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8화. 진정한 인류의 악 (7)
정리는 나중에. 일단 제대로 된 확인이 필요했다. 사윤은 머릿속을 부표처럼 떠돌아다니고 있는 정보의 파편을 한 곳으로 밀어 넣고 확증을 얻기 위해 곧바로 네 번째 파편을 찾아 뛰었다. 붙잡힌 손을 힘껏 떨쳐 내고 미친 사람처럼 달리는 사윤의 뒤를 한건주가 놀라 쫓았으나, 눈이 반쯤 돌아가 전력으로 뛰는 사윤을 따라잡을 수준은 안 됐다.
같은 S급이라 한들 세월의 차이는 쉬이 좁혀지지 않았다.
“형!”
부르는 소리에도 뒤 한번 안 돌아보고 뛰었다. 아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고 해야 더 옳은 말이었다. 거리가 빠르게 벌어지고 눈앞에 빛무리가 보인다. 손을 뻗자 기억이 재생되었다.
네 번째 파편이 보여 주는 기억은 회귀한 이후의 2회차였다. 중학생 때로 되돌아간 소년은 시스템 창을 확인하고 기겁한다. 마치 그 창을 처음 본 것처럼. 예상한 것이 맞았다. 회귀하고 나면 이전 회차의 기억은 사라지는 거였다.
곧장 속이 뒤틀렸다. 책이나 게임 같은 걸 보면 회귀하여 미래를 알고 있는 놈들 천지인데 왜 제게는 회귀라는 기적은 일어났으면서 기억은 주지 않은 걸까. 몇 번인지 모를 삶을 반복했을 텐데 왜 이제 와서 진실 파편이라며 잊힌 기억들을 보여 주는 걸까.
뭐가 됐든 확실한 건 하나다. 시스템은 미친 사이코패스라는 거. 녀석은 지금 제가 겪고 있는 이 혼란과 당혹스러움을 즐기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것 외엔 모든 것이 희미했다. 의문이 소용돌이치는 상황 속에서 사윤은 적대적인 눈으로 소년을 응시했다. 시스템을 만난 소년의 삶은 회귀한 보람도 없이 1회차와 똑같았다. 부모님이 죽었고, 아저씨가 죽었으며 소년 역시 청년이 되어 죽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건 첫 번째 삶과 다르지 않게 흘러갔고 사윤의 대응도, 시스템의 지령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
기억을 모두 잊어버리면 결국 달라지는 게 없는 셈인 거다.
이젠 제 것도 아닌 삶인데 공연히 허탈함이 스며들었을 때 2회차만 보여 주고 끝날 줄 알았던 파편이 다시 재생되었다. 3회차. 사윤은 이번에도 죽었다. 2회차와 토씨 하나 달라지지 않은 죽음이었다.
4회차. 5회차. 6회차. 거듭되는 죽음을 관찰하는 사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죽어 본 적은 많았는데 제 얼굴을 한 이의 죽음을 이토록 가까이서, 이토록 많이 지켜본 것은 처음이었다. 문득 제 앞에서 죽지 말아 달라 했던 한건주의 간청이 떠올랐다. 미간이 순식간에 깊게 파였다.
너도 이런 걸 봤을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의문이 피어오른다.
지금껏 수도 없이 죽으면서 자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저런 표정이었을까?
저렇게 미련도 없이. 모든 걸 체념한 듯한 눈으로.
인형처럼….
사윤은 마치 무생물을 응시하듯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는 검은 눈이 감기는 모습을 숨죽여 응시했다. 다시 회귀가 시작된다.
7회차.
그때부터 시스템 놈이 뭔가를 깨달았는지, 장면 속 전개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미가 어린 짐승에게 야생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처럼, 부모도 아저씨도 잃은 어린 소년이 골목 세계에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법부터 가르치던 시스템 녀석은 이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어리버리한 소년을 대뜸 게이트에 집어넣어 버렸다. 눈앞에 게이트를 만들어 내고 들어가라 재촉한 것이다.
