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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57)화 (257/266)

제257화. 조력자 (7)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금빛의 눈동자는 분명히 제게로 떨어지는 생명체를 인지하고 있음에도 고요했다. 다가오는 것이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오히려 얌전히 있어 줄 때 돌아서라는 듯 전신이 저릿할 정도의 기세를 뿜어내기까지 했다.

건주는 전율이 이는 손가락에 힘을 더했다.

장검으로 무기를 바꿔 들고 횡으로 그었다. 폭발적인 기운이 격발하여 표적을 향해 달려든다. 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녀석이 틀고 있던 똬리를 더 비좁게 틀듯이 스르르 움직였다.

타아앙!

단단한 가죽에 막힌 공격은 무효로 돌아갔으나 좌절하진 않았다. 어느 정도의 힘으로 타격을 주어야 피해를 입힐 수 있는지 간을 보기 위해서였으니까.

이 정도로는 안 되겠네.

생각했던 것보다 살을 둘러싸고 있는 가죽이 단단했다. 쏟아부은 힘을 두 배로 늘려 다시금 검기를 떨치자 추락하는 힘까지 가세한 기운이 재차 뱀을 타격했다. 미약하지만 옅은 상처를 내는 데 성공했다. 그건 이 힘 이상이면 녀석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뜻이고, 지금의 두 배로 힘을 사용하면 놈에게 유효타를 먹일 수 있다는 소리였다.

됐다.

계산이 끝나자 먼저 내려간 서리 그림자가 활동을 시작했다. 녀석이 바닥에 그림자 검을 꽂아 넣으니 그를 중심으로 익숙한 한기가 공간을 메웠다.

쩌저적!

안 그래도 살벌하도록 추웠던 저승의 지하를 서리가 얼렸다. 사윤이 스킬을 쓸 때 으레 그랬듯 형성된 얼음 지대에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반응하기 시작했다. 놈의 눈동자에 이채가 떴다.

“뱀들은 추위를 못 견딘다지.”

운이 좋았다. 저장해 둔 스킬은 사윤의 서리뿐이었는데 마침 퀘스트로 상대하게 된 괴물이 변온 짐승인 뱀이었으니까. 자극당한 뱀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스슷.

녀석이 입을 벌리자 초록 안개가 놈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닿은 피부가 검게 물든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쾅! 달음박질치듯 빠르게 뛰며 호흡이 거칠어졌다. 중독이다.

독 안개였나.

차오른 피를 퉤 뱉어 낸 건주가 호흡을 갈무리했다.

<체력이 5 하락합니다. 남은 체력 수치 45.>

<중독으로 인해 영혼에 타격이 갑니다! 남은 영혼 수치 40.>

첫 중독이라서 그런지 영혼 수치가 떨어지는 양이 아찔했다.

핏물을 머금은 채로 당황하지 않고 호흡을 이어 갔다. 통증이 가라앉으며 정신이 또렷해졌다.

<스킬, 단전 호흡이 활성화됩니다. 중독 상태에서 10분간 독으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이거로 추가적인 피해는 막았다. 남은 10분 안에.

<주의! 저장된 그림자 사용 시간이 5분 남았습니다.>

아니, 5분 안에 뱀을 제거해야 했다.

서리 그림자의 텅 빈 동공과 건주의 눈이 마주치고 두 인영이 동시에 뱀을 향해 달려들었다. 고개를 든 뱀이 키약 소리를 내며 머리를 뻗는다. 옆으로 물러서 피하고 노출된 목덜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공격은 여전히 얕아 손바닥만 한 생채기가 고작이었다.

“쯧.”

강철 갑옷을 두른 아주 질긴 고기를 썰어 내는 기분이었다.

단단한 가죽은 틀어박힌 검도 쉽게 놓아주지 않아, 베어 내려던 검이 오히려 살 속에 파묻혀 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빼내려는 찰나 뱀이 몸을 움직여 건주를 밀어 냈다.

“흡.”

