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1화. 조력자 (1)
목소리 정도는 듣고 보낼 걸 그랬나.
숨 막힐 듯한 정적이 몸을 짓누르는 걸 느끼자마자 옅은 후회가 밀려왔다. 마지막으로 보게 된 표정이 웃는 얼굴이 아니라는 게 아쉬웠다. 꽤 오래 기억될 광경이라면, 적어도 가장 만족스러운 표정을 눈에 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별수 있나.
사소한 것들을 챙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 마음을 접었다. 놀란 표정도 불만족스러운 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바보처럼 얼빠진 모습은 제가 그보다 우위에 있다는 걸 실감하게 해 주어 제법 재미있었다.
허전했던 마음이 다시 충만하게 차오른다. 사고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로 생각이 거슬러 올라가 멈칫거렸다. 입술에 닿았던 부드러운 감촉이 아직도 미약하게 남아 있었다.
사내새끼인데 왜 부드러워.
잠깐 어이가 없어 픽 웃었다. 그 순간에 입을 맞춘 건 충동이 반, 아니 8할 정도를 채우고 있었다.
마지막 만남이고 최후의 인사라면 보다 강렬한 기억을 안겨 주고 싶었다는 게 이유 중 하나였고, 그냥 그러고 싶었다는 게 남은 자리를 차지했다. 이대로 끝이라면 한건주가 납득하지 못할 것 같아서, 저를 몇 번이고 삶으로 이끌려 한 이에게 보상처럼 준 접촉이기도 했다.
이것으로 그가 덜 공허했으면 해서.
그 행위가 자충수라도 된 건지 어째 제 속이 더 비어 버린 것 같았다. 그 순간 제가 그에게 준 것이 또 뭐가 있었길래.
가늠하다가 몸을 흠칫거렸다. 한기가 뼛속에 스며들기라도 한 것처럼 관절이 저리기 시작했다.
아. 작게 내뱉어 본 탄식이 입 안에서 메아리친다.
“한건주.”
불러 본 이름에는 답이 없다.
뒤늦게야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른 행위에 대한 후유증이 찾아온 건지 어깨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중력이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토록 선호해 마지않았던 침묵과 고요는 실로 간만에 불편하고 꺼림칙한 것이 되어 공간을 장악한다. 사방이 어둡고, 끝이 보이지 않고, 출구가 어딘지 감이 안 오는 장소. 사윤은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뚝 서고 나니 더 할 것이 없었다.
제가 선 곳이 이 정체 모를 장소의 중심인지, 구석인지 모르겠어 고개를 들어 본 사윤이 하늘 없이 내려앉은 어둠을 응시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뭔가를 할 생각으로 한건주를 보낸 게 아니었으니 당연히 계획은 텅 비어 있었다. 그저 죽을 자리를 선택할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인 작별을 그릴 수 있다면,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이 자리였으면 해 고집을 부린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없었다.
그냥 속이 울렁거리고 역겹기 짝이 없는 파편 조각을 마저 확인해 진실이라도 찾아보거나, 어차피 이곳을 묫자리로 선택한 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솔직히 말해서 당장의 심정은 반반이었다.
진실을 알아야 할 것 같으면서도 더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다음 파편부터는 한건주가 곁에 없었다. 안에서 무얼 보고 혼절하든 제 곁을 지킬 사람이 없다는 얘기였다.
정신을 못 차리면 제 이름을 불러서 이끌어 주는 음성도 없을 거였고, 힘을 주지 못하는 몸을 지탱하는 손길도 없을 거였다. 정신 착란이 와 혼란스러워하고 있으면 충격 요법을 줘 깨울 사람도 없었다.
그가 곁에 없어 누릴 수 없는 것들을,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하나씩 짚어 가던 사윤은 문득 깨달은 사실에 입가를 가렸다. 기가 찬 웃음이 혀끝에 매달렸다.
뭘 아쉬워하고 뭘 꺼리는 척하는 건지.
원래는 그게 당연했는데.
과거를 잊었나 싶을 정도로 순진한 반응이다. 빈자리를 지나친 허전함을 느끼는 저 자신이 우스워 조소를 피웠다.
“버릇된 거지.”
혼자서 감내하고 버티는 것엔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몇 년 같이 있었다고 이만치 변해 버리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그를 곁에 두고 나서부턴 살인도, 불필요한 정보 조작도, 길드끼리 이간질하여 싸움 붙이는 정치질도 하지 않았다. 심심하답시고 다른 길드를 습격하러 간 일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러니 주변에서 밤쥐를 하락세라 칭하며 이를 드러내는 놈들이 나왔던 거다. 스콜피언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무시를 당했어도 대부분 대수롭지 않게 넘길 만큼 한건주랑 있을 때면 재밌었다. 이전에는 별의별 짓을 다 해 보며 무료함을 달래려 했고 그러고도 실패하기를 반복했는데 한건주가 있을 땐 아니었다. 그를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일들이 잦아 자연스럽게 불필요한 행동이 줄어들게 됐다.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이점이었다.
사윤은 한건주를 만나기 이전, 3년 전 이맘때를 상기했다. 누가 보면 다른 사람의 영혼이 제 몸에 빙의했다고 느껴도 이견이 없을 만큼 참 많이도 변했다.
