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8화. 조력자 (8)
<퀘스트 성공! 축하드립니다. 돌발 퀘스트, ‘검은 뱀 처치’ 클리어에 성공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진정한 인류의 악?’으로 진입하는 다른 출구가 1시간 뒤 오픈됩니다.>
“한 시간 뒤?”
성대를 쓰려고 할 때마다 핏물인지 신물인지 모를 것이 올라와 입을 꾹 다물고 시스템창을 노려보았다. 푸른 창이 억울하다는 듯 미약하게 흔들린다. 아득히 먼 상공에서 목소리가 내려왔다.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말게. 한 시간이 우리가 낼 수 있는 최선의 속도일세.”
웃음기가 덧붙은 목소리가 건주를 달랬다.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뭘 위해 그 고생을 하며 뱀을 처치했는데.
혈압이 오르자 한 번 더 목구멍 가득 피비린내가 찼다. 코피라도 날 모양인지 비강까지 치고 올라오는 쇠 냄새에 구역질을 참을 수 없어 허리를 숙이고 토해 내자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바닥을 잘 딛고 있던 발이 돌연 허공으로 떠오른 건 그때였다.
“어어….”
중심을 잃은 몸이 손쉽게 넘어졌다. 엉덩방아라도 찧을 줄 알았는데 통증이 없다. 넘어진 자세 그대로 몸이 상승하고 있었다. 꼭 엘리베이터라도 탄 것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저승 왕의 얼굴이 보였다.
“자네가 싸우는 건 전부 지켜봤다네. 조금만 더 용을 썼으면 내게로 왔을 텐데 참 아쉽군, 아쉬워….”
껄껄거리는 웃음치고 들려온 말은 꽤 섬뜩했다. 경계심을 바짝 세우자 왕이 자리를 권했다. 책상 위에는 일전에 봤던 것과는 다른 잔이 놓여 있었다.
“이번에는 의심하지 말고 들게나. 자네를 위해 준비했으니.”
“…….”
“속고만 살았나? 내 자네의 간절함을 높이 평가해 준비한 차래도.”
왕이 재차 권유한다. 보기에는 투명한 물이었지만 혹시 몰라 힐끔거리다가 속으로 시스템을 연신 불렀다. 어떻게 알았는지 저승의 왕이 먼저 반응했다.
“그렇게 내가 못 미덥다니. 반성해야겠군.”
“출구 오픈 시간을 앞당겨 주신다면 믿을 만해지겠죠.”
“자네는 한 시간이 최대라는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구나.”
“더 최선을 다해 보라는 말이었는데 신이라고 해서 모든 걸 들여다보는 건 아닌가 봐요.”
눈꼬리를 길게 늘어트린 건주가 살짝 웃었다. 왕은 몇 번 무례한지고, 중얼거리면서도 그 이상의 불쾌한 티를 내진 않았다.
시간을 좀 확인하고 싶은데.
지하로 떨어질 때와 변한 게 없는 방을 살피며 속으로 읊조리자 시스템이 새로운 알림창을 지원했다.
<‘진정한 인류의 악?’의 다른 출구 오픈까지 58분 22초>
이런다고 화가 풀릴 줄 알고.
작은 친절 몇 번에 감동하기엔 얻어먹은 엿이 너무 많았다. 혀를 차며 시린 손을 녹이는 데 도움이 되는 찻잔을 양손으로 감싸 쥐곤 긴 숨을 내뱉었다. 역한 비린내가 끊이질 않아 부지불식간 콧잔등을 찡긋거리니 저승의 왕이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실수한 티를 냈다.
“그러고 보니 자네를 회복시켜 주는 걸 깜빡했군. 힘들지 않나?”
“…….”
“묻지 않아도 힘들어 보이는군. 그러게 왜 배려를 거부하나? 심신의 안정을 돕는 차라네. 의심하지 말고 좀 들게나.”
속도 편한 신이다. 건주는 망설이다가 차 대신 포션을 꺼냈다. 그거로는 회복이 안 된다고 하는 말도 무시하고 목구멍으로 밀어 넣으니 왕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저승에 와 들은 것 중 가장 유쾌한 소리였다.
“자네가 뭐가 예쁘다고 내가 챙겨야 하는지.”
“……?”
“그래도 약속했으니 죽게 놔둘 순 없지. 강에 대고 맹세했으니 어길 수도 없고.”
침음성을 흘리며 턱을 매만졌다가 주름진 눈꺼풀을 슴벅거린 이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앓는 소리를 한 번 냈다. 보아하니 시스템과 무슨 거래라도 한 모양새였다.
힐끔, 남은 시간을 띄워 주고 있는 창을 바라보자 녀석이 정답이라는 듯 위아래로 가볍게 움직였다. 자기가 한 실수에는 관대하면서 베푼 친절은 사소한 거라도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는 놈이었다.
원래 신들이 다 그런가.
인간이 그들의 형태를 본떠 태어난 생물이라면 인간의 이기심 역시 신들을 닮았으리라. 불경한 생각을 앞에서 대놓고 하고 있으니 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윽고 그가 바스러질 듯 얇은 웃음을 터트렸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질 않는구나. 그 건방짐은.”
신경에 거슬리는 말이었다.
“대체 절 언제 봤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나는 자네를 알지만 자네는 나를 모르지. 그런 순리라네.”
스무고개 하자는 것도 아니고. 상당히 수수께끼 같은 말만 늘어놓는다. 애매하게 호기심을 자극할 뿐,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 주지는 않아 눈을 가늘게 뜨고 알고 있는 정보와 상황을 매칭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으니 과도한 두뇌 사용으로 체력이 하락한다는 웃기지도 않는 알림창이 떴다.
