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6화. 조력자 (6)
한 번 끊겼던 의식이 가느다란 실을 통해 연결되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이 혼미하다. 아주 약간의 자극에라도 금방 의식을 잃을 것 같았다.
…잃는다고?
뭔가 이상한데.
죽은 게 맞긴 한 건가?
예정된 탑에서의 경험상으론 사람은 죽을 때 몸이 먼저 사망하고 의식이 그 뒤를 따른다. 되살아날 때는 반대로 심장이 먼저 뛰기 시작하고 의식이 깨어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지금 제 상태를 봐라. 까닭 모르게 의식만 남아 있다.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처럼.
“정답이에요!”
…뭐야?
정적을 과감하게 헤치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였다면 놀란 심장을 달랬겠지만 아쉽게도 육신이 없어 순수하게 놀라고만 있으니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
“미안해요, 건주!”
퍽 익숙한 목소리였고.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준 퀘스트가 아니었는데!”
퍽 익숙한 레퍼토리였다.
시스템?
“아, 알아보시겠어요? 아니지. 이럴 땐 알아들으시냐고 물어봐야 하나….”
황당한 의문이었다. 저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태도 하며 말투까지. 영락없이 제게 사윤과 관련된 퀘스트를 띄워 주는 시스템이었기에 건주는 확신을 가졌다. 죽은 건 아닌가 보다. 그랬다면 시스템의 목소리가 들리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사망했다곤 떴는데?
“사망한 건 맞아요. 그러니까, 일시적인 사망인 거죠.”
사고의 흐름을 고스란히 따라가고 있는 건지 시스템이 곧바로 대답했다.
일시적인 사망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
“원래였다면 저승에서 영혼 수치와 체력 수치가 모두 하락하면 죽고 순회의 기회도 뺏긴 채 저승의 왕에게 구속되는 게 맞지만 이번 경우는 예외예요. 공정하지 않은 죽음이었잖아요. 저승의 왕은 당신의 체력을 고의적으로 떨어트렸어요. 힘을 행사해서요!”
시스템이 저승의 주인이 그래선 안 되는 거였다며 길길이 화를 내었다. 잔뜩 새된 목소리에서 짜증이 묻어 나와 있었다.
이런 걸 보면 우호적인데.
그 험한 퀘스트를 띄운 것치고, 진정한 인류의 악이란 게이트를 만들어 사윤과 자신을 잔뜩 몰아붙인 것치곤 목소리로 만나게 된 시스템은 상상 속으로 그려 봤던 것만큼 악랄하지 않았다. 기분이 묘하다. 꼭 역사에 길이 남을 악인이 제 가족에겐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고 착한 가정의 일원이었던 현실을 보는 것 같았다.
시스템이 의식 속을 비집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돌아가요, 건주. 아직 올 때가 아니니까요.”
그럼 나중에는 올 때가 있단 소린가.
“사람이 영원히 살지는 않잖아요. 아, 저주 같은 건 아닌 거 알죠?”
퍽 불길한 소리를 해 놓고 저렇게 포장한다고 해서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이 없어지진 않는다. 불편해하고 있으니 시스템이 또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사과만큼은 잘 하는 걸 보면 역시 사윤에게 뜬 시스템과 제게 뜬 시스템이 비슷한 성향 같진 않았다. 사윤의 시스템이 매칭된 인간을 절망으로 빠트리기 위해 아등바등 기를 쓰는 편이라면 제게 뜬 시스템은 자신과 사윤을 어떻게든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다분히 ‘신’적인 방법으로.
그래서인지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가 안 가는 일이 많았지만 적어도 그게 악의로 한 짓은 아니라는 걸 이번 만남을 통해 확실히 알게 됐다.
그렇다면 이건 기회다. 대체 무슨 속셈인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 시스템과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지금 시간이 허투루 쓰여선 안 됐다.
정리하자면 죽을 상황이 아닌데 왕의 힘으로 죽게 돼 오류가 생겼고 그 오류를 해결했으니 돌아갈 수 있다는 얘기인가.
