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55)화 (255/266)

제255화. 조력자 (5)

“사람마다 주어진 삶이 있지.”

쪼르륵. 저승의 왕이 탁자 위에 놓인 잔을 채웠다. 거대한 덩치와 거리감이 있는 앙증맞은 찻잔이었다. 뒤를 돈 왕이 달그락거리며 주전자를 정리하는 사이 숨을 들이켜자 담백한 향이 호흡 기관을 타고 체내에 퍼졌다. 간지러울 정도로 입맛을 돋우는 향이었으나 그것에 홀려 차를 마시진 않았다.

페르세포네의 석류가 괜히 유명한 게 아니었으므로.

손님이 차를 마시지 않는 걸 본 왕은 어깨만 으쓱거릴 뿐 별다른 압박을 가하지 않았다.

고요한 공간에 찻잎을 매만지는 건조한 소리와 물소리가 새의 지저귐처럼 울린다. 분위기만 놓고 보면 저승이 아닌 어디 한적한 시골 산속에라도 들어온 것 같았다.

예상외로 평화로운데.

시스템의 경고와 달리, 문 안쪽에서 마주하게 된 저승의 왕은 상상처럼 무섭지도, 경고만큼 냉혹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차까지 대접해 주는 인정이 있어 놀랐다. 지금까지 겪었던 저승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 경계심을 품고 있으니 차와 함께 즐길 다과도 접시에 가지런히 담은 이가 건주의 맞은편에 앉았다.

“사람의 삶이 다양한 것처럼 사람마다 짊어진 업도 다양하다네. 업이 무엇인지 아나?”

“대충은 압니다.”

“그렇다면 그 업이 생명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아나?”

“거기까진 모르겠네요.”

가벼운 문답이 오갔다. 솔직한 답변이 마음에 드는 것처럼 웃은 저승의 왕이 잔을 들었다.

“보통 사람이 못된 짓을 하고 죽으면,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거란 말을 듣곤 하지.”

그가 손을 휘둘렀다.

“나는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네.”

허공에 투명한 시스템창이 생성된다. 왕이 손짓하자 화면이 커지며 어두운 영상이 재생되었다. 꽤 익숙한 곳이다. 건주는 화면 속 공간이, 자신이 건너온 죽음의 강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끄아아아악!

재생되는 영상에서 특유의 비명이 들렸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죄를 지은 영혼들은 첫째로 이 지옥에서 죄질에 맞는 대가를 치르지. 살아생전에 지은 죄가 경미할수록 강에서 고통받는 시간이 짧다네.”

왕이 마치 핸드폰 화면을 확대하듯 검지와 엄지를 맞댔다가 쭉 펼치자 화면이 움직이며 강 속의 풍경을 비추었다. 건주로선 알지 못했던 칠흑 같은 강의 내부는 말로만 들었던 여러 형태의 지옥으로 나뉘어 있었다. 간혹 그 처참한 심연을 탈출한 영혼들이 물 위로 올라오곤 했는데 그럴 때면 뱃사공이 나타나 영혼을 조각내고 수거해 갔다. 강에서 터지던 비명은 수거당한 영혼들의 단말마였다.

눈앞에서 실제로 펼쳐진 광경이 아닌 영상일 뿐인데도 어딘지 섬뜩한 감이 있다. 솜털이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공기가 건주와 왕 사이로 스쳤다.

무릎 위로 주먹을 그러쥐는 건주를 왕은 조용히 살폈다. 이윽고 그가 설명을 이어 갔다.

“강에서 죗값에 따른 회개의 시간을 겪은 영혼들은 두 번째로 미물의 삶을 살게 된다네.”

영상이 바뀌었다. 사람들의 발에 지르밟히는 풀이 나왔다가 날아다니는 벌이 나왔다가 한다. 여러 동식물을 비춘 영상은 마지막으로 하루살이를 비추고 꺼졌다.

“탄생과 죽음은 반복되지. 죄를 지은 만큼 미물로서의 삶을 이어 가고 마지막에는 하루살이로 살다가 죽어.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인간이 되지.”

꺼진 영상에 서서히 빛이 들어오면서 아이 울음이 들렸다. 왕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그러나 누구나 바른 인간이 되는 건 아닐세.”

“…….”

켜진 화면 속 영상을 본 건주가 숨을 죽였다. 갓 태어난 아이는 팔이 기이하게 꺾여 있었고 손가락이 하나 부족했으며 말도 안 되는 조산으로 태어난 건가 싶을 정도로 작았다. 빽빽 울어 대는 아이를 본 산모가 충격을 받더니 진이 다하여 기절한다. 소식을 들은 아이의 아버지가 음울한 낯을 했다.

“사람이 죽고 다시 태어나 짊어지게 되는 전생의 것. 그게 업이라네, 대체로는 저리 잘못을 짊어지고 태어나 고생하며 살지. 인간들이 흔히 하는 말에는 우스운 것이 있어. 기형을 갖고 태어난 아이를 보며 애가 무슨 죄를 지어 그리 태어났냐 하지만 그건 거꾸로 된 생각이라네. 죄가 있어 그리 태어난 것이야.”

왕이 꼭 조롱하듯이 낮게 웃었다. 이윽고 영상이 완전히 검게 물들더니 허공에서 시스템창이 사라졌다. 저승의 왕은 이제 건주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야 그가 신이라는 것이 실감이 난다. 단순히 시선이 닿고 있는 것뿐일 텐데도 거대한 무언가가 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감당하기 버거운 것이 어깨 위로 올라탄 기분이다.

