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7화. 진정한 인류의 악 (6)
하얀 빛 무리가 보여 주는 광경은 소년이 시스템의 제안을 수락한 시점에서 다시 이어졌다. 푸른 창은 소년에게 길바닥에서 생존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더 정확히는 골목에서 살아남도록 퀘스트를 부여해. 소년이 그 방법을 몸으로 체득하게 종용한 것에 가까웠지만.
아저씨에게 의지하던 소년은 골목에서 석 달을 전전하며 사람들로부터, 잔챙이 몬스터들로부터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그 과정에서 납치도 있었고 인신매매 집단에 붙잡히는 일도 있었지만 시스템의 도움 덕인지 아저씨를 살리겠다는 독기 때문인지 몰라도 소년은 번번이 탈출에 성공했다. 가장 위험할 때는 몬스터의 발아래에 깔려 그 단단한 이빨에 먹힐 뻔했을 때지만 그마저도 타이밍 좋게 다른 헌터들이 나타나 사윤을 도와주었다.
그런 일들을 몇 번이고 겪은 끝에 당당하게 홀로 설 수 있게 되자 시스템은 이제 다른 방향으로 소년을 이끌었다.
헌터라면 응당 해내야 하는 것.
게이트 클리어.
이제는 사람이 아닌, 진짜 게이트 안의 몬스터를 상대할 차례였다.
경험이 부족했던 사윤이 필드에서 실컷 굴렀을 때처럼 어린 소년 역시 게이트에 들어가 석 달을 굴러다녔다. 차이점이 있다면 사윤은 필드에서 수십 번도 넘게 죽었다는 거고 소년은 단 한 번도 죽지 않고 분투했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만큼 게이트의 등급 차이도 컸다. 소년이 들어간 게이트는 최저 등급보다 한 등급 위인 E급 게이트. 사윤이 들어갔던 필드는 S급 게이트였으니까.
E급인데도 불구하고 첫 게이트에다 성체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처음인지라 소년은 한참 헤맸다. 공포에 떨면서 ‘처치’가 아닌 ‘생존’을 택했고 시스템은 그런 소년을 못마땅하게 여긴 듯 간헐적으로 몬스터를 처치하라는 퀘스트를 보냈다. 하지만 퀘스트가 만사에 능한 건 아닌지라 소년은 번번이 퀘스트에 실패하고 달아나길 반복했다. 꼴불견인 모습이었지만 사윤은 한심해하면서도 작게 감탄했다.
E급 게이트라는 좁은 곳에서 보스 몬스터를 피해 석 달을 숨어 지내는 것도 대단한 재주였으니까.
어쩌면 지금보다 저때의 자신이 암살에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허억, 하아, 흐으….」
숨어 지내던 소년이 보스 몬스터 처치에 성공한 건, 게이트에 진입 후 석 달 하고도 보름 만이었다. 그 기간 동안 보스의 패턴을 분석하고, 속도에 적응하며 처치 방법을 강구하던 소년은 열 번의 제대로 된 시도 끝에 드디어 첫 게이트 공략에 성공하고 보상으로 낡은 단검을 받았다. 아이템이 없어 일반 식칼로 몬스터를 처치해야 했던 소년은 그 아이템을 소중히 껴안고 기절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길바닥 위였고 소년은 다음 게이트를 클리어하라는 시스템 지령을 받았다.
그렇게 1년, 2년, 3년.
시간은 빠르게 흘러 소년은 스무 살이 되었다. 그런데도 소년의 실력은 여전히 C급 상위 각성자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시스템은 소년에게 재능이 없다며 화를 내기도 했고, 성장 속도가 느리다며 핀잔하기도 했다. 소년은 그때마다 한숨을 푹푹 쉬면서도 군말하지 않고 묵묵히 퀘스트를 이행했다.
이상한데.
사윤은 여태껏 확인했던 세 가지 파편 중에서 가장 평온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을 눈에 담으며 의아함을 느꼈다. 내용이 지나치게 평탄하다. 소년은 나름대로 힘들어하고 있었지만 이미 산전수전 다 겪어 본 사윤에게 그 광경은 별다른 자극을 주지 못했다.
왜 이리 쉽게 느껴지는지 생각해 본 사윤은 이내 자신의 삶과 소년의 삶에서 가장 큰 차이점을 깨달았다.
왜 살해 퀘스트가 안 뜨지.
제 기억대로라면 살해 퀘스트는 분명 초창기에 나왔다. 진정한 인류의 악은 사사로운 정에 휘둘리지 않는다면서 사람을 죽이게 시키지 않았던가. 그 선명했던 기억과 달리 눈앞의 소년은 벌써 몇 년째 게이트 클리어만 반복하고 있었다. 성장 속도도 사윤과 비교해서 동일 인물이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더뎠다. 시스템도 생각보다 혹독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시스템이 설마 소년에게 호의를 가져 저럴 리는 없었다. 그랬더라면 제 시스템과 소년의 시스템의 종류가 달라야 말이 됐다.
혹시 농락하는 건가?
저를 놀리려는 시스템의 수작인가 싶었다. 제가 알던 것과는 전부 달라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영상은 빨리 감기라도 누른 듯 아주 템포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덧 소년은 스물네 살. A급 각성자가 돼 있었다.
