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60)화 (260/266)

제260화. 잃을 수 있는 것과 잃을 수 없는 것 (2)

암흑 속을 오래도 헤맨 끝에 다섯 번째 빛 무리를 발견했다. 손을 뻗고 내용을 확인한다. 파편은 8회 차의 사윤을 보여 주었다.

시스템이 무심해진 이후로 사윤의 성장은 빨라졌다. 쓸데없는 감정에 휘둘리는 시간이 적어서 그런지 우유부단하게 굴지 않았고, 시스템과 의미 없는 교류를 하지 않아 녀석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실망하는 일도 없었다. 무엇보다 8회 차 사윤의 부모님은 대공황 당시 죽지 않았다. 그것이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안겨다 주었다.

사윤은 조금 수상한 시스템을 숨기고 각성했다는 사실을 밝혔고 부모님은 그런 사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성장이 다른 회차보다 유독 가파르게 돋보였던 이유 중 부모님의 조력을 빼놓을 순 없었다.

그래서일까. 사윤은 과거 시스템을 의지했던 만큼, 부모님을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시스템이 원하는 위치까지 사윤을 이끌고 가는 데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 것이었는지 시스템은 8회 차의 사윤이 사망했을 때가 돼서야 깨달았을 터다.

8회 차의 죽음은 살해가 아니었다. 몬스터도, 인간도 그를 건들지 않았다. 8회 차 사윤은 자살을 택했다. 그가 게이트에 들어간 사이 사윤을 견제하던 다른 헌터들이 부모를 살해한 게 죽음의 시작이었다.

게이트를 나왔다가 부모님의 사망 소식을 들은 사윤은 사흘간 눈도 못 뜰 정도로 울어 대다가 자살했다. 또다시 사윤이 죽어 버려 혼자 남게 된 시스템은 분노한 듯 푸른 창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다섯 번째 파편이 끝났다.

“…여섯 번째.”

사윤은 곧바로 다음 빛 무리를 찾아 발을 옮겼다. 뛸 만큼 체력이 남아돌지도, 정신력이 탄탄하지도 않았지만 좌절하지 않을 만큼은 되었다. 조금 흔들리려 하면 떨어지고 있는 한건주의 체력이 눈 돌아가게 해 망설이지 않을 수 있었다.

여섯 번째 파편 속에선 10회 차의 사윤이 나왔다. 소년의 머리 위로 떠 있는 숫자가 그가 반복한 회귀의 수를 증명하고 있었다. 다섯 번째 기억에서는 8이, 지금은 10이 머리 위에 떠 있었다.

9회 차에서도 8회 차와 비슷한 죽음을 택한 것인지 10회 차의 사윤은 드디어 현재의 사윤과 비슷한 일을 겪기 시작했다.

강제 집행.

그것이 드디어 나온 것이다.

최대한 인정 없는 방향으로 업데이트된 건지, 시스템은 사윤이 마음 둘 곳을 모조리 없애 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강제 집행을 하지 않으면 직접 시키고 시간을 되돌렸다.

아니, 그런 줄로만 알았다.

삐-.

이명이 날카롭게 고막을 강타했다. 속이 울렁거렸고 두개골을 바늘로 쑤시듯 그악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런 상태에서도 똑바로 버티고 선 사윤이 눈을 부릅떴다. 파편이 보여 주는 장면을 똑바로 직시한다.

“…되돌린 게 아니야?”

형편없는 의문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장면 속 소년은 무언가에 홀린 듯 자리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환각을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공을 응시하는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시커멨다. 장면은 분할 화면처럼 이중으로 나뉘어 멍하게 있는 사윤과 강제 집행이 실현되고 있는 사윤을 보여 주었다. 아무리 보아도 가만히 있는 쪽이 현실이다. 오른쪽 장면은 환각에 가까워 보였다.

움찔, 움찔.

오른쪽의 소년이 사람을 한 번 죽일 때마다 왼쪽의 멍한 존재가 흠칫거렸다.

「사윤아?」

기억하는 것과 똑같은 레퍼토리로 부모님이 죽어 사윤을 책임지게 된 옆집 남자가 소년의 어깨를 잡는다. 소년은 여전히 허공을 응시한 채였다.