<체력이 10만큼 하락합니다. 남은 체력 20.>

<영혼 수치가 5 하락합니다. 남은 영혼 수치 20.>

기우에서 그치진 않았는지 몸에도 즉각 반응이 왔다. 울컥 핏물이 올라와 참지 못하고 뱉어 냈다. 손등으로 흐른 피를 닦으며 몇 번 콜록거린다. 왕은 그런 건주를 말없이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시선이 못내 불편하여 미간을 찌푸린 건주가 입을 열었다.

“왜 제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는 건지 모르겠네요.”

사윤이 지은 죄가 많아 그 업을 짊어지고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러니 구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납득 가지 않는 설득이다. 전생과 현생을 연결 지어 생각하는 건 신의 시각일 뿐, 창조되어 살아가는 인간의 입장으로선 그 두 가지를 합하여 셈을 치르는 것만큼 억울한 것이 없었다.

어쨌든 현생의 영혼은 현생에서 지은 죄가 없었으니까.

물론 사윤의 경우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긴 하나 그 역시 신이라는 작자들이 종용한 것 아닌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위대하긴 또 얼마나 위대하신지 그리고 있는 빌어먹을 큰 그림의 편린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예민하다 못해 불경하기까지 한 눈동자를 정면에서 맞닥트린 왕이 눈을 감았다.

“변함이 없구나, 변함이 없어. 건방진 영혼에는 변함이 없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욕이라는 건 알았다. 눈살을 구기며 불만을 표하다가 입을 달싹였다. 슬슬 사윤에게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 부탁해야 했는데, 눈앞의 상대를 보니 제 요청을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차라리 이상한 영상을 보기 전에 말을 꺼낼 걸 그랬다. 영상이 끝나고 나서부터 분위기가 부쩍 무거워졌기에 후회하는 건주의 앞으로 왕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가볍게 내려놓았을 뿐인데도 쾅! 공간을 깨부술 듯한 굉음이 울렸다. 고개가 자동 반사로 들렸다.

“살아서 저승을 건넌 것아.”

“…….”

소름 끼칠 만큼 낮게 깔린 목소리가 폐를 긁는 것 같았다.

“네가 짊어진 업이 무엇인지 아느냐.”

차분함 속에 노기가 꾹꾹 눌러 담겨 있다. 무엇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기에.

말문이 막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한참 동안 들끓는 듯한 시선으로 건주를 바라보던 눈을 감았다.

“당장 물어 봐야 소용이 없나….”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홀로 내뱉으며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그때까지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건주를 향해 왕이 손가락을 튕겼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러니 내기를 하자꾸나.”

<저승의 주인이 당신에게 퀘스트를 부여합니다!>

<돌발 퀘스트 발생! 퀘스트를 클리어하세요!>

-

[돌발 퀘스트 – 검은 뱀 처치]

저승의 지하에는 과거 수만 명의 사람을 집어삼켜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검은 뱀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뱀을 죽여 저승의 왕에게 당신의 가치를 입증하세요!

클리어 조건: 뱀 처치

성공 시: ‘진정한 인류의 악?’으로 진입하는 또 다른 출구 제공

실패 시: ㅁ502*!#의 기억 강제 각성

“윽!”

퀘스트창이 형성되다가 말고 거세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뇌를 후벼 파는 듯한 고통과 함께 속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 체내의 흐름을 역류시킨 듯한 기분에 몸이 진동한다. 견디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져 피를 토하자 눈과 귀, 코 등 목 위로 열린 모든 구멍에서 검붉은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커헉!”

핏물에 숨구멍이 모두 틀어막힌 기분이었다. 호흡이 확보되지 않아 꺽꺽거리며 바닥을 움켜쥐었으나 다시 일어설 힘조차 없는 몸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명이 울린다.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던 팔 하나가 힘없이 고꾸라졌다.

“…아.”

이곳까지 온 것이 무의미하게 몸에 힘이 빠진다. 시스템창의 에러 때문인지 체력 하락 알림은 뜨지 않았지만, 실시간으로 몸이 약해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흐려지는 시야로 붉어진 시스템이 저승의 왕 앞에 뜬 게 보였다.

“뭐가 문제인가? 협조를 구할 거면 나 역시 이만한 조건은 올려도 괜찮지.”

저승의 왕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시스템창이 왕의 앞에서 격하게 날뛰었다.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위아래로 흔들리더니 왕의 얼굴 앞, 머리 위, 뒤통수에 뜨면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망아지처럼 날뛰는 홀로그램 창을 본 왕이 한숨을 내쉰다.

“알겠네, 알겠어. 자네들은 너무 물러서….”

졌다는 듯 손을 내저은 왕이 무어라 얘기한다. 선명했던 소리는 귀에 물이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먹먹해져 멀어지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뿌옇게 변한 시야가 감긴다. 눈에서 흐른 핏물이 마지막 시야를 붉게 채웠을 때 시스템 알림음이 들렸다. 시각이 사라진 사용자를 위해 음성 지원 기능까지 더해서.

<오류 수정. 시스템이 복구됩니다.>

제일 처음 먼저 들린 알림이었고.

<체력이 모두 하락합니다. 육신이 저승에서의 소유권을 잃습니다.>

<영혼 수치가 모두 하락합니다. 남은 영혼 수치 0. 당신의 영혼이 ‘?’를 잃습니다.>

<정산 중>

.

.

.

<당신은 사망하셨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알림이었다.

건주는 오랜만에 죽음과 맞닿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