당황한 소년이 아무것도 하지 않자, 시스템은 들어가지 않으면 소년의 팔을 부러트릴 거라 협박했다. 겁먹은 소년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어쩔 줄 몰라 게이트에 들어갔다. E급 게이트였음에도 반년을 분투하다 나온 소년은 그 이후 시스템의 모든 말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제가 말하긴 우습지만 그 태도는 영락없이 토라진 모습이었다.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시스템은 소년이 부모를 잃고 아저씨를 잃고 나서 알게 모르게 소년의 말동무가 되었으니까. 은연중에 위안을 느꼈던 것이다.
그런 존재에게 배신당했다 생각했으니 저 철없는 16살이 실의에 빠질 만도 했다.
그러다 소년은 죽었다. 6번의 삶과 달리 7회차에서는 어른도 되지 못하고 죽었다. 시스템의 말을 무시한답시고 뒤에서 달려온 미친 노숙자가 소년을 찔러 죽인 것이다. 자기 아들을 따라가 달라며 울면서 찌르는 노인을 보다 소년은 눈을 감았다. 7번의 죽음 중에서 가장 다채로운 감정이 심어졌던 눈동자는 그렇게 사라졌다.
다시 회귀가 시작된다.
8회차.
시스템은 이제 소년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닌 ‘명령’만 내리기 시작했다.
조금의 소통도 되지 않는 것처럼.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전달만이 주를 이뤘기에 소년은 시스템에게 토라지는 일도, 실망하는 일도 없었다. 물건에 대고 토라지는 이는 없었으니까. 소년은 이전과 달리 의지할 거라곤 연약하고 볼품없는 제 몸뚱어리 하나만 갖고 세상을 살고 지령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네 번째 파편의 끝이다. 눈을 떠 보니 분명 제게 한참은 뒤처져 있던 한건주가 어느덧 자신을 붙들어 안고 있었다.
숨을 잠깐 참았다가 호흡이 간절해질 때쯤 돼서야 천천히 내쉬었다. 숨이 막히는 게 느껴지는 걸 보니 현실로 돌아온 모양이다. 실감이 나자 머릿속이 팽팽 돌기 시작했다.
정리를 해 보자면.
처음 시스템이 제게 내려왔을 때 놈을 받아들인 것도,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바란 것도 자신이었다. 그 바람에 자신은 시스템을 안고서 벌써 몇 번이나 죽었다가 다시 시작하길 반복하고 있었다. 심지어 모든 것을 잊은 채로.
최초에 일어난 잘못된 두 가지 선택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현재로 굴러왔다. 회차를 거듭하면서 시스템 놈은 자신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터득했고, 자신이 최단기간 안에 S급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밀어붙이고 있었다.
S급이 되고 나선 무엇을 시키려고?
눈을 가늘게 떠 기억을 더듬는다. 이번 생에선 S급이 되고 나서 한 일이 뭐가 있었지? 하도 많은 일을 겪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스템이 시킨 것만 따지고 보면 밤쥐를 세우고 스콜피언을 처치하고 고위 각성자들을 죽이고 다닌 것? 그것 말고 뭐가 더 있었나.
시스템은 대체 뭘 위해서 자신을 빌런으로 키우고 그런 짓을 저지르는 걸까.
몇 번의 반복되는 삶을 관찰하는 수고까지 들여 가며 저를 키우는 데 사활을 걸고 있었다. 그 이유가 가늠이 가질 않아 입가를 매만지던 사윤은 가쁘게 회전한 탓에 열이 오르는 걸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명징하게 깨달은 것은 모두,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거다.
시스템을 받아들인 것도, 이 빌어먹을 삶을 고른 것도.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있다면 왜 하필 ‘지금’ 기억을 돌려주고 있는가, 와 왜 이번 생의 자신은 죽어도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고 되살아나는 불사가 되었는가에 있었다. 학습했던 대로라면 그 의문의 답 역시 진실 파편 속에 있을 거였기에 눈동자가 어둠을 헤쳤다. 다섯 번째 파편을 찾아야 한다. 실이 달린 인형처럼 부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던 사윤은 두 걸음 내딛기도 전에 고꾸라졌다.
“아.”
소리를 내고 바닥을 응시했다. 꼴사납게 흐트러진 제 다리가 보였다. 힘이 풀린 것이다. 정신이 흐릿해졌다가 맑아지기를 반복한다. 마치 에너지가 다 된 전등이 깜빡이는 것처럼 시야가 점멸했다.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을 망연히 두고 있을 때 팔이 잡혔다.