지금 남은 체력이 얼마였더라.
기겁하며 수치를 확인했다. 10 미만이었다. 10에서 하나 떨어져 9.
<빈약 상태에서의 무리한 사고 가속으로 체력이 1 하락합니다. 남은 체력 8>
그게 이젠 8이 되었다.
“허….”
개복치도 아니고 겨우 머리 좀 굴렸다고 체력이 떨어져?
나중에는 기침했다고, 현기증을 느낀다고 체력을 깎을 기세다. 어처구니없어 한 말이었는데 시스템이 체력이 5 이하로 떨어지면 그렇게 될 거라며 경고했다. 체력 수치 10 미만은 사람 취급도 할 수 없는 몸 상태라 강조하면서.
자연스럽게 눈길이 찻잔으로 떨어졌다.
속는 셈 치고 한번 마셔 봐?
셈을 하며 왕에게 눈짓하니 그가 마시라는 듯 권유의 손을 뻗는다. 건주는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무신무의하신 분이라 그냥 마시기는 그렇고, 기왕 베푸실 거 약속도 하나 해 주시죠.”
“약속?”
“이 차가 제게 해가 되면 출구 오픈 시간을 당겨 주시고, 제 몸이 무사히 회복되면 왕께서 알고 계신 것을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물에 빠진 걸 구해 줬더니 보따리도 내놓으라 하는군.”
“따지고 보자면 물에 빠트린 게 그쪽이니까요.”
“나를 찾아온 건 자네겠지만?”
“저희라고 원해서 그 게이트로 들어간 게 아니거든요.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셨으니 그 대가 좀 받으려고 하는데 어려우시다면 됐어요.”
신이라고 전지전능한 건 아닐 테니까.
신경 긁는 말을 덧붙이니 왕이 폭소했다. 웃으라고 한 말도 아닌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참 사소한 거로도 잘 웃었다. 누가 보면 자신이 그를 위한 광대인 줄 알 정도로. 의향을 묻듯이 쳐다보자 진득하게 입꼬리를 올린 저승의 왕이 주전자를 가져왔다. 반쯤 채워졌던 잔이 금방이라도 넘칠 듯 가득 찬다. 대답으로 충분한 행위였다.
출구 오픈 시간을 당기는 건 불가능하다 했으니, 그만큼 자신 있다는 거겠지.
하기야 해를 끼치려면 진작에 수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는 짚고 넘어가야 했다.
“혹시 이 차를 마시면 이승으로 못 돌아가나요?”
어떠한 신체적 위협도 가하지 않고 단순히 저승의 구역을 나갈 수 없게 종속된 형태라면 조금 전의 약속을 빠져나갈 여지가 충분했다. 왕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아닌가?
페르세포네와 석류 일화가 생각나 물은 건데 단순히 구전으로 잘못 내려온 신화인가 싶었다. 아니면 애초에 서로 다른 신이었거나.
그래도 삶에서는 만에 하나라는 단어가 있었음으로 의심 섞인 눈초리를 보내자 왕이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거 없으니 그냥 들게나. 내가 그렇게 비겁하게 보이진 않을 텐데….”
“비겁해 보입니다.”
“말세로구먼.”
왕이 픽 웃었다. 건주는 얼굴 근육의 움직임을 살피다 마침내 찻잔을 들었다. 아무런 향도 나지 않는다. 고민하다가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별다른 맛이 나지 않는 걸 혀로 몇 번 굴려 본 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넘기자, 깔끔하게 넘어간 찻물이 은은한 단맛을 남기며 사라졌다.
<성수를 사용하며 체력과 영혼 수치를 회복하셨습니다. 체력이 1, 영혼 수치가 1 상승합니다.>
“…오.”
반신반의했는데 적어도 음식으로 장난치는 성격은 아니었나 보다. 성수라니. 그 귀한 것을 겨우 차로 끓이는 건가? 신의 사치를 눈앞에서 목격한 기분이라 떨떠름해하자 저승의 왕이 그것 보라는 듯 웃었다.
“이제 내가 베푼 은혜에 감사할 차례일세.”
“뭐, 고맙습니다.”
단조롭게 대답하고 다시 차를 홀짝였다. 한 모금 넘길 때마다 떨어졌던 체력과 영혼 수치가 1씩 회복된다. 마침 며칠간 먹은 것도 없어 깔끔하게 비우고 나니 영혼 수치와 체력 모두 80까지 회복되었다.
만족스러운 호선이 입꼬리에 옅게 걸렸다. 왕이 이걸 원한 게 아니라는 듯 석연치 않은 눈빛을 보냈다.
남은 시간은 45분이다.
왕과 실랑이하는 사이 10분이 사라졌기에 빈 찻잔을 내려놓고 왕이 내놓을 보따리를 기다렸다. 뻔뻔스러운 눈길이 닿자 여러모로 기막히단 감정을 표정으로 표한 신이 입을 열었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말이 이런 건가?”
“저한테 알려 주고 싶은 게 있으시잖아요. 그래서 시스템 오류도 일으킨 거고. 입이 근질거리는 것 같으신데 그쪽한테는 오히려 좋은 거 아닐까요.”
대꾸가 거침없자 왕은 오히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 그려지는 입장으론 당최 상상할 수 없는 기묘한 붓을 든 이가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10만 명을 먹어 치우고 신좌에 올랐다가 추락한 기분이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