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6화. 진정한 인류의 악 (5)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옷이 젖혀져 드러난 쇄골에 뜨거운 입김이 닿았다. 아릿한 통증이 뒤를 잇는다. 그건 수십, 어쩌면 수백 년까지 살았을지도 모르는 긴 생 중 사윤이 처음 경험해 본 부류의 둔탁하면서도 벼락같이 저릿한 통증이었다. 뼈가 드러난 목 아래를 강하게 깨문 남자가 주변을 한 번 더 잘근거리며 씹었다. 치아가 뼈를 긁는 감각에 손가락이 절로 굽혀졌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사윤이 먼저 반응했다.
“돌았냐?”
상대는 거친 목소리에도 위축되지 않았다. 도리어 멱살을 쥐고 있는 손목을 붙잡아 바닥으로 내리찍은 건주가 잇자국이 남은 쇄골을 무감한 얼굴로 응시했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호선이 걸린다. 보기에 따라 비소로도 자조로도 보일 수 있는 옅은 웃음이었다.
“이래도 내가 형 망상 같아요?”
도발을 시작한 건 그면서도 참담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사윤은 손을 빼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건주가 제가 만든 자국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치아 배열을 따라 오돌토돌하게 난 자국이 사윤에게도 느껴졌다.
망상이 고통까지 만들어 낼 수 있는가?
모르겠다. 심리학에 관련해선 무지해 알 수가 없었다. 사윤은 본능적으로 짓눌리지 않은 남은 한 손을 들어 제 쇄골에 가져다 댔다. 미리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건주의 손이 물러나고 그곳에 사윤이 자리 잡는다. 더듬어 보니 자국이 난 게 더 여실히 느껴졌다.
망상이 흔적도 만들 수 있는가?
이어지는 두 번째 질문에 머릿속이 혼탁해졌을 때 한건주가 인벤토리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 들었다.
“……!”
날붙이를 본 사윤이 반사적으로 그것을 쳐 내려 했으나, 한건주가 칼날을 역수로 쥐는 것이 더 빨랐다. 구속돼 있던 한쪽 손목이 가벼워지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단도의 끝이 사윤이 아닌, 무기의 소유자를 향해 돌아갔다. 거침없는 손길에 그대로 푹, 단도가 한건주의 손바닥을 꿰뚫었다.
후드득, 위에서 떨어지는 붉은 피가 사윤의 얼굴을 적셨다. 볼에 툭툭 떨어지던 것이 턱을 타고 미끄러지고 창백해진 입술 색 위로도 한 방울이 떨어졌다. 입술이 핏방울을 머금는다. 고인 핏물이 살덩이 틈으로 새어 들었다. 익숙한 맛과 향에 사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머릿속에 천둥이 울렸다.
“너, 손…!”
올라간 손이 한건주가 쥐고 있는 칼을 빼앗고 손목을 붙들었다. 상처의 깊이가 흉악하다. 보통 자해를 처음 하는 사람들은 공포심이나 두려움, 자기방어적인 기제 때문에 저도 모르게 힘을 줄이거나 하는데 한건주의 환부에선 그런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미쳐 가는 게 한 사람이 아닌 모양이었다.
눈이 마주친 한건주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정신이 좀 들어요?”
사고 쳐 놓고 돌아온 목소리는 태연하기만 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개지랄이야?”
입이 거칠어진 사윤이 포션을 꺼내 들었다. 인상을 와락 구긴 채로 공병의 뚜껑을 열고 있으니 등골이 섬뜩할 지경의 낮은 웃음이 귓바퀴에 맴돌았다.
“이젠 제가 좀 현실 같아요?”
그건 복잡한 생각과 사념, 의심 등으로 가득 찼던 사윤의 머릿속에 빗금을 만드는 작은 물음이었다. 공연히 손이 떨려 몇 번이고 뚜껑에 헛손질했던 사윤이 움직임을 멈추고 시선을 들어 올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눈동자와 맞물린다. 제가 자신의 존재를 망상으로 한 번 착각했다고 해서 자해하고 상대를 깨물기도 서슴지 않은 남자가 사윤의 눈동자에 고였다.
그냥 편해지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모든 걸 적당히 외면하고 적당히 뭉갠 채로.
자신이 그를 망상으로 여긴다면, 그가 자신과 함께 이 공간에 천 년을 갇혀 있든 만 년을 갇혀 있든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책임감을 느끼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런데 아쉽게도 상대는 게이트에 갇혀 있을 생각도, 자신을 광증에 시달리는 사람으로 놔둘 생각도 없는 듯했다.
항상 그렇지.
시선은 이토록 쉬이 맞물리는데, 피부가 닿는 건 이리도 쉬운데 의견 하나가, 신념 하나가 늘 엇갈렸다. 처음부터 그랬다. 한건주를 만나고 생각했던 대로 진행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 쉬운 길은 모조리 차단당했다. 남은 건 모두 가시밭길이거나 악취미라고 생각될 정도로 험한 길뿐이었는데 한건주는 제가 쉬운 길을 닫아 놓고 그 험한 길로 가자 제안한다. 웃지도 못하겠는 건 자기는 이미 가시밭길에 발을 들여놓고, 그 위를 디딘 채로 그러고 있다는 거였다.