무게감을 이겨 내지 못하고 몸이 밀려난다. 비칠거리는 틈을 놓치지 않은 뱀이 입을 벌렸다.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젖혀 피했으나 완벽한 회피는 아니었다. 머리카락의 일부가 살짝 잘려 나가며 놈의 입 안에 들어갔다. 서리 그림자가 공격 후의 정적을 노리고 얼어붙은 검을 내리그었다.

카드드득!

시린 기운을 휘감은 검이 건주가 만든 얕은 환부를 파고들었다.

―키이이익!

제 몸을 관통하듯 살결을 갉아먹는 냉기에 뱀이 비명을 내질렀다. 녀석이 몸을 뒤틀며 물러난다. 지하 공간은 거대한 뱀 하나가 똬리를 틀고 누우면 끝일 정도로 협소해, 순식간에 벽까지 몰려 위험할 뻔했던 건주로서는 딱 맞춰 온 지원이었다.

<체력 수치가 4 하락합니다. 남은 체력 41.>

<영혼 수치가 30으로 하락합니다. 현기증에 주의하세요!>

제련용 망치 같은 것으로 머리를 가격한 듯 눈앞이 빙글 돌았다. 이마를 붙잡고 몸을 바로 세운다. 이래선 저승의 왕이 죽음의 기운을 거둬 간 이유가 없었다.

위에서 제 분투를 보고 웃고 있을 왕이 생각나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떠 정신을 바로잡았다. 현기증이 시야를 아득하게 가렸지만 악으로 참아 냈다. 콰득, 혀를 씹으니 쇠 비린내가 올라오면서 눈앞이 또렷해졌다.

벽을 딛고 뛰어올라 뱀의 몸에 발을 뻗는다. 먼저 올라선 발이 닿기가 무섭게 뒤따라오는 걸음을 위로 차듯이 움직여 곡선으로 휘어진 놈 위에 올라탔다. 그를 눈치챈 뱀이 미친 것처럼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왼쪽 벽에 제 몸을 틀어박고.

콰아아앙!

오른쪽 벽에 머리를 내다 꽂으며 위에 올라탄 것을 떨어트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거세게 움직였다. 안 그래도 현기증에 속이 울렁거리던 차였는데 탈것의 운전사가 과격 운전까지 하니 건주는 죽을 맛이었다.

토혈이 쏟아지고 몸이 중심을 잃었다. 한 걸음만 더 뻗으면 검과 닿을 수 있었는데 뱀의 몸부림이 여간 거센 게 아니었다.

욱욱.

몇 번이나 토악질이 밀려왔다. 떨어지려는 몸을 초인적인 힘으로 바로 일으킨 건주가 눈에 핏발을 세우며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서리!”

피가 섞인 부름에 그림자가 황급히 움직였다. 얼어붙은 검이 대도로 바뀌고 마치 야구방망이처럼 그것을 휘둘러 뱀의 몸을 후려친다. 몸부림을 멈춘 뱀이 서리 그림자를 돌아보았다. 찰나간 찾아온 정적에 건주가 검을 뽑아낸 순간이었다.

―키에에엑!

비명을 지른 뱀이 예고도 없이 머리를 돌렸다. 180도로 기이하게 꺾인 목에 놈과 눈을 마주친 건주가 숨을 들이켰다. 녀석이 몸을 튕겼다.

마치 트램펄린 위를 뛰듯 몸이 훅 하고 날아올랐다. 꼬리가 그런 건주를 머리 쪽으로 쳐 내고 머리가 건주의 목 위를 휘감았다. 순식간에 전신에 뱀 가죽이 달라붙는다.

꽈아악!

신경 쓰이던 것을 붙잡은 뱀이 건주의 몸을 조르기 시작했다. 큰 덩치로 작정하고 조르니 웬만한 S급 각성자도 빠져나올 수 없을 만한 조임이 이어졌다.

