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52)화 (252/266)

제252화. 조력자 (2)

“애초에 형이 공간을 연 것도 신기한데. 아까 그 게이트 클리어 안 하면 못 나가는 공간 아니었나. 설계 실수면 책임을 져야지.”

연이어 내뱉은 말에 시스템이 움찔거렸다. 변명이라도 하듯 좌우로 흔들리는 창을 노려보고 있으니 붉은 창이 꺼지고 푸른 창 하나가 손바닥만 한 크기로 소심하게 떠올랐다.

<새로운 퀘스트는 당신이 많은 각오를 해야 해요. 무척 힘들 거예요. 어려워요. 죽을지도 몰라요. 당신이 죽으면 사윤이 슬퍼해요! (º □ º l|l)>

오랜만에 보는 이모티콘이었다. 손톱만큼 작은 글씨로 적힌 문구를 확대하여 읽어 본다. 저절로 비소가 어렸다.

“예정된 탑은 안 힘들었고 이건 힘든가 보지?”

그때는 이런 경고창도 없었으면서 말 좀 몇 번 주고받았다고 우스운 친절을 베풀고 있었다.

죽는 게 뭐 별거인가. 어차피 헌터로 각성하면 언제 죽을지 모르며 게이트 공략을 반복해야 했다. 그렇기에 헌터들은 대부분 죽음에 대해 어느 정도 초연한 면이 있었으며 그건 건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죽게 되면 이게 제 명인가 보다 싶을 텐데 사서 걱정하고 난리다.

저울 위로 제 죽음과 사윤을 올려 보니 가상의 저울은 너무도 쉬이 기울었다.

‘고맙다.’

결정을 내리는 데는 귓가를 울린 그 목소리 하나면 충분했다.

다시 만나서 물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왜 나한테 키스했어요?

당장 치고 올라온 의문이 있었기에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니 다시 익숙한 푸른 창이 시야에 넓게 떠올랐다.

<긴급 사태! 성향자를 위한 특수 퀘스트 발생!>

<특수 퀘스트, ‘--’을 위하여를 진행하세요! (º □ º l|l)>

-

[퀘스트 – ‘--’을 위하여]

‘불의에 사고로 퀘스트 구역을 벗어난 당신을 위해 새로운 퀘스트를 부여합니다! 당신이 방금까지 머무르고 있던 게이트의 장소는 저승. 죽음의 강으로 가 왕을 설득하고 게이트로 가는 새로운 길을 획득하세요!’

주의: L급 난이도의 퀘스트입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춰 주세요. 저승의 왕을 노하게 할 경우 ‘죽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보상: 게이트로의 귀환, 새로운 칭호 ‘신들을 마주한 자’ 획득

실패 시: 사망

-

“저승?”

안 띄우던 경고창까지 띄우며 겁을 준 이유가 있긴 있었다. 다른 것보다 저와 사윤이 있던 장소가 저승이었다는 점이 기가 막혀 눈살을 찌푸렸다. 여태껏 그런 장소에 가둬 두고 있었단 말인가.

눈이 가늘어지고 시선이 살벌해지자 시스템창이 작게 흔들렸다. 무언가를 열심히 부정하는 모양새였다.

고의는 아니었다, 혹은 어쩔 수 없었다 중 하나일 것이다. 이제는 짐작이 갔기에 신경 쓰지 않고 퀘스트 수락 버튼을 눌렀다. 어딘지도 모를 공간의 틈에 빠진 채 부유하고 있던 건주의 몸이 순식간에 시스템창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눅눅하다. 장소가 이동되었다고 자각하기가 무섭게 먼저 느껴진 것은 영국의 흐린 하늘 아래에서나 만날 법한 습하고 눅눅한 기운이었다.

띠링!

귓가로 알림음이 들려 눈을 뜬다. 그 순간 속에서 비릿한 것이 차올랐다.

“콜록!”

순간의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허리를 숙이며 기침과 함께 뱉어 내니 검붉은 피가 바닥으로 철푸덕 쏟아졌다. 뚝뚝도 아니고 철푸덕. 마치 슬라임처럼 점성 있는 뭉텅이가 된 피가 스르르 검은 바닥 면으로 녹아들었다.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저런 게 내 몸에서 나왔다고.

살아 있는 생물 같았던 피를 떠올리고 입가를 매만졌을 때 띵. 건주의 시야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경고! 체력이 5 하락했습니다. 남은 체력 95. 모든 체력을 소진 시 당신의 영혼은 저승에 귀속됩니다.>

“…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몸이 옮겨진 직후 눈을 뜬 것뿐인데 체력이 깎였다 해 당황하고 있으니 설명창이 뒤늦게 떠올라 상황의 이해를 도왔다.

<주의! 육신을 지닌 채 저승의 땅에 방문했습니다. 저승에 깔린 죽음의 기운이 당신의 육체를 탐합니다. 모든 체력이 소진되기 전에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저승의 땅에서 빠져나가세요!>

<디버프, ‘저승의 숨결’에 영향을 받습니다. 1시간 동안 체력이 무작위로 하락합니다. 1시간이 지나면 모든 체력이 소진됩니다.>

<디버프, ‘저승의 규율’에 영향을 받습니다. 하락된 체력만큼 이동 속도가 느려지며 고통을 겪습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라는 것처럼 뜨는 경고창들을 보며 흐른 피를 닦았다. 저승이라는 게 단순히 이름만 빌려 온 게 아닌 모양인지 입장부터 제법 섬뜩했다.