시간을 되돌린 게 아니라 정신에 손을 댄 거였어?

욕지기가 치밀었다. 시스템은 사윤이 소중한 이들을 직접 살해할 때까지 강제 집행의 장면을 어린 소년의 뇌에서 끝없이 되풀이되게 만들었다. 초점이 또렷했던 동공은 서서히 빛을 잃었다. 마침내 소년이 몸을 움찔거렸다. 상상 속에서 흐른 시간은 한참인데, 정작 실제 시간은 1분 남짓밖에 흐르지 않은 상태였다.

“아 씨발.”

본능적인 욕설이 튀어나왔다.

보고 싶지 않아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그렇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었다는 거잖아. 그냥 내가 죽였다는 거잖아. 내가.

「사윤아.」

목소리가 들린다. 파편 속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인지 늘 들었던 것과 같은 단순 환청인지 구분이 안 갔다. 사윤은 몸부림쳤다. 보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했으나 통하질 않는다. 시스템은 소년이 움직일 기미를 보이자 강제 집행을 통한 세뇌를 중단했다.

「아….」

환각에서 벗어난 소년이 칼을 쥐었다. 실제의 사윤이 호흡을 멈췄고 무딘 칼날이 핏빛을 머금는다.

「사윤아!」

“……!”

소년의 손이 추락한다. 사윤은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환각으로 조종하기엔 정신력이 너무 허접했던 걸 수도 있고 너무 단단했던 걸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변하지 않는 사실은 시스템이 또다시 실패했다는 점이었다.

11회 차, 12회 차.

비슷한 죽음이 빠르게 반복된다. 13회 차부터 시스템은 사윤이 자살하지 못하도록 막기 시작했다. 네가 자살하면 주변의 모두를 죽이겠다 협박하는 방식이었다.

다행히 시스템의 노고가 빛을 발한 건지 그 방법은 통했다. 사윤은 더 이상 칼끝의 방향을 제 몸에 겨누는 짓을 하지 않았다. 대신 게이트에 들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기만 했다.

시스템은 실패했다.

사윤은 많은 삶을 반복했고, 많이도 죽었다. 계속해서 죽어 나가는 소년을 보며 시스템은 학습하고 또 학습했다. 사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결국 놈은 사윤이 최대한 빨리 성장할 수 있는 루틴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우선 비교적으로 다루기 쉬운 중학생 시절 때 최대한 몰아붙여서 성장치를 끌어올린다. 첫 달에 살인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어 인간성을 마모시키고 이후부턴 어려운 게이트만 골라서 들여보내 생존 본능을 한계치까지 끌어내는 방식이었다.

익숙한 방식이다.

그러나 29회 차의 사윤마저 죽고 말았다. 사인은 형편없게도 중독이었다.

극독으로 인한 사망.

눈도 감지 못한 채로 죽어 버린 사윤을 내려다보게 된 시스템창이 지지직 흔들렸다. 이윽고 깨진 창이 뜬다. 실제의 사윤은 그 창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온 신경을 쏟았다.

<※[email protected]!  – – 소모 · ■ · – · · $%#>

<@&* 와  · – · · 200 · · – 신이 · – – – ok>

<부작 · – [email protected]# · · –>

대체 뭐라고 적힌 거야?

오만상을 찌푸려 가며 확인하는 데까진 성공했으나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글자들은 너무 쪼개져 있었고 기이한 형태로 이상이 난 문자들이 많았다. 표정 가득 물음표가 그려졌을 때 29회 차의 모습마저 서서히 흐려진다. 여섯 번째 파편 속 내용도 이제 끝인 것 같아 곧 다가올 충격에 대비했다. 다섯 번째 파편보다 본 것도 많고 새로 알게 된 것도 많았다.

특히 강제 집행이 환각을 이용한 세뇌의 일종이라는 걸 파악한 것이 꽤 타격이 있었다.

