명하는 듯한 소리를 모두 들어야 할 거다.
지금의 적막을 알았는데 다시 그 요란하고 정신없는 소음에 적응할 수 있을 리 없다. 솔직히 말해.
사윤이 제 뺨을 내리쳤다. 뻑 소리가 나며 목 근처에서 과격한 뼈 소리가 들렸다. 옆에 한건주가 있었다면 으레 그랬던 것처럼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가 가늘게 가라앉히곤 미쳤냐고 물었을 행위였다.
“쯧.”
방어 기제를 모두 무시하고 내리친 탓에 볼이 꽤 얼얼했다. 입 안이 터져 피 맛이 났다.
“어차피 정했으면서 뭘 또 고민하고 있어.”
삶이 지겹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걸 보면.
지겨우면 아무런 생각도 나선 안 된다. 하나 지금 머릿속을 채운 건 걱정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시스템이 제게 또 무슨 일을 시킬지 모르기에, 곁에 있던 누군가를 제 손으로 처리하게 될지도 모르기에.
불행을 가득 짊어지고 있었으니 두렵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가 오든, 누구를 만나든, 어떤 노력을 하든 결국 불행해질 거란 생각이 은연중에 뿌리를 내렸다. 누군가 제게 친절하게 대해 주면 그 역시 불행과 한 발짝 가까워질 거라는 생각도.
그런 건 받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렇기에 사윤은 밤쥐의 간부들에게 무언가를 내어 준 적은 있어도 받은 적은 없었다. 함부로 애정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머리 위에 올라가 상명하복의 관계를 취했다. 하지만 발아래에 놓을 수 없는 관계에는 그 대처가 통하질 않는다.
그래서 네 시선도 두려웠지.
애정이 담긴 눈빛이 무서웠다. 가리지 않고선 견딜 수 없을 만큼. 하지만 그 눈빛을 마주하는 것보다,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는 삶을 직시하는 것보다, 있는 줄도 몰랐던 왜곡된 기억을 헤집는 것보다 그런 시선으로 봐 준 사람 한 명을 잃는다는 게 더 두려웠다.
정확히는 타인을 이해하겠답시고 몸을 내던진 미련한 새끼 하나를 잃는다는 게 더 두려웠다.
하필 그 새끼는 저보다도 겁이 많은 놈이다. 지금쯤 어딘가에 처박혀 벌벌 떨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자신이 허구한 날 구해 줬기에 이번에도 구해 줄 거라 믿고 있을지도 몰랐고, 그래서 정신 나간 것처럼 과감하게 굴고 있을 수도 있었다.
이 꽉 깨물고 뺨을 수천 번 내리쳐서라도 정신 차려서 똑바로 걸어야 한다.
사윤이 피를 토해 내고 발을 뻗었다. 사인펜으로 찍은 작은 점 크기에 불과했던 빛이 점점 커진다. 숨이 차올랐다. 숨소리에 물기가 배어들수록 더 단호히 걸었다. 종내 뛰기 시작했다.
마침내 빛에 도달했을 때 사윤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당신의 페어의 체력이 5% 미만으로 하락합니다.>
너는 내가 혼란스러워할 때 가장 극단적인 해답이 되어 준다. 마지막 파편으로 뻗은 손엔 더 이상의 망설임이 없었다.
‘전 형을 살리고 싶어요.’
그때의 답을 지금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네가 살길 바란다.
그걸 위해서라면 삶의 공포도 마주할 만큼.
빛이 사윤을 집어삼킨다. 쓰러지는 사윤의 몸 위로 푸른 시스템창이 흐릿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 * *
삐, 삐, 삐-.
규칙적인 이명이 머릿속에 꽂힌다. 30회 차인 자신의 삶이 펼쳐지리라 예상한 것과 달리 사윤이 보게 된 건 29회 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죽은 사윤의 위로 전에 봤던 깨진 알림창이 떠오른다. 붉게 변한 창은 미친 듯이 흔들리다가 파열음을 내며 깨졌다.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그것이 29회 차의 몸 속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일곱 번째 파편은 일시 정지라도 한 것처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광경을 한참이나 보여 주었다. 그러다 돌연 죽었던 29회 차의 팔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사윤은 눈에 힘을 주었다.
널브러져 있던 29회 차의 몸이 펌프질이라도 한 양 들썩거린다. 배가 터질 듯이 팽창했고 팔다리가 꿈틀거렸다. 육지로 나오게 된 물고기처럼, 혹은 감전당한 사람처럼 마구 발작하던 그때였다.
퍼엉!
폭발음이 들리며 29회 차의 팔이 터졌다. 터진 팔은 이내 잔해끼리 뭉치더니 기존 팔의 세 배가 넘는 크기의 새하얀 팔뚝으로 변했다. 그 아래 팔과 손목, 손가락이 생겨난다.
퍼엉!
이번엔 다리에서 비슷한 변화가 일어났다.