「언제까지, 퀘스트를 수행해야 하는 거야?」
더는 소년이라 부를 수 없게 커 버린 청년이 푸른 창에 대고 물었다. 몇 년 사이 부쩍 지치고 초췌해진 얼굴이었다. 시스템은 그런 청년에게 최소한 S급은 되어야 본격적인 지령을 수행할 수 있다고 했다. 담담하다 못해 모든 것에 무감해 보였던 청년의 표정이 흐릿해졌다.
할 말이 많아 보였던 청년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다 할 반항도 하지 못하고 결국 다음 퀘스트를 실행하는 장면에 사윤은 답답함을 느꼈다.
차라리 어릴 때가 더 독기 있었군.
지금 청년의 모습은 형편없다는 말로도 모자랄 정도로 무기력해 보였다. 꼭 시스템만 따르는, 잘 만들어진 기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윤의 감상이 어떻든 퀘스트는 쉼 없이 이어졌고, 마침내 청년은 S급이 되었다. 서른 살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보스 몬스터인 드래곤의 발톱에 심장이 꿰뚫리고 그대로 파열되어서.
자신이 처치한 드래곤과 함께 죽음을 맞는 중이었다.
절개된 가슴 사이로 터진 근육이 보였다. 발작하듯 몸을 움직이다가 이내 미동도 없이 멈춘 청년은 시체 같았다. 마치 창고에서 죽어 버린 남자처럼. 청년의 흐린 눈빛이 푸른 창이 뜬 하늘을 향했다. 시스템은 청년에게 포션을 마시라고 성을 내고 있었으나 청년은 그만한 힘이 없어 보였다.
허무한 죽음이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달려온 것치고,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한 허무한 죽음이었다. 사윤은 이유도 모른 채 주먹을 꽉 쥐고 불쾌감에서 허덕거렸다.
「아저씨는….」
청년이 입을 달싹거리며 물었다. 얄팍하다고 해도 좋을 짧은 희망을 품은 듯한 물음에 시스템창은 당연히 소원권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콜록거리며 피를 토한 청년이 그런가, 하고 중얼거리곤 눈을 감았다.
그런가는 개뿔 같은 그런가다.
사윤이 자기였다면 눈에 불을 켜고 따지고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허무한 죽음만큼이나 시시한 태도라는 감상이 내려졌을 때 그가 읊조렸다.
「다시 돌아가면 더 잘할 수 있었을까? 죽음이 헛되지 않게. 뭔가를 해 볼 수 있었을까….」
그건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미련이었고, 큰 의미가 담기지 않은 혼잣말이었다. 죽음은 공허하였으니 그 앞에서 더 공허해지지 않기 위해 품어 본 작은 마음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대로 청년은 숨을 거두었고 시스템창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오류라도 생긴 듯 창이 빠르게 깜빡거리더니 붉은빛의 새로운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조건 성립. 각성자 ‘권사윤’의 회귀를 돕습니다.>
창이 점점 핏빛으로 붉게 물드는가 싶더니 이내 지지직거리며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사윤이 보고 있던 장면에도 노이즈가 끼었고 세상이 암전되듯 칠흑으로 변했다. 모든 영상이 끝난 건가 싶었을 때 어둠 속에 빛 한 줄기가 생기며 새로운 장면이 떠올랐다.
당장 눈에 들어오는 건 열을 맞춰 놓여 있는 책상과 익숙한 색의 칠판. 들리는 건 소란스러운 아이들의 수다 소리.
펜을 손에 쥔 채로 휙휙 돌리고 있는 작은 소년이 고개를 든다. 서른 살의 청년과 비교해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작고 또 생기를 지닌 소년. 교복을 입은 소년의 복장에서 가슴팍에 달린 명찰이 보인다.
‘권사윤.’
마치 화면을 천천히 확대하기라도 한 것처럼 명찰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가 어, 하고 작은 탄성을 흘리는 목소리와 함께 장면이 전환된다. 펜을 돌리던 소년이 뭔가에 놀란 듯 움직임을 멈춘 채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소년의 시선을 따라 화면이 느지막이 이동한다.
마침내 어린 소년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당신은 인류의 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구원자들에게 맞서, 행성 9180호 ‘지구’를 멸망으로 이끄세요. (b ᵔ▽ᵔ)b>
잊지 못할 창이 떠 있었다.
사윤은 목소리를 잃었다.
* * *
다소 격정적으로 눈이 떠졌던 첫 번째, 두 번째 파편 때와 달리 이번에 사윤은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려다. 의식이 들기가 무섭게 세 번째 파편을 획득했다는 창이 떠올랐다. 이어서, 못 보던 창 역시 하나 생성되어 사윤의 사위를 채웠다.
<삭제되었던 기억을 확인하였습니다! 조건이 성립되며 감춰져 있던 성향이 개화됩니다.>
<당신의 두 번째 성향이 드러납니다.>
<당신은 ‘회귀자’입니다.>
회귀자.
그 세 음절의 문구가 사윤의 눈동자에 틀어박혔다. 얽혔던 진실 파편 조각이 서서히 맞춰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