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0화. 진정한 인류의 악 (9)
서걱!
검 끝이 궤적을 그릴 때마다 형체 없는 것이 잘려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정면으로 내려 긋고 좌우로 내려 베며 쉼 없이 연결되어 움직이는 검에 턱 아래로 땀이 떨어졌다.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잠든 한건주의 곁에 구태여 수면 향을 피워 두고 소리가 닿지 않을 만한 거리에서, 그가 약지만큼 작게 보일 정도로 멀어진 자리에서 사윤은 검을 휘둘렀다.
생각의 소멸과 생성이 빠르게 이루어진다. 무아에 경지에 이른 적은 수없이 잦았으나 이렇게 조용한 적은 처음이었다.
늘 주변엔 피가 튀겼고 눈동자는 붉게 물들었으며 속이 용암처럼 들끓는가 하면 머릿속은 서리 기운에 잡아먹힌 듯 차가웠다. 그 상태로 이성을 반쯤 놓고 오로지 처치하는 행위에 몰입하면 시스템은 익숙한 창을 띄워 준다. 그게 사윤이 경험해 본 무아였으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숨이 조금씩 얕아진다. 검이 베어 내는 것이 제 생각일지, 자기 자신일지, 파편 속에서 본 기억일지 사윤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무언가를 벗겨 낼 듯 휘두르고 있다는 것만 인지할 뿐이었다.
전에는 얼마나 휘둘렀더라.
15분을 휘둘렀나?
장담컨대 그때보다 지금의 검에 더 많은 일념이 담겨 있을 거였다. 그러니 운이 좋으면 더 빨리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장 좋은 건 한건주가 깨기 전에 습득하는 건데.
뚝, 뚝.
삽시간 만에 땀이 얼굴을 흠뻑 적셨다. 조용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반복적인 행위는 자연스럽게 공상을 불러왔다.
만약 내가 시스템에게 저당 잡히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언제인지도 모를 까마득하게 먼 과거의 시절, 시스템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았더라면…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잠 못 이루는 밤이 줄어들고 해가 뜨는 아침이 조금은 덜 지겨웠을까.
검이 빠르게 공간을 휘젓는다.
몬스터도, 게이트도 신경 쓰지 않고 평범한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가볍기 짝이 없던 동작은 어깨가 앞으로 크게 빠지며 나아갈 때 손끝이 울리도록 무거워졌다.
널 만난 걸 위안으로 여겨야 할까, 더 큰 절망으로 이해해야 할까.
복잡한 생각들이 검의 궤적을 따라 공간을 채워 가는 기분이었다. 사윤이 몸을 한 바퀴 돌려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검을 왼손으로 바꾸어 들곤 검무라도 추는 양 움직였다. 누군가 보면 광증이라 말할 수 있을 법한 몸놀림으로.
왜 하필 너였을까.
왜 자신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조금이나마 풀리는 중이었으니 이제 그 물음의 꼬리는 한건주에게 닿았다. 한번 그것에 의문을 품자 눈덩이처럼 불어난 의구심이 남자를 탐색했다. 이전까지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던 것들이 사라지고 세 음절로 세뇌되는 듯했다.
한건주.
그 이름이 가득히.
검무가 멈추고 잠시 서서 호흡을 골랐다. 창백한 얼굴이 돌아간다. 한건주는 아직 잠에 빠져 있었다. 꼭 기절이라도 한 사람 같아 사윤은 무심결에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가 이성을 붙잡았다. 입을 여는 대신 검을 틀어쥔 손에 압력을 더하고 이를 악물었다.
다시 검이 움직인다. 무겁게, 가볍게, 빠르게, 느리게. 자유자재로 변하는 검 속에 혼란이 담겼다.
왜 하필 너여야 했고 왜 하필 나여야 했으며 왜 우리가 이 게이트에 함께 온 걸까.
서로가 무엇이기에.
파편 속에서는 한건주의 얼굴을 한 사람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시스템은 왜 제게 그를 찾으라 했던 걸까? 왜 그에게 친히 퀘스트까지 내려 주며 이 게이트를 만든 걸까. 놈은 저와 한건주에게 무얼 바라고 있는 걸까.