어려운 난이도다. 과연 L급 퀘스트라고 조기에 알려 준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까 ‘신들을 마주한 자’ 같은 칭호를 주는 거겠지.

퀘스트 보상란에 떴던 칭호를 기억한 건주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밟고 있는 땅은 검게 물든 단단한 진흙 바닥 같다. 흙이라면 보통 갈색을 띠곤 했으나 왜 검은색이 되었는지는 조금 전, 피가 바닥에 스며드는 과정을 직접 보았기에 알 것 같았다.

딛고 있는 땅에서 오른쪽으로 쭈욱 시선을 옮기면 저 멀리 긴 강이 보였다. 저 강의 이름이 뭔지 알 것 같아 강물을 유심히 살폈다. 거리가 꽤 되었으나 S급 시력은 충분히 먼 거리의 모습을 포착해 냈다.

보글보글.

물이 마치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게 보였다. 뜨겁나 싶어 고개를 기울였을 때 그 속에서 손 하나가 불쑥! 치솟는다. 집중하고 있던 건주가 손끝을 살짝 움츠려 놀람을 표했다.

끄아아악!

이윽고 튀어나온 손이 비명과 함께 다시 강물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절망스러운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 퍼지고 사방이 조용해진다. 강물은 아무런 일도 없던 것처럼 얌전해져 작은 파동만 일고 있었다.

“스틱스 강.”

워낙 유명한 명칭이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나직이 강물의 이름을 중얼거린 건주가 시스템창을 불렀다. 뭘 해야 하는지 물어볼 생각이었으나 시스템은 반응이 없었다.

“간섭을 못 하는 건가.”

이미 파다하게 퍼진 추측에 따르면 시스템을 다루는 이들은 신이었다. 그리고 저승의 왕 역시 신화대로라면 신의 자리에 오른 존재다. 똑같은 신이었으니 남의 영역에서 함부로 힘을 쓸 순 없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갑작스러운 시스템의 침묵이 이해가 가 옷을 털었다.

그렇다면 혼자 해야 한다.

“강을 건너는 게 우선인가.”

혹시 몰라 혼잣말을 이어 간 건주가 천천히 발을 떼었다.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렸으나 동전 한 푼 나오지 않았다.

저승의 강을 건너려면 뱃사공에게 돈을 줘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는데.

가담항설에 따르면 그랬다. 혹시 못 건너나 싶어 인상을 찌푸렸을 때 코까지 비린 향이 훅 치밀었다. 튀어나오려는 피를 참아 보려 애썼지만 턱이 강제로 벌어지며 검은 형체가 쏟아졌다.

<체력이 5 하락합니다. 남은 체력 90. 서두르세요!>

아직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체력이 하락했다.

현실의 시간과 저승의 시간이 다른 건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런 거라면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어 뛰기 시작하자 체력이 깎이는 게 무슨 활동량에 비례하기라도 하는 건지 한 번 더 피가 올라왔다.

이번에는 다리 근육을 찢는 듯한 고통도 함께였다.

<체력이 10 하락합니다. 남은 체력 80. 체력이 50 미만으로 떨어질 경우 모든 신체 능력이 20% 하락합니다. 주의하세요!>

하.

퀘스트 난이도를 봤을 때부터 쉽지 않을 거라 짐작하긴 했지만 이건 뭐 양아치 폭군 수준의 페널티였다. 입가의 양쪽으로 흐르는 피를 닦고 있으니 이번엔 코에서 피가 흘렀다. 다행히 체력이 깎였다는 알림창은 뜨지 않았다. 조금 전 비강까지 치민 혈향의 주인공이 이놈인 듯했다.

소매로 코피를 문질러 닦은 건주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어차피 체력은 한 시간 동안 깎인다. 당장 죽을 일은 없었으므로 과감하게 움직이자 체력이 10 더 깎여 70이 된 순간에 강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욱!”

피는 뱉는 횟수가 누적될수록 더 역해지는 건지 구토하듯 각혈하며 눈가를 붉혔다. 몸이 절로 숙여져 땅을 짚고 입을 벌린 건주가 숨을 들이켰다.

해 볼 만은 한데.

힘들긴 했으나 못 하겠다고 울면서 집에 갈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라면 이게 아직 튜토리얼 단계도 안 된다는 거겠지만.

강을 건너서 저편의 땅에 도착해야 저승의 왕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애초에 주워들은 신화도 꽤 있었기에 반쯤 확신하며 고개를 드니 마침 저기서 배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검은 로브를 둘러쓴 이가 노를 젓는다. 뱃사공이다.

“탈 수 있을까요.”

가까이 온 배에 대고 묻자 노를 젓던 이가 손을 내밀었다. 역시 금전이 필요한가 보다. 없어서 머뭇거리니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을 거둔 이가 다시 노를 젓는다. 그대로 떠나려는 듯한 모양새였다.

무슨 사람이…!

인정도 없고 인내심도 없다. 다급해진 건주가 둑을 따라 뛰며 노인을 불렀다.

“다른 대가로는 안 됩니까?”

목소리를 높여 외친 말에 강에서 손이 불쑥 솟고 비명이 들린다. 노인이 입을 달싹였다.

무어라 말한 것 같은데 비명에 묻혀 들리지 않아 눈썹을 올리자 건주를 빤히 응시한 그가 손을 뻗었다. 앙상한 팔뚝이 드러났다.

생명.

노인이 대답한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던 건주가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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