머릿속을 정리할 겸, 대답도 얻을 겸 묻자 시스템이 긍정해 왔다. 1분 뒤면 자동으로 복귀하게 될 거라는 안내도 해 줘 질문을 서둘렀다.
계획이 뭐야.
“그건 대답해 줄 수 없어요. 알아도 되는 정보와 안 되는 정보가 있거든요.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은 묻어 둬야죠. 하지만 걱정 마요. 우리는 금방 다시 만날 거고, 그땐 당신도 사윤도 자격을 갖추었을 테니까.”
…그럼 이번에 열린 게이트가 그 자격이란 걸 갖추기 위한 건가?
“비슷한 의도긴 했죠. 더 깊은 질문은 저도 곤란하니까 다음 질문!”
자신만큼이나 시스템 역시 이렇게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기다려 왔던 건지 어째 질문자보다 답변자가 진행을 서둘렀다. 확실히 신이라고 해도 무언가로부터 제약을 받고 있긴 한 것 같았다.
대체 뭐로부터?
전지전능한 게 그들일 텐데 누구의 눈치를 보길래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 신들의 위에 무언가가 더 있나. 인간의 입장으로서는 상상도 안 갈 체계였기에 의문을 품다가 지웠다. 고민은 사치다. 당장은 물어볼 수 있는 것들을 더 물어봐야 했다.
형은.
“사윤은 아직 무사해요! 건주 덕이에요.”
몸 말고 형 정신도 멀쩡해?
“음, 그건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 모르겠네요.”
그 게이트, 클리어 안 하고 나갈 방법은 없어?
“그렇게 하면 건주는 자격을 얻지 못해요. 우리가 기껏 당신을 도운 보람이 없죠.”
시스템의 말투가 싸늘해졌다. 그럴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것처럼 단호하게 경고하는 목소리에 불만이 꿈틀거렸다.
도움이라기엔 별로 긍정적인 효과가 없던 것 같은데.
“어떻게 신의 도움이 늘 친절하기만 하겠어요? 아, 시간이 다 됐어요. 이젠 정말 가야 할 시간이에요, 건주. 무의식 속에서라도 만나게 되어 기뻤어요. 지금은 이렇게 목소리로만 대화했지만 다음번엔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할 수 있을 거예요.”
뭐?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고 해 봐요. 행운을 빌어요.”
폭우가 쏟아지듯 속사포로 목소리가 밀려들면서 몸이 갸우뚱 기울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바다 위 부표처럼 아무렇게 떠돌아다니는 것 같던 의식이 순식간에 훅 하고 꺼진다. 무거웠다. 납덩이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한 무언가가 몸 위로 올라가 짓누르는 것처럼.
가볍다는 인식마저 들지 못할 정도로 깃털처럼 날아다녔던 의식이 곤두박질치듯 내려가며 충격이 느껴졌다. 그 뒤로 억, 하는 신음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중력이 건주를 몰아붙였다. 숨이 막힌다. 가슴이 뻐근해지고 온몸의 장기로부터 압력이 전해졌다.
“쿨럭!”
참지 못하고 기침을 내뱉은 순간 눈을 떴다.
“오호, 살아났군.”
저승의 왕이 천장에 뒤통수를 지고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상황이 파악되지 않아 그 모습을 멍하게 보다가 뒤늦게야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뼈가 부러졌다가 맞춰지기라도 한 건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뚜둑, 뚜두둑 살벌한 소리가 들렸다.
시스템 알림창이 떴다.
<오류 복구 완료!>
<오류 보상으로 시스템이 약소한 선물을 내립니다. 모든 신체 이상이 회복됩니다.>
<저승의 왕이 당신에게 사죄의 선물을 전합니다. 훼손되었던 영혼 수치와 체력이 50으로 복구됩니다.>
숨통이 트이며 고통이 물러났다. 살 만해져 호흡을 고르고 있으니 건주의 앞에 쪼그려 앉은 저승의 왕이 큼직한 손을 뻗었다. 일순 감기려 했던 눈을 부릅뜨고 손바닥을 노려봤다. 한 대 치거나 겁을 줄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왕은 건주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리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힘이 빠진 다리가 비칠거린다.