네 영향이 이 정도였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제 꼴이 딱 그 짝이다. 누가 앗아 간 것도 아니고 제 손으로 놓은 건데도 상실감이 찾아왔다.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망각하고 있던 감정이 기어올라 와 사윤의 몸을 칭칭 감고 구속했다. 이름을 숨기고 있던 가림막이 벗겨지듯이 사윤은 제 몸을 지배한 듯한 감정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외로움.
어떤 이는 인간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감정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인간이 평생 싸워야 할 감정이라고 했던 그것이 오랜 망각과 감각의 마비 속에서 빠져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이 봐라.
유순해지긴 했다니까.
사윤은 추억에 젖을 정도로 오랜만인 감정에 머리까지 푹 잠긴 채로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긴 상념을 거쳐 되돌아온 물음에 숨을 삼킨다. 여전히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질문지의 답란은 공백이었다.
* * *
<주의! 퀘스트 진행 구역을 벗어나셨습니다! 복귀하세요.>
<주의! 퀘스트 진행 구역을 벗어나셨습니다! 복귀하세요.>
<주의! 퀘스트 진행 구역을 벗어나셨습니다! 복귀하세요.>
<주의! 퀘스트 진행 구역을….>
…
..
.
띠링거리는 알람음이 사이렌처럼 연신 울린다. 불이라도 난 것처럼 붉게 변한 시스템창이 비상사태를 알리듯 시야를 요란하게 가득 채웠다.
<주의! 퀘스트 진행 구역을 벗어나셨습니다! 복귀하세요.>
어떻게 돌아가라고.
보채듯이 연이어 뜨는 알림창에 숨이 턱 막힌다. 사고가 벌어진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아직도 얼빠진 표정이 지워지지 않았다. 천천히 직전의 상황을 복기한다. 익숙하게 끌어당겨진 몸과 가볍게 맞닿은 접촉, 낯설게 밀어 내는 힘까지. 비디오테이프를 되감듯 머릿속에서 재생된 장면에 형용하기 힘든 수십 가지 감정이 속에서 치밀었다.
어떻게?
가장 처음 떠오른 의문은 그것이었고.
왜.
두 번째로 따라온 물음은 질문과 짜증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설득에 성공한 줄로만 알았다. 제 의견을 열과 성을 다해 피력했으니 그도 이해하고 받아들인 줄 알았다. 쉬자는 권유에 얌전히 응했고,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기에 납득한 줄 알았다.
그래서 믿었고, 그래서 안심했는데 뒤통수를 맞았다. 이렇게 얼얼해 본 적은 처음이라 당황 외 무엇도 담지 못한 눈이 틈이 도로 메꿔진 곳을 응시했다.
혼란스러움이 컸으나 당황하고 있는다 해서 무언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바뀌지도 않았다. 따져 묻고 싶은 감정을 꾹 누른 한건주가 이성을 다잡고 상황을 분석했다.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는 알 것 같다.
보여 주기 싫었을 테지.
안 그래도 자존심이 하늘까지 올라가 있는 남자인데 제 앞에서 연이어 약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끔찍했을 것이다. 거기에 자신이 그의 앞에서 흔들리는 티를 냈으니 그가 파편으로 들어가고 나면 혼자 있을 저도 적잖이 걱정했을 테고.
실수했다.
그때 불안한 티를 내는 게 아니었다. 무서워하는 티를, 초조해하는 티를 내선 안 됐다. 진심이 다분한 행위였지만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동정이라도 할 것 같아 더 강조하고 과하게 드러낸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렇게 하면 저를 살필 줄 알았다. 제 곁에 있을 줄 알았고 늘 그랬던 것처럼 제 안위를 지키려 할 줄 알았다.
실제로 그 예측이 완전히 빗나간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 이상 들어맞았으나 저를 보호하려는 그의 방식이 상상 이상으로 과감하며 집요한 게 문제였다.
귀환석이 사용되지 않음에 안심했는데 설마 그 잠깐 사이에 방법을 찾을 줄이야. 식은땀에 젖었던 얼굴을 보아 하면 제가 잠든 사이 뭔가를 한 게 분명했다.
자는 게 아니었는데.
욕이 절로 치밀어 입술을 꽉 씹는다. 1만큼의 보호를 원했으나 사윤은 10도 아닌 100만큼의 보호를 시도했다. 그 성향을 직감하지 못한 게 패착이었다.
성질대로 머리카락을 헝클인 건주가 들끓는 듯한 눈으로 암흑을 응시했다.
차라리 든든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당신이 무너져도 내가 당신을 받칠 수 있다는 걸 피력해야 했고 내가 무방비해진 당신을 지킬 수 있다는 걸 드러내야 했다.
S급이 되면 뭐 하는데.
전에 없이 무력하다.
잘근잘근 붉은 살을 씹어 대다가 문득 입술에 닿았던 감촉이 떠올라 흠칫거린 건주가 생각이 짙어진 눈으로 어둠을 살폈다.
실수가 있었다면 손 놓고 있는 게 아니라 최대한 빨리 바로잡아야 했다.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강하게 붙든 건주가 입을 열었다.
“뭐라도 내놔. 너네도 비상사태일 거 아니야.”
고장 나기라도 한 것처럼 같은 알림창만 연신 띄워 대던 시스템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