“내가 병신같이 굴었다는 건 알겠으니 이딴 짓은 다신 하지 마라.”
사윤이 체념 섞인 어조로 중얼거리며 전혀 지혈되지 않고 있는 상처에 포션을 부었다. 약물이 상처로 스며들고 찢어졌던 피부가 회복되는 동안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사윤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래, 한건주가 환각 따위가 아니라는 건 이제 잘 알았다.
망상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파편 속의 기억들은?
그것까지 망상이 아닐까.
상처가 완전히 치료된 걸 보고 사윤은 바로 옆에 떠 있는 빛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 건드리면 무슨 장면을 보게 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저것이 보여 주는 광경이 정말로 진실일까?
의문이 들었으나 헛된 생각임을 알고 폐기했다. 시스템은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 놈이었다. 빌어먹을 짓을 할지언정 거짓을 진실로 제공하진 않았다. 혼재된 기억을 정리하고 뒤죽박죽인 감정을 짓누르려면 역시 제대로 직면하는 수밖에 없었다.
“뭘 보고 온 건지 말해 줘요.”
그런 제 생각을 눈치챈 것처럼 한건주가 캐물었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나 보다.
“형이 착각하고 있는데 이건 형 혼자 하는 퀘스트가 아니라 공동 퀘스트예요. 제게도 알 권리가 있어요. 형이 말 안 하면 저도 파편 찾아서 건드려 보는 수밖에 없고요.”
이건 대체 청탁인 건지 협박인 건지.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게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긴. 정신이 똑바로 박혀 있는 놈이면 자기가 망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겠답시고 칼로 손을 찌르는 미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 봐도 돌아 버린 충격 요법인지라 혀를 찬 사윤이 건주를 훑어보았다.
“네게 알 권리가 있으면 나한텐 알리지 않을 권리가 있어.”
“공유 퀘스트라니까요?”
“파편 안에 담긴 건 내 사적인 기억인데.”
“…….”
한건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크게 놀라지 않는 걸 보면 그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모양이다.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제가 보기에도 자신을 이만큼 흔들 수 있는 건 과거의 기억뿐이었다.
“그러니까 내 기억은 내가 알아서 해결해. 넌 거기서 응원이나 하고 있어.”
“싫어요.”
“뭐?”
“말했잖아요. 형이 말 안 해 주면 저도 파편 찾아서 건드려 보는 수밖에 없다고.”
말과 동시에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야!”
사윤이 고함을 내지르며 그의 손을 붙잡았으나 한발 늦었다. 한건주의 손이 기어코 파편에 닿았다. 그 순간이었다. 빛 무리에서 푸른 전격이 이는가 싶더니 한건주가 신음을 내뱉으며 손을 물렸다. 그가 제 손을 감싸 쥐고 얼굴을 구겼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사윤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손을 떠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반쯤 남은 포션을 다시 그 손에 부어 주자 한건주가 통증을 호소하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거부당한 거예요?”
웃을 상황이 아닌데 터무니없는 일을 겪었다는 듯 구는 그의 태도가 우스워 사윤은 무심결에 픽 소리를 냈다. 그러게 누가 건방지게 건들라고 했나. 자업자득이라 손의 떨림이 멎은 걸 확인하곤 그의 머리를 잡아챘다. 머리카락이 손 틈 사이로 가득 들어차고 한건주의 고개가 젖혀졌다. 아, 하는 짧은 신음이 흘러나와 사윤은 냉랭하게 말했다.
“거절까지 당했으면 건방지게 굴지 말고 빠져 있어, 예쁜아.”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거니까.
현상을 등에 업고 내뱉은 경고에 한건주는 부당하다는 얼굴을 했으나 반박하진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스템이 그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뭐 어쩌겠는가.
그런데 그런 거라면 한건주는 정말로 왜 같이 들어오게 만든 거지?
설마 진짜로 자신이 넋이 나가 있을 때 정신 차리게 만드는 용으로 같이 들여보낸 건가 싶었다. 응원단장도 아니고. 기가 막혀 잠시 시스템을 바라보던 사윤이 숨을 고른 뒤 건주를 놓고 세 번째 파편을 건드렸다. 아니, 건들려고 했다. 뒤에서 훅 끌어당기는 힘만 없었다면.
“이번에도 무슨 일 생기면 저도 더 못 기다려요.”
“네가 못 기다려서 어쩔 건데.”
“…….”
속으로 삼킨다는 게 그만 대꾸부터 나가 버렸다. 사윤은 아차 싶었다가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와 몸을 돌렸다.
“그냥 기다리고 있어.”
아무래도 한건주라도 먼저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이라고 해도 저렇게 오매불망 기다리는 건 답답했을 거라 잠깐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매만진 사윤이 다시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환한 기운이 사윤을 감싼다. 벌써 세 번째로 기절하는 사윤을 받아 든 건주가 눈을 감은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처박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윤을 감싸 안은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