“어허.”
짐짓 엄한 소리를 내며 바로 세워 준 저승의 왕이 씨익 웃었다.
“자네가 쓰러져 있는 동안 협상을 좀 했다네. 그러니 다시 내기를 하지.”
쓰러져 있는 동안이 아니라 죽어 있는 동안이었는데 발뺌도 잘했다.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보다가 이윽고 뜬 퀘스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승의 주인이 당신에게 퀘스트를 부여합니다!>
<돌발 퀘스트 발생! 퀘스트를 클리어하세요!>
-
[돌발 퀘스트 – 검은 뱀 처치]
저승의 지하에는 과거 수만 명의 사람을 집어삼켜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검은 뱀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뱀을 죽여 저승의 왕에게 당신의 가치를 입증을 하세요!
클리어 조건: 뱀 처치
성공 시: ‘진정한 인류의 악?’으로 진입하는 또 다른 출구 제공
실패 시: 영혼 종속
제한 시간: 2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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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퀘스트에 실패할 경우 영혼 수치 하락과 관계없이 당신의 영혼은 저승의 왕에게 종속됩니다.>
쓰러지기 직전 받았던 그 퀘스트였다. 실패 시 주어지는 보상 때문에 오류가 났던 건지 다 똑같은데 실패 시 항목만 변경되어 있었다. 말없이 저승의 왕을 바라보니 그가 인자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이가 드러나자 한기가 몰아쳤다. 온화한 웃음과 달리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몸을 물어뜯을 듯 사나운 혹한의 냉기였다.
그러나 익숙하다.
이와 비슷한 기운을 몇 번이고 받아 본 적이 있었기에.
죽음과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그 빈자리가 여실히 체감되었다.
“인벤토리와 스킬은 쓸 수 있는 겁니까?”
꽃밭에서는 스킬이 써지지 않았다. 비겁하게 팔다리를 묶어 놓고 싸우게 시킬 셈인가 싶어 확인차 묻자 저승의 왕이 껄껄 웃었다.
“내가 그렇게 옹졸해 보이는가?”
“뭐… 대인배처럼 보이진 않죠.”
사윤이 옆에 있었다면 이쯤에서 한 번 피식 웃었으리라.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을 정면에서 받아 낸 저승의 왕이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아무것도 막지 않았고 내 친히 자네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도 잠시 거둬 주었네. 그러니 전력으로 부딪쳐 보게나.”
자네가 그 아이를 기만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시간일세.
중후한 목소리가 나직하게 덧붙이고 건주가 서 있던 바닥이 훅 하고 꺼졌다.
“지하까지 내려가는 통로라네!”
위에서 저승의 왕이 신이 난 듯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추락하는 자세 그대로 멀어지는 왕의 얼굴을 담아내던 건주가 의아하기 짝이 없는 말을 곱씹었다.
기만이라니.
뭔지 몰라도 저승의 왕이 저를 싫어하는 사연이 있는 듯했다.
궁금하긴 했으나 당장은 급한 것이 있다. 공중에서 몸을 틀고 무게 중심을 옮겨 추락 자세를 바꾼 건주가 점점 어두워지는 통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검을 쥐었다. 못 보던 형태의 검이 그의 손에 들리고 입술이 움직인다.
“저장 목록, 서리의 주인.”
시동어를 읊자 검을 중심으로 휘리릭 한기가 회오리처럼 솟아나며 그 속에서 그림자가 피어났다. 사람의 인영을 한 그림자가 벽을 타고 재빠르게 내달린다. 그 움직임을 눈으로 좇던 건주가 그림자를 따라 내려가며 벽을 박찼다.
“…먼저 입 맞춘 건 형이니까.”
그쪽에서 알아서 조건을 충족해 줬으니 딱히 도둑질은 아닌 셈이었다.
뭐, 어차피 일회용 스킬이기도 했고.
옆에선 낄낄 웃는 사윤도 없는데 놀림이라도 당한 것처럼 귀로 열이 몰려 혀를 한 번 찬 건주가 점점 가까이 보이는 세로 동공을 확인했다.
다시 만나기까지, 곧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