길이 틀어막혀 무작정 덮어 두었던 의문들이 폭발하듯 넘쳐나 사윤의 검이 더욱 현란하게 움직였다. 마치 시스템이 그리고 있는 그림을 갈가리 찢으려는 것처럼.
‘…일단 이것부터 풀어 주세요.’
‘나 보러 왔어요?’
‘S급까지 키워 준다니까 좋네요.’
건주야.
‘왜 화를 내요?’
‘이젠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건데, 저 왜 데려오셨어요?’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건주야.
‘새 사람이라도 찾았나 봐.’
‘형이잖아요.’
‘전 형을 살리고 싶어요.’
한건주.
처음에는 건방지기 짝이 없던 놈이었고, 희망이었다가 절망이었다가 삶의 매개체가 된 이름을 혀 위로 올린다. 저항하는 자 성향을 얻기 위해 얼마든지 자기를 이용해도 된다고 했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을 때 사윤의 머릿속엔 권사윤이라는 존재가 지워지듯 휘발되고 한건주만 남았다.
어떻게 보면 진정한 의미의 무아였다.
오로지 타인만이 남아서.
“왜 하필 너였을까.”
그 말을 중얼거림과 동시에 검이 떨어졌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채 갈무리하기도 전에 기다리던 알림창이 시야에 떠올랐다. 사윤은 잔뜩 진이 빠져 바닥을 짚었다.
어렴풋이는 알 것 같다. 왜 하필 한건주였는지에 대해서는.
처음 저항하는 자 퀘스트를 보았을 때도, 필드에서도, 그를 다시 만난 축제에서도, 협회에서도.
아델리아의 무덤과 스콜피언, 그리고 이 게이트까지.
그가 아니었더라면 시도하지 않았을 것들이 이렇게까지 많았다. 그의 위치에 종식이 있었다면, 경진이, 옌이, 찬희가, 이재희가 있었다면 제 태도가 같았을까.
그나마 이재희가 가능성 있었을지도 모르나 그와 한건주 사이에는 가장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죽고 싶다고 했을 때 이재희는 제 목표를 달성하면 기꺼이 안식을 챙겨 줄 놈이라면, 한건주는 악착같이 탈선하려는 저를 붙잡아 두려는 놈이라는 결정적인 차이가.
그것 때문에.
눈을 감고 침을 꿀꺽 삼키며 숨을 고르자 잠시 암전된 시야에 과거가 맞닿았다. 사방이 흙먼지와 쇠 냄새로 가득한 곳에서 저를 응시하고 있는 한건주가 보인다. 긴장과 애원 사이로 스며든 애정이 심장을 덜컹거리게 한다. 쉬운 새끼 같으니라고. 기겁하며 떠나려 할 때는 언제고. 아, 그때마저도 날 더 알아보려고 그랬던 거였나. 머릿속에 아지랑이가 인다. 잊지 못할 두 눈동자가 뇌리에 아로새겨지듯 떠올라 사윤은 그때처럼 손을 들었다. 눈을 뜨고 한건주가 보이는 자리를 손으로 가렸다. 그러다 그가 보이지 않는 게 다시 답답해서 손을 내렸다. 당최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이었다.
보고 싶은 건지, 치우고 싶은 건지. 곁에 두고 싶은 건지, 떨구고 싶은 건지.
검을 약하게 쥐고 천천히 발을 옮겼다. 무엇도 바뀌지 않았으면 하는데 상황이 자꾸만 변했다. 시스템이 재촉했고 한건주가 몰아붙인다. 흐름에 맞춰 움직이는 게 옳은 건지, 정체하는 게 옳은 건지 모르겠으나 당장 무얼 해야 할지는 알았다.
제가 여기에 있는 건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건주는 아니었다. 당장의 상황만 봐도 파편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건 저 하나였으니 그는 제 동력의 원천 외엔 역할이 없었다. 겨우 그딴 거나 하라고 데려온 이가 아니었다. 이런 취급을 당하라고, 그런 공포심을 느끼라고, 무력감과 불안감에 휩싸이라고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그를 이곳에 두고자 하는 건 결국 제 이기심이다. 그가 설령 남기를 원한다 하더라도 사윤에겐 그에게 더 나은 길을 제시할 의무가 있었다.
