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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49)화 (249/266)

제249화. 진정한 인류의 악 (8)

한 사람 정도는 어떻게든 내보낼 수 있을 터였다. 설령 불가능한 일이라 해도 해내야 했다. 퀘스트 진행의 주체인 자신은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지만 ‘진정한 인류의 악’과 거리가 먼 그는 또 모른다. 진작에 편법을 써서라도 탈출시켜야 했던 상황이었는데 판단이 늦었다.

난 미쳐 있어 괜찮다지만 넌 아니지.

그는 이렇게까지 소음이 차단되고 빛이 전멸한 공간에 있어 본 적이 없을 거였다. 소리와 빛이 완전히 차단된 공간에 사람은 10분만 갇혀 있어도 극도의 불안을 느낀다. 그 점을 인지하고 나니 그가 왜 이렇게 무서워하는지도 이해가 갔다.

파편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게 몇 번째더라.

이번이 다섯 번째였으니 총 네 번이다. 그 네 번 동안 자신이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에 잠긴 사람이라면 짧디짧은 1분도 영겁의 시간이라 느낄 수 있었다. 원초적인 공포가 피어오르기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걸 네 번씩이나 경험했으면 그도 미칠 때가 되긴 했다.

희미한 죄책감이 싹을 틔웠다. 무엇이 득이고 무엇이 실인지 구분하여 깐깐하게 재고 따지던 남자가 지금은 초연함과 불안함 그 어디쯤에 서 있는 듯했다. 속눈썹은 영양이 부족한 사람처럼 가늘게 떨렸고 저를 붙든 손은 간헐적으로 힘이 들어가는지 핏줄이 섰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평범한 사람을 작두 위에 올려 태우기라도 한 듯이 날카롭고 예민했던 분위기도 어둠에 묻힌 건지 그에게 느껴지던 첨예한 느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렇게 된 데는 제 책임이 없지 않았다. 방관과 외면이 불러들인 결과였으니 책임 역시 제가 져야 옳았다. 사윤이 어두운 공간을 훑었다.

춥고, 어둡고, 조용하고.

가끔은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섬뜩했다가 수렁에 발을 들인 듯 질펀해지는 것이 영락없는 감옥이었다.

그렇다면 죄가 있는 사람만 있어야지.

저와 한건주를 사이에 두고 죄와 불행, 절망 따위를 놓아둔다면 그것들의 제 소유였다.

즉시 인벤토리에서 귀환석을 꺼내 가루가 되도록 으스러트렸다. 일말의 기대감을 품어 봤지만 역시 미약한 희망은 쉽게 꺼졌다. 상황을 보아 하니 경매장에서 낙찰받은 아이템 역시 지금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이런 허접한 술수로는 안 된다.

사용한다면 제 힘을 어떻게든 끼워 맞춰 봐야 했다. 당장은 그럴듯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이를 간 순간이었다.

“방금 뭘 부순 거예요?”

한건주가 쪼그려 앉듯이 가까이 붙어 손에 있는 것을 확인하려 들었다. 다급히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을 주어 그러쥔 주먹을 풀지 않으려 했으나 그런다고 포기할 성정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미간이 꿈틀거릴 정도로 힘을 주는 동작에 결국 사윤은 귀환석의 파편 중 일부를 손아귀에서 흘려보냈다. 떨어진 파편을 본 한건주가 새끼손가락 손톱 크기도 안 되는 그것을 주워 들곤 말없이 살폈다.

워낙 작게 조각난 탓에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일한 판단이었나 보다. 추궁하는 말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 대신 대답을 요구하는 듯한 시선이 얼굴에 닿았다.

권유와 갈구 사이를 오가는 시선에 사윤은 인상으로 대응했다. 불안으로 덮여 있던 그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같이 돌아가려고 한 거죠? 제가 무섭다고 해서, 같이 돌아가려고 한 거 맞죠?”

물어보는 것이 무의미하게 그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침묵이 긍정이 되자 한건주의 입술 사이로 어이없는 심정이 고스란히 녹아든 웃음이 샜다.

“하.”

“…….”

“기절을 반복하니까 청력이 떨어지기라도 했어요?”

오랜만에 듣는 신랄한 어조의 목소리였다.

오랜만이긴 한가?

기억이 뒤죽박죽이라 가늠할 수 없어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걸 무시로 받아들인 건지, 아니면 대화 거부 의사로 받아들인 건지 한건주가 거칠게 사윤의 손목을 붙들었다. 힘을 빼고 있는 순간이었기에, 손아귀 속 파편들이 격동적인 움직임을 견뎌 내지 못하고 속절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음 하나 없이 조용했던 공간에 파열음 같은 것이 작게 번졌다.

“이게 미쳤나.”

성질머리를 숨기지 않는 태도에 절로 들끓는 듯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뻗어진 손이 멱살을 붙든다. 상대가 가벼운 저항도 하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삽시간 만에 바닥을 뒹굴었다. 바닥에 깔린 자세가 됐어도 아랑곳하지 않은 한건주가 파편 가루가 묻은 손을 털었다.

“전에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던 건 아닌데, 오늘만큼 형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오고 싶은 적은 처음이에요.”

중얼거리는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웃음이라 믿을 만큼 사윤이 무탈한 생을 보낸 건 아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그가 묻는다.

“여기서 나라도 먼저 내보낼 생각이었어요?”