압박감에 얼굴이 붉어졌다. 모든 장기가 짓눌리는 것 같은 고통에 컥컥거리며 뱀을 쥐어 보려 했으나 쓸데없이 거대한 몸은 손으로 붙잡아 떨쳐 낼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콰드득!

기어이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체력이 40, 38, 35 빠르게 떨어졌고 영혼 수치가 25로 낮아졌다. 실시간으로 죽음이 다가오는 감각에 몸에서 힘이 빠졌다. 서리 그림자가 다급히 뛰어와 대도를 휘둘렀다.

콰아앙!

강렬한 타격에도 뱀은 건주를 놓치지 않았다. 백 번 얻어맞아도 한 놈부터 잡고 가겠다는 듯 꼼짝도 하지 않는 놈에 가망이 없음을 확신하자 금빛의 기운이 미미하게 햇살처럼 찾아오며 바닥을 쳤던 민첩함이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눈앞에 알림창이 뜬다.

<시스템이 당신에게 탈출 루트를 제안합니다. 승낙하시겠습니까?>

부들거리는 손이 확인을 눌렀다.

<스킬, ‘생존 감각’이 활성화됩니다.>

시스템창이 빛으로 변해 건주의 눈에 녹아들었다. 눈앞에 금빛 포탈이 생겼다. 닿을 수 없는 거리라 인상을 홱 쓴 순간 뱀이 뭔가에 홀린 것처럼 앞으로 움직였다. 속박이 느슨해진다. 원래의 스탯만큼 돌아온 민첩함이 빛을 발해 건주는 연체동물처럼 힘이 풀린 몸통에서 빠져나오며 포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뱀이 뒤늦게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려 건주를 잡아채려던 순간 포탈이 스킬 시전자를 집어삼킨다. 건주는 사라진 적을 찾아 고개를 갸웃거리는 뱀의 뒤에서 나타났다.

“죽는 줄 알았네.”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마셨다. 떨어진 체력과 영혼 수치를 회복시켜 주진 않았지만 골절 등 전투에 이상이 가는 물리적인 피해는 포션으로 막아 내는 게 가능했다. 꺾인 팔이 원상태로 돌아오고 생존 감각을 사용해 잔뜩 힘이 빠진 몸을 억지로 움직여 뱀을 박차 더 먼 거리로 이동했다. 발길질에 반응한 녀석이 달려든다.

“서리.”

대도로 연신 뱀을 공격하고 있던 그림자가 푸른빛을 뿜어냈다.

쩌적, 건물 한 채 같던 뱀의 몸이 미약하게나마 얼어붙는다. 그사이 탈진 상태에서 빠져나온 건주가 구속당한 뱀을 지켜보다 입을 달싹였다.

“발광.”

<스킬, 발광이 시전됩니다!>

머리 위로 동그란 구체가 생성되었다. 그것이 어둠을 환히 밝히자, 앞이 컴컴해 시야 확보도 어려웠던 동굴 안에서 최초로 그림자가 생겼다. 쥐고 있던 검을 뱀의 그림자를 향해 날리자 검은 영이 일렁거리며 일어나 뱀을 꽁꽁 묶어 속박했다.

스킬의 여파로 그림자 지배의 등급이 일시적으로 낮아졌으나 효과는 있었다. 역시 주력 스킬을 묶어 두는 게 손해였다.

흘러나오는 피를 닦고 2차전이 시작되었다. 달려드는 건주와 함께, 건주에게 종속되어 있던 모든 그림자가 창 등으로 변해 뱀에게 내리꽂혔다.

서리 그림자가 피부의 일부를 얼리면 그림자 창이 그곳을 가격해 얼어붙었던 부위를 파괴한다. 단순한 과정이었지만 소멸 직전이라 능력이 극대화된 서리 덕분에 거대했던 뱀의 몸은 조금씩 얼음 결정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퀘에에에에엑!

드디어 비명다운 비명이 흘러나왔다. 발작하듯이 몸을 꿈틀거린 뱀이 사납게 동굴을 훑으며 그림자들을 공격했으나 소용없다.

