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4화. 조력자(4)
“강을 건너면 끝일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네.”
남은 체력 70. 뱃삯으로 낸 영혼 수치는 총 30. 이만하면 생각보다 헐값에 강을 건넜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계산을 다시 해야 할 것 같았다. 그 계산은 강을 건너면 바로 왕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예측을 전제로 한 계산이었으니까.
하긴. 애초에 고작 강 하나 건너면 될 퀘스트가 L급일 리도 없지.
눈앞에는 검은 꽃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심겨 있다. 강 건너에 펼쳐진 꽃밭이라니. 다른 때였으면 퍽 로맨틱하다 느낄 법할 광경이었으나 저승이라서 그런지 화원은 아름답기는커녕 죽음을 머금은 듯 시커먼 빛이라 섬뜩하기만 했다. 무채색 꽃이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꽃잎 하나 흔들릴 일이 없는 화원의 풍경은 시간이 멈춘 곳 같았다.
정체되어 있는 곳.
딱 그런 감상이 들어 주변을 살폈다. 다른 길은 없어 보였으니 걸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도 해쳐선 안 된다.
사공은 세 번의 삯을 받아 간 값어치를 할 생각인지, 배에서 내리는 건주를 배웅하며 그리 경고했다. 꽃을 밟거나 죽여선 안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조심스럽게 한 발을 뻗자 구둣발이 그대로 튕겨 나갔다.
“…뭐야?”
반동의 힘이 어찌나 센지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릴 정도였다. 황당한 얼굴로 자세를 고친 건주가 다시 한번 발을 뻗었다. 착각인가 싶었는데 뱉어지듯 도로 나오는 발을 보며 특수한 장치 같은 게 있음을 깨달았다. 화원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러면 어떻게 들어가라고.
진입 자체를 막으니 이쪽도 난처했다. 사공의 말을 힌트 삼아 헤치지 않겠다며 속으로 세뇌하듯 수십 번 읊조리고 재차 시도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얼마 없는데.
인상이 예민해진다. 조급해진 시선에 문득 신고 있던 구두가 걸렸다.
“…설마?”
고민하다가 다른 수도 없어 구두를 벗었다. 으. 질척한 흙이 맨살에 밟히는 감각이 그렇게 끔찍할 수 없었다.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라 거북함을 이겨 내고 의무감에 한 발 내딛자 세 번 연속 튕겨 나오기만 했던 발이 드디어 화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무엇도 해치지 말라더니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것부터 안 됐나 보다.
뭐 이런 곳이 다 있냐며 중얼거린 뒤 움직이려다가 잠깐 멈추었다.
“…….”
이상한 감촉에 눈살이 절로 구겨졌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곤 천천히 발을 들어 올린다. 흙바닥 위에 붉은 선혈이 남아 있다. 통증은 뒤늦게 찾아왔다.
깨진 유리의 파편을 딛고 서기라도 한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발바닥 전체를 뒤덮어 무심코 손으로 감싸 쥘 뻔했다. 흔들리는 시선이 바닥을 훑었지만 날카로운 것은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체력이 1만큼 하락합니다! 남은 체력 69.>
그러나 시스템 창의 존재가 이 고통이 착각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 주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손으로 치우면서 걸어가야 했는데 사공의 말이 걸림돌이 되었다.
무엇도 해치지 말 것.
구두를 신어서 흙을 짓뭉개는 것도 안 된다면 당연히 손으로 치우는 것도 불가능하리라. 발로 슬금슬금 치우는 건 가능할까 싶어, 발레를 하듯 발끝을 쭉 내린 채로 살짝 움직여 봤으나 눈으로 확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따로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그에 첫 구간만 이상했다 판단하고 발바닥 전체를 내렸을 땐 어림도 없이 똑같은 고통이 들이닥쳤다.
“아!”
신음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확인차 들어 올린 발밑엔 붉은 흔적이 가득했다.
“하.”
슬슬 오기가 생긴다. 발끝으로 디뎠을 땐 느껴지는 게 없었으니 아예 까치발로 걸어 보는 걸 시도했다. 결과는 두 걸음 만에 발톱 안까지 날카로운 것이 처박히는 고통을 맛보고 물러나야 했다.
확인할 땐 느껴지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이 화원을 지나가려고 하면 몸을 공격하는 형식이다. 스킬도 써지지 않아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법 외엔 없었다. 여러 가지 편법을 모두 실패하고 결국 제대로 걷는 걸 택했다. 다양한 고통을 맛본 결과, 그냥 평범하게 걷는 게 제일 덜 아팠다.
시도하느라 아까운 체력만 날렸어.
어느덧 체력은 65까지 떨어져 있었다. 허튼짓으로 소모하긴 아까운 단계에 이렀기에 체념하고 구두를 쥔 채로 걸었다.
한 발, 한 발.
처음 열 걸음까지는 지독하게 아프더니 열한 번째 걸음부터는 고통에 적응한 건지 귀신같이 괜찮아졌다.