실소가 동반된 물음에도 역시 사윤은 침묵으로 응수했다. 대답은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 건주는 묵묵히 멱살을 쥐지 않은 사윤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남아 있는 파편을 모조리 긁어모으는 손길은 말투가 짜증스러웠던 것치곤 제법 조심스러웠다. 모든 파편을 가져간 이가 그것을 바닥으로 내뿌리듯 던지며 사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말했던 소망대로 정말로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할 것처럼.

시선을 맞대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윤은 불편함을 느꼈다. 분명 그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데도 충만감 대신 거슬리는 느낌만 들었다. 이것이 어디에서 기인한 불편함인지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할 생각은 없어 보이네요.”

체념한 걸까 아니면 기회를 노리는 걸까.

음성만으로는 구분이 가지 않았다. 자신을 똑바로 직시하는 눈동자에 사윤은 조금의 기가 참과 허탈함을 맛봤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불안에 떨었으면서 제가 별 효용도 없는 귀환석 하나 부쉈다고 이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 이렇게 빨리 차려질 정신이었고, 붙잡을 이성이었다면 대체 조금 전엔 왜 그렇게 갓 태어난 새끼 동물처럼 떨었던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럴 때면 사윤은 한건주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자신을 이해해 보겠답시고 퀘스트를 받아들였던 그의 심정이.

저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시스템이 한건주에 대해 알려 주겠다고 퀘스트를 주면 뒤도 안 돌아보고 승낙할 터였다.

“무슨 생각 해요?”

의식이 딴 데로 가 있다는 걸 눈치채는 솜씨가 귀신이다.

“이 상황에서 다른 생각이 날 정도로 형은 태평한가 보네요.”

아까부터 은근히 계속 속을 긁어 댔다.

애초에 내가 누구 때문에 귀환석을 부순 건데. 네가 무섭다며. 힘들다며. 그래서 시발 여기서 내보내게 해 주려고 머리 굴리고 있는데.

울컥해서 목울대를 한 번 울렁이자 눈을 가늘게 뜬 한건주가 입술을 움직였다.

“혹시 몰라서 얘기하는 건데, 저 여기서 나가고 싶다고 말한 적 없어요.”

“…….”

“그런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닌데 적어도 형 두고 나갈 생각은 없다고요.”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게 이런 건가. 정말로 제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기막힌 타이밍에 흘러나온 말이었다. 잠깐 뒤통수가 얼얼해져 눈만 깜빡거리는 사윤을 본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이전에 제가 한 말은 어디다 팔아먹고 온 거예요? 제가 형한테 바라는 건 여기서 내보내 주는 게 아니라 형이 본 광경이 뭔지, 왜 그렇게 불안해하는지,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없는지 그거 말해 주는 거예요. 이 말만 제가 몇 번째 하는지 알아요? 차라리 못 하겠으면 못 말하겠다고 답이라도 해 주든가.”

“…시끄러워.”

눈살을 구긴 사윤이 쉼 없이 벌어지는 입술을 손바닥으로 틀어막곤 숨을 들이켰다.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어정쩡한 대치만 이어 가고 있으니 기어이 다시 사윤의 손을 치운 한건주가 말을 이었다.

“형 지금 제정신 아닌 건, 형이 제일 잘 알 거고.”

머릿속을 울리는 또렷한 목소리가 한 템포씩 끊어 가면서.

“일단, 좀 쉬어요.”

그러면서 사윤을 붙잡아 눕혔다. 사윤은 아차 싶은 사이 저를 바닥으로 밀어붙이는 손길에 애매하게 부유하고 있던 정신을 다잡았다.

쉬긴 뭘 쉬어.

소꿉장난에 맞춰 줄 때가 아니었기에 다시 일어나려 하니 팔이 허리를 끌어안았다. 사윤의 움직임이 멈췄다. 거북이의 등딱지라도 된 양 바투 붙어 온 한건주로 인해 그의 숨결이 피부로 느껴졌다.

열을 품은 더운 숨이 소름 끼쳐 솜털이 바짝 섰다. 분명 머리꼭지까지 신경이 바짝 곤두선 게 맞는데 어째서인지 조금씩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저 새끼 얼굴을 치든 명치를 치든 해서 빠져나와야 하는데. …얼굴 때리면 손해니까 기왕이면 명치 쪽으로.

강한 힘으로 붙든 것도 아니었고, 그가 사력을 다해 저를 붙든다 한들 붙잡혀 있을 제 스탯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몸은 무척 노곤한 일을 겪은 것처럼 누워 있는 바닥을 침대 삼으려 했다. 고작 파편 네 개 봤다고 죽음의 문턱에서 건져진 양 구는 게 정녕 제 몸이 맞나 의심될 지경이었다.

한건주는 사윤을 끌어안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제 등에 바짝 붙은 그의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려 본 사윤이 허망함에 힘을 빼었다.

이쯤 되면 자신의 상태가 불안정해서가 아니라 그가 쉬고 싶어서 분위기를 조성한 것 같았다.

이렇게 쉰다고 한들 해결되는 건 없는데.

알면서도 몸이 요구하는 휴식을 거부하지 못한 사윤은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생각을 천천히 정리해 간 사윤은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한건주는 잠든 건지 미동이 없었다.

사윤은 잘 때만큼은 곱고 얌전하기 짝이 없는 남자를 빤히 내려다보다 입을 달싹였다.

“…스킬.”

여기서 나갈 수 있을 만한 스킬이 하나 있다.

아니, 정확히는 있었다.

지금은 없지만 노력하면 다시 획득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스킬을 떠올린 사윤이 인벤토리에서 검을 소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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