어쩌면 처음부터 잡혀 있던 건지도 몰랐다.
팔을 붙든 손이 저를 일으켜 세우려 들었다. 사윤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의는 아니었고, 그냥 다리가 안 움직였다. 납이라도 올라간 것처럼 몸이 묵직했고 머리 역시 무거워졌다. 이와 비슷한 기분을 한 번 겪은 적 있던 사윤이 본능적으로 코를 감싸 쥐었다. 수상한 약 같은 걸 들이마신 적도 없는데 정신이 멍해지는 이유가 뭘까. 이 역시 시스템의 수작질인가.
다리를 뻗고 엉덩방아를 찧은 듯한 자세로 앉아 어둠을 응시했다. 팔이 자꾸만 위로 쭉쭉 올라갔다. 이럴 시간이 없는데. 다섯 번째 파편을 확인하고 의문을 해소해야 했는데. 해야 할 것은 분명한데 의지는 모르겠다.
꼭 알아야 하는가?
불쑥 수면 아래에서 고개를 들어 올린 물음에 입을 달싹거린다.
“권사윤!”
“…….”
물이 찬 것처럼 먹먹하고 낮게 울렸던 귀가 단숨에 탁 트이며 목소리가 꽂혔다. 아. 사윤은 의식 속까지 푹 찔러오는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창백한 한건주가 보였다. 원래도 하얀 편이었는데 이젠 하얗다 못해 석회 가루를 얼굴에 펴 바른 것처럼 허여멀게 이상했다. 너 어디 아프냐고 묻는데 답이 없다.
“몇 번을 불렀는데 왜 답이 없어요.”
마침 한건주가 저와 같은 의사를 내비쳤다.
내가 할 말을 왜 지가 해?
사윤은 이해 안 간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렸다가 어깨가 아파 고개를 돌렸다. 어깨가 위로 쭉 올라가 있다. 피부를 따라 느릿느릿 시선을 드니 한건주가 붙잡고 있는 제 오른팔이 보였다. 붙잡힌 부위를 노려보듯이 응시했다. 누군가 자신을 붙들고 있으니 이곳이 파편 속 세상이 아닌 현실이라는 감각이 더 강해졌다.
하도 현실과 가상의 공간을 오락가락한 탓일까? 아니면 흐릿했던 기억이 되살아난 탓일까.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일단 제 상태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알겠어서 사윤이 손을 뻗었다. 한건주가 곁에 있으면 그나마 나았으니 일단 그의 도움을 받아 일어난 다음에, 정신이 차릴 때까지만 붙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내키진 않지만, 그렇게 해야 다섯 번째 파편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심신이 지쳤나 보지. 포션을 마실까.
사윤은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을 따라가며 한건주의 팔을 쥐려고 했다. 한 손이 붙어 있는 것보단 두 손이 붙어 있는 게 나을 거다. 그러면 현실감도 두 배가 될 테니까. 단순 계산이 희망적으로 머릿속을 채운 순간이었다.
“…무서워요.”
다른 때보다 훨씬 나직하게 들린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마디 말이 천 번의 말보다 강렬하게 뇌리를 울려 손을 멈칫거렸다. 창백하게 질린 한건주가 보였다. 사윤은 그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뒤늦게 인지했다.
한건주가 떨고 있었다.
그가 떠는 경우가 잦았나.
기억을 헤집어 찾아보기도 전에 한 번 더 그의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무섭다고요…. 저한테도 좀, 말해 주면 안 돼요? 왜 그러는지, 대체 뭘 봤는지. 내가 어떻게 해야 형을 도울 수 있는지…. 그런 거라도 좀 알려 주면 안 돼요?”
…형이 기절했다가 일어날 때마다 조금씩 이상해지는 게 저는 불안하다고요.
덧붙여진 말이 희미했으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한건주가 떨고 있다. 그가 흔들리는 어조로 무섭다고 했다. 사윤은 무심코 뻗으려던 손을 내리고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두어 번 눈꺼풀을 슴벅거리니 시야가 명료해진다. 해야 할 것도 분명해졌다.
널 내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