한건주가 제 입으로 직접 말했지 않은가.
형이라고.
“연장자가 철없는 소리에 휩쓸려서야 쓰나….”
나직이 중얼거리며 건주에게 다가간 사윤이 폐부까지 깊게 숨을 들이켰다. 이게 해피 엔딩일지도 몰랐다. 자신도 그에게 죽여 달라는 비참한 부탁을 하지 않아도 되고, 그도 저를 죽이는 불필요한 일을 겪지 않아도 되는.
불행은 모두 제가 가져가고 그는 전처럼 신이든 주변 사람이든 만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살아가도록.
서로가 만나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몰랐다.
이번 생에 들어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었던 자신이 자의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리셋 버튼인 거다.
생각이 연결되고 연결되어 마치 선로처럼 한건주에게로 이어졌다. 그 길을 조용히 따라간 사윤이 목적지에 다다르자 타이밍을 재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누워 있던 이가 눈을 떴다.
잠깐 눈꺼풀을 슴벅거리더니 제가 잔 거냐고 물어본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라는 모양새가 우스웠기에 피식거린 사윤이 손에 들고 있는 칼을 매만졌다. 뒤늦게 그걸 본 한건주가 움찔거렸다.
“…자는 사이에 저 죽이려 한 건 아니죠?”
농담이 반, 미약한 의심이 반 뒤섞인 목소리에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어 보인 사윤이 이런 유쾌함이 가미된 황당한 심정을 느껴 보는 것도 한건주가 가져다준 경험임을 깨닫고 굳었다.
“뭐야. 왜 그래요?”
이상함을 감지한 건지 그가 사윤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사윤은 가까이 다가오는 얼굴을 두 눈에 선명히 담아냈다.
마지막일 확률이 높다.
만약 정말로 이게 마지막 순간이라면 제 취향에 맞춰 도려낸 듯 섬세했던 저 얼굴도, 형님도 아닌 형이라고만 저를 부르는 낯간지러운 목소리도, 건방지기 짝이 없는 표정도, 간간이 웃어 보이는 미소도 더는 볼 수 없을 거였다.
그리고.
“형?”
스스로 자각한 건지 자각하지 못한 건지 모를 애정이 담긴, 삶의 선로에서 자신이 탈선하려 할 때마다 기어이 레일로 저를 되돌려 놓는 저 눈도 다신 보지 못할 거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사윤이 입꼬리를 작게 올렸다. 한건주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기울였을 때였다.
“……!”
예고도 없이 사윤이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단숨에 제 몸 쪽으로 그를 확 끌어당기고 고개를 살짝 틀었다. 콧날이 빗겨 가고 입술이 맞닿는다. 숨결이 솜털로 전해지는 감각에 한건주가 뒤늦게 눈을 둥글게 키웠을 때 검을 쥔 손이 움직였다.
<스킬, ‘일도계양단’이 발동됩니다!>
<인간의 일신으로 불가능한 업적을 달성합니다. 특전 ‘기적을 읊는 자’가 활성화됩니다.>
<스킬과 특전이 일시적으로 융합됩니다. 새로운 스킬 ‘차원 분리(L)’가 발동됩니다!>
검의 궤적을 따라 공간이 벌어진다. 한건주가 그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을 때 사윤은 멱살을 쥔 손을 밀어 그를 공간의 틈으로 보냈다. 새로운 공간 안으로 그의 몸이 빨려 들어가기 전,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고맙다.”
사윤의 입술이 먼저 떨어졌고 한건주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사윤이 만들어 낸 틈이 한건주를 집어삼켰다. 소음이 그치고 적막이 내려앉는다. 사윤은 조금 전까지 한건주가 있던 자리가 공허하게 빈 것을 보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만약 조금 더 길게 말할 시간이 있었다면 그를 제대로 이해시켰을 것이다.
네가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너를 위하고 싶었노라고.
직후 차원 분리의 지속 시간이 끝났다는 알림과 함께 벌어졌던 틈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