<체력이 1만큼 하락합니다! 남은 체력 54.>
물론 체력은 타협하는 것 없이 떨어졌지만. 체력이 이만큼 떨어졌으니 고통에 취약해진 영혼 수치 역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누적된 고통에 영혼이 타격을 입습니다. 영혼 수치가 10 하락합니다. 남은 수치 60.>
꽃밭을 걷다가 죽게 되면 사인은 뭐라고 해야 할까. 무엇이 되었든 사윤에게 얘기할 만한 죽음은 안 됐다. 그가 이 사실을 안다면 배 잡고 웃으며 놀려 댈 거였고 그럼 자신은 수치스러워서 두 번 죽을지도 몰랐다. 확신을 가지며 보폭을 넓히고 속도를 올렸다.
기이한 장소였다. 100미터 남았다 싶으면 50미터까지 부쩍 가까워졌고, 얼마 남지 않았다 싶으면 다시 1킬로미터는 남은 양 멀어졌다. 그래서 아무 생각도 없이 걸었더니 무취의 화원이 피 냄새로 가득해졌을 때 어느덧 발끝이 화원의 끝에 닿아 꽃밭을 벗어났다.
남은 체력 50. 영혼 수치 45.
둘 다 절반 이하까지 내려갔다. 슬슬 위험 수치라는 걸 증명하듯 눈앞이 한 번씩 점멸했다. 체력 하락으로 무거워진 몸을 거닐고 다음 목적지를 찾았다. 질척한 바닥 위로 돌이 불쑥 솟아나 있었는데 그곳에 방향이 화살표로 그려져 있었다. 방향을 따라 걷자 드디어 동굴이 보인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많은 설화 속에서 저승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자주 나오는 게 동굴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계단이 보였다. 천국으로 가는 길의 상징을 상승하는 계단으로 주로 쓰니, 저승은 반대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사용된 모양이었다.
다 와 가나.
벽을 짚으며 천천히 내려갔다. 코너를 두 번쯤 돌며 내려가자 거대한 입구와 그 앞을 지키고 있는 짐승이 보였다.
머리 세 개가 달린 개.
신화 속 동물을 맞닥뜨리고 나서야 정말로 저승에 왔음이 실감 났다. 가까이 다가가자 앞발을 턱 아래로 밀어 넣어 휴식을 취하고 있던 동물이 벌떡 일어났다.
-크르르르르.
눈이 마주치자 단번에 흉흉한 살기를 뿜어낸다. 몬스터도 아닌데 S급 게이트에서 만났던 그 어떤 몬스터보다 거친 기운을 두르고 있었다.
싸워야 하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 승부의 결과를 직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어 영혼을 지불하고 강을 건넌 것처럼, 고통을 감내하고 화원을 가로지른 것처럼, 눈앞의 동물 역시 피할 수 없다면 상대해야 했다. 건주가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머리 세 개 달린 짐승이 눈을 번뜩이며 달려든 그때였다.
반사적으로 칼을 휘두르려던 순간 저승의 왕을 화나게 만들지 말라는 퀘스트 주의 문구가 떠올랐다. 동시에 뱃사공이 경고했던 해치지 말라는 얘기가 눈앞의 동물에게도 해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 놈의 퀘스트가 이렇게 까다로운 건지.
지킬 게 한두 개가 아니다. 아차 하는 사이에 손길이 멈추었고 문지기를 자처한 짐승은 적의 방심을 놓치지 않았다.
콰득!
땅을 차고 뛰어오른 놈이 송곳보다도 날카로운 이빨을 자랑하며 건주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늘 상대방의, 혹은 몬스터의 피가 튀는 것만 보았다가 제 피가 비산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순식간에 체력이 30까지 훅 깎였고 영혼 수치가 절반 하락했다. 시야가 까맣게 물든다. 문득 억울해졌다.
거기서도 아무것도 못 하고 왔는데, 여기서까지 이런 식으로 무력하게 휘둘려야 하나.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똑같이 죽는다면 반격이라도 해야겠다.
더 휘둘리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살점이 뜯겨 나간 어깨를 붙잡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낙법하듯 굴러 무사히 착지한 다음 다시 저승의 개와 대치 시간을 가졌다. 출혈이 크다. 영혼 수치가 떨어진 이후로 회복력이 형편없어진 게 스스로도 체감되었기에 포션을 쓰기 전에 회복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피가 멎지 않으면 더 빨리 죽을 것이다. 그 전에 일격으로 승부를 봐야 해 칼을 돌리며 숨을 죽였다. 사윤과 함께 다니면서 배운 것 중 건주가 가장 빠르게 터득하고 또 제 것으로 만든 건 급소를 노려 최대의 화력을 내는 기습이었다.
적이 방심한 순간이 필요해 팽팽한 긴장을 이어 갔고.
-크르르륵!
인내심이 없는 짐승이 먼저 달려들었다. 모든 스탯이 2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으나 동체 시력은 별개였다. 놈이 어디로 움직일지 그 경로가 예측되었기에 낮은 민첩 스탯으로도 한 번 정도는 피할 수 있던 건주가 왼쪽으로 몸을 던져 굴렀다. 짐승의 머리가 벽에 부딪힌다. 그 틈을 노리며 바로 뛰어들려던 찰나였다.
그만.
낮고 울림이 깊은 목소리가 퍼진다. 마치 시간이 정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건주도, 짐승도 굳은 듯 제자리에 멈춰 움직이지 않았다. 끼이이잉. 머리 셋 달린 짐승이 우는 소리를 낸다. 잠시 후 싸움을 이어 가던 둘의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가 싶더니 짐승이 지키고 있던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