몇 번 몸이 터진 29회 차는 거인화 물약을 마시기라도 한 것처럼 신체 부위가 극대화되더니 마지막엔 얼굴까지 연기에 감싸여 터져 버렸다. 사윤은 숨도 못 쉬고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동공이 흔들린다. 저기 보이는 팔이, 다리가, 근육이 그려진 몸이, 새하얀 피부가 너무도 익숙했다.
마침내 얼굴까지 변한 29회 차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가 2미터도 넘게 자라 길어진 다리로 땅을 디뎠고 양손으로 눈 코 입 따위의 이목구비가 없는 새하얀 맨얼굴을 매만졌다. 이윽고 놈의 등 뒤로 날개가 솟아난다.
하.
사윤이 헛숨을 터트렸다.
<404 not found>
하얗게 변한 29회 차의 머리 위로 회귀를 반복한 횟수 대신 오류 코드가 자리 잡았다.
언노운.
언제부터 나타난 건지 알 수 없는 오류 종자. 게이트에서 주로 출몰하며 사윤과 몇 번이나 부딪쳤던 강대한 적.
‘열일곱 번째 권사윤.’
‘제 스킬이 꿰뚫어 본 언노운의 본질은 열일곱 번째 권사윤이었습니다.’
처음 들은 날 이후로 제대로 신경 써 본 적이 없던 이재희의 경고가 떠올랐다. 이제야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왜 언노운이 제 이름을 달고 있는지 이해가 갔다. 두 눈으로 직접 보았기에 모르쇠로 일관할 수 없었다.
동시에 사윤은 자신과 기이할 정도로 행동 방식이 닮았던 언노운의 전투를 떠올렸다. 무기를 휘두르는 방식도, 다양한 무기를 쓰는 것도, 죽으면 되살아나는 것과 민첩함이 특히 돋보이는 것도 소름 끼칠 만큼 저와 비슷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놈은 자신이었으니까.
내가 죽으면 언노운이 되는 건가?
여러 의미로 충격적이었다. 죽어도 되살아나게 된 지금은 언노운이 될 수 없는 건가? 등골이 섬찟하다. 언제 저런 자아를 잃은 오류 종자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간담이 서늘해지며 언노운을 바라보는 사윤의 눈동자에 서리 기운이 내려앉았다. 들끓었던 머릿속이 차갑게 식는다. 너무 과도한 정보를 알게 돼 오히려 모든 사고 기관이 행동을 정지한 것 같았다.
그 상태로 일곱 번째 파편 속 장면이 끝났다.
<진실 파편 7/7>
<축하드립니다! 모든 파편을 모아 천기 확인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하늘이 덮어 둔 비밀의 일부를 확인하시겠습니까?>
<확인 완료 시 ‘진정한 인류의 악?’ 게이트는 소멸됩니다.>
멍한 시야에 게이트 클리어 알림창이 떴다. 천기 확인까지 마쳐야 게이트가 클리어되는 듯했다.
바라던 순간이었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이 게이트는 정말로, 자신을 정신적으로 몰아붙이기 위한 게이트였나?
이곳에 와서야 알게 된 것들이 너무 많았다. 평범한 방식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 시스템은 왜 이런 곳을 만들었을까.
전에는 불신과 의심으로 가득했던 의문이 이번엔 순수한 궁금증으로 차올랐다. 마지막 파편까지 모두 확인해 본 결과, 마냥 불순한 의도로 만든 게이트 같진 않았다. 오히려 처음으로 받아 본 시스템의 안배라 느껴질 정도라 불편함을 삼기고 알림창에 손을 댔다.
뭐가 됐든 저 빌어먹을 천기라는 걸 확인해 보면 이 의문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한건주의 체력도 얼마 안 남았다.
“저 새끼는 대체 뭘 하고 있길래.”
벌써 3퍼센트 미만으로 떨어져 있어 초조하게 확인창을 눌렀다. 액체처럼 변한 시스템창이 사윤을 덮쳤다.
* * *
가장 먼저 느껴진 건 코끝을 간지럽히는 상쾌한 산들바람이었다. 풀 내음이 가득 밀려오며 따뜻하기 더 이를 데가 없는 햇살이 지천에 깔린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꽃이 잔뜩 피고 녹음으로 가득 메워진 정원이 사윤의 시야에 펼쳐졌다.
신기한 장소였다. 높게 자란 꽃들도 그렇고, 정원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신전 같은 하얀 건물도 그렇고 현실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게 널려 있다. 만들어 낸 허상의 정원 같다고 여기고 있으니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천이 바닥에 끌리는 듯한 소리도 함께였다.
사윤은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화를 담아낸 그림에서나 보일 법한, 호화스러운 천으로 만든 하얀 의복을 입은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온 장발이 햇살을 그대로 머금은 듯한 금빛을 품고 있어 시선을 잡아챘다.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금발 아래의 얼굴을 확인한 사윤이 눈을 깜빡였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멍해진다.
한건주?
금발 남자의 얼굴이 낯익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