그간의 경험상 이런 식으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현실로 돌아갔을 때의 반동이 거셌음으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분명 암흑으로 물들었던 세상에 다시 한번 밝은 빛이 퍼지더니 새로운 장면이 펼쳐졌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열여섯 살 소년이 나온다. 머리 위에 뜨는 회귀 숫자 번호는 보이지 않았다. 어리숙한 소년은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때문에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넋이 나간 듯 멍하게 서 있는 소년을 젊은 부부가 붙잡았다.

「사윤아. 여기서 나오면 안 돼. 알겠지.」

여인이 사윤을 좁은 방의 옷장으로 밀어 넣으며 당부한다. 무어라 더 덧붙이는 말이 흐릿하게 들렸다. 여인이 슬픈 눈으로 문을 닫기가 무섭게 유리창이 깨지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비명이 몇 번, 고함이 몇 번. 그리고 굉음이 수십 번.

마지막으로 흉측한 것이 식사하는 소리.

옷장 속 소년은 두 귀를 막고 눈을 꼭 감은 채였지만 들리는 모든 소리를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었다. 울음이 차올랐다. 당장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감정을 꾹 눌러 담듯 소년은 몸을 한껏 수그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소년은 비칠거리며 옷장 문을 열었다. 바닥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것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부모님도, 괴물도.

피로 점철된 채 텅 빈 방만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축소된 동공 앞에 푸른 시스템창이 등장했다.

<당신은 인류의 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구원자들에게 맞서, 행성 9180호 ‘지구’를 멸망으로 이끄세요. (b ᵔ▽ᵔ)b>

지금의 사윤에겐 너무도 익숙하고, 눈앞의 장면 속 소년에겐 너무도 낯선 창의 등장이었다. 멍하게 눈을 깜빡이던 소년은 부정하듯 고개를 흔들어 봤다가 눈꺼풀을 비벼 봤다가 했다. 그러고도 창이 사라지지 않자 옷장에 몸을 기댄 채로 무릎을 껴안고 그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안락하다.

괜찮아.

괜찮아.

소년이 중얼거렸다. 창밖으로 해가 서서히 지어 어둠이 찾아오고 다시 날이 밝았다. 잠을 한숨도 못 잔 소년이 여전히 괜찮아를 되뇌고 있을 때 쾅쾅쾅!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 없어요? 괜찮으세요?」

한 줄기 희망 같은 음성에 말라붙은 눈물을 채 닦을 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소년이 문을 열었다. 빛이 들이닥치고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옆집 아저씨다. 안도감이 자리 잡으니 반사적으로 참았던 감정이 쏟아져 눈가가 붉어졌다.

「어어….」

놀란 남자가 서툰 손길로 사윤을 안고 토닥였다. 이어서 집 안의 풍경을 확인한 그가 숨을 들이켜곤 입을 달싹였다.

「…근처에 대피소가 있대. 함께 갈래?」

옆집 남자가 말한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대피소까지 무사히 도착했고, 커뮤니티에서 올라온 영상을 통해 각성자의 정체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소년은 푸른 창을 보며 의심했다가 고개를 젓는다. 저 상태창은 이상하다고. 이 각성은 기이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다 첫 번째 퀘스트를 받았다.

남자를 살해하라는.

그 순간 소년의 머리 위로 숫자가 뜬다.

30.

뚝.

필름이 나가듯 기억이 끊겼다. 되돌아온 사윤이 참았던 피를 토해 내며 바닥을 짚은 채로 허리를 둥글게 말았다.

마지막 기억이 익숙하다.

저건, 현재의 ‘자신’이었다.

<진실 파편 6/7>

<시련을 클리어해 파편을 획득하세요.>

<파편을 모두 모을 경우 천기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윤은 떨리는 손을 꽉 쥐고 주먹으로 쓰러진 몸을 지탱했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다음 파편에서 무슨 장면이 나올지 예상이 간다. 목울대가 몇 번 꿀렁이고 사윤은 피 맛이 나는 침을 삼켰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는다.

<당신의 페어의 체력이 10% 미만입니다!>

내가 제명에 못 죽지.

“넌 진짜… 편애받는 줄 알아야 해, 예쁜아.”

핏물이 샌 입가를 닦은 사윤이 발을 내디뎠다.

마지막 한 걸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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