형체 없는 것을 공격해 봤자지.

단순한 영에 불과한 그림자는 물리적인 피해를 입지 않는다. 공격을 가해도 잠시 흩어지기만 할 뿐, 이내 도로 뭉쳐진 그림자가 뱀을 몰아붙였다. 헛수고라는 걸 깨달은 건지 뱀이 표적을 바꿔 건주를 공격했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놈의 머리를 발로 힘껏 찼으나 부족하다. 사윤이었다면 모를까 자신이 무력으로 뱀을 제압하는 건 무리였다.

습관적으로 그와 비교하며 제 힘을 견주고 있을 때 문득 뱀의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윤이었다면.

의식 속으로 기억의 한 장면이 재생된다. 눈이 홉떠졌다.

<10초 뒤 저장 목록, 서리의 주인이 소멸합니다.>

“서리!”

그림자가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 도움을 받았다. 서리 그림자가 휘두르는 대도에 올라타 위로 뛰어오른 건주가 빠르게 하강하며 검을 역수로 쥐었다. 서리 그림자는 마지막으로 뱀의 일부를 얼려 둔 다음 사라졌다.

“흡!”

숨을 들이켜 힘을 모았다. 제겐 헤리스의 단도가 없었으나, 그림자를 사용하면 얼추 흉내는 낼 수 있었다.

상공에서 일직선으로 내려꽂히는 살벌한 기세를 그대로 가져간 건주가 뱀의 머리 위로 착지함과 동시에 무게를 한껏 실은 검을 점막에 꽂아 넣었다. 단도가 아닌 장검이었기에 공격의 깊이는 더했다.

카득!

검의 손잡이까지 모두 쑤셔 넣을 작정으로 힘을 주자 검 끝이 막 같은 것을 뚫고 나가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른 뱀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닿지 않도록 유의하며 사용되었던 모든 그림자를 회수하고 남아 있는 것을 검에 몰아넣었다.

검신 위로 검은 기운이 이글거린다. 건주의 동공이 커졌다. 흑안이 흰자까지 먹어 치울 기세로 짙어지자 그림자가 시선의 방향을 따라갔다.

<한계 이상의 능력을 사용했습니다. 그림자 페널티가 돌아옵니다!>

“커헉!”

목이 콱 막히며 코피가 쏟아졌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세밀한 조종을 멈추지 않으니 그림자는 성공적으로 뱀의 몸 안을 파고들고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몸의 내부에서 아주 사방으로.

속에서 일어난 폭발이었다.

―키이이이이익!

뱀이 새된 소리를 내지르며 몸을 비튼다.

“하….”

칼을 쥘 힘도 없어 저항하지 못하고 떨어진 건주가 숨을 골랐다.

<경고! 남은 체력이 10 미만입니다!>

<경고! 영혼 수치가 1로 하락됩니다. 작은 충격에도 소멸될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정말 밑바닥까지 내려가 버린 체력과 영혼 수치에 시스템이 강렬하게 울렸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남아 있던 마나도 바닥이 났다. 눈동자가 원래의 색을 찾아 돌아가며 검에 감겨 있던 그림자도 빠져나왔다.

모자랐을까.

뱀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여전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반면에 자신은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는 상태였기에 헐떡거리며 바라보자 몇 번 캑캑 피를 토하던 뱀이 건주를 응시했다. 한쪽 눈에 검이 박힌 탓에 외안이 된 놈이 살기를 뿜어냈다.

실패했나 보다.

그렇다면 누워 있을 수 없어 남은 힘을 아득바득 긁어모으고 있던 순간이었다.

―키익….

뱀이 작게 요동치더니 천천히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기우는 방향이 제 쪽인지라 기겁한 건주가 간신히 긁어모은 힘으로 운신해 벽에 바짝 붙었다. 잠시 뒤 육중한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콰아아아앙!

굉음이 공간을 뒤흔든다.

승리의 축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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