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5화. 진정한 인류의 악 (4)
소년의 하얀 손끝이 푸른 창에 닿았을 때 사윤은 눈을 떴다. 빛이 보여 준 장면은 거기서 끝이었으나 사윤은 소년이 시스템의 제안을 승낙했음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지금까지 시스템창을 보고 있을 리가 없다. 문제는 두 번째 파편에 기록된 모든 내용이 사윤이 알지 못하는 내용이라는 데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었고, 기억나지도 않았다. 난장판 속에서 약국을 뒤진 일도, 생존자 무리가 나눈 대화도 처음 보고 처음 듣는 것이었다.
자신은 분명 각성자의 존재를 영상 매체를 통해 알게 됐는데.
이럴 수가 있나.
첫 번째 파편까지는 그래, 괜찮았다. 그 정도 기억이 왜곡된 것쯤은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기억이 송두리째 바뀔 수가 있나. 다를 수가 있나.
사윤이 눈을 감았다. 생생하다. 제 손으로 남자를 죽였던 기억이, 그것이 두려워 도망쳤던 순간의 공포심이, 처음 자살을 시도해 봤을 때의 긴장감이, 등줄기를 날카롭게 그어 내리던 식은땀이. 모든 것이 방금 일어난 일처럼 생생했다. 기억하고자 하면 칼이 단단한 피부 속을 파고들어 가 살결을 헤치는 기분 나쁜 첫 살인의 느낌까지 떠올릴 수 있었다. 행위에 동반되었던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와 피가 튀기는 소리마저도.
왜곡된 기억이 이렇게까지 생생할 수 있을까?
모든 걸 망상으로 치부하기에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구체적이었다. 첫 번째 파편 때와 달리 모든 것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정말로 망상인 걸까.
이 기억이 모조리 왜곡된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시스템, 시스템이 보여 준 퀘스트 목록에 여전히 남자를 살해하란 내용이 있는데.
그것마저도 환각인 걸까.
“괜찮아요?”
한건주가 물었다. 목소리가 들림에도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파편이 보여 준 광경에선 벗어났는데 자신은 여전히 그 피비린내 가득한 창고에 처박혀 있는 기분이었다. 아니면 그 지독했던 대피소에.
다가온 손이 어깨를 붙잡는다. 몸을 움직이게 해 상대방을 바라보게 한다. 띠링. 듣고 싶지 않은 알림음이 울렸다. 두 번째 파편을 획득했다는 안내 문구가 뜨고 눈을 떠도 새카맣기 짝이 없던 시야가 확보되었다.
“…형.”
한건주가 눈앞에 있었다. 그 눈이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정신 차린 듯 발작한 사윤이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뒤로 물러났다. 순식간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언제부터 흐른 건지 모를 식은땀이 턱 선을 긋고 뚝 떨어졌다.
“…제가 놀라게 했어요?”
“야.”
“네.”
“너도….”
시발.
사윤이 말을 하다 말고 욕을 지껄였다. 너도 내가 만든 기억이냐고 묻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가 제 망상으로 만들어진 인물이든 실재하는 인물이든 제 질문에 곧이곧대로 아니, 라 대답해 주진 않을 테니까.
무언가를 더 말하는 대신 주춤주춤 그에게서 물러나 거리를 두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거짓일까.
앞머리가 땀에 흠뻑 젖었다. 첫 번째 파편을 확인했을 때보다 더 짙어진 물음을 앓은 사윤이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한건주가 뛰어왔다. 제 팔뚝을 잡으려는 그 손을 사윤은 거칠게 쳐 냈다. 과격한 타격음이 들리고 손등이 붉게 물든 남자가 움찔거렸다.
“치워.”
날 선 목소리에 코앞까지 들이닥쳤던 손이 뒷걸음질 쳤다. 사윤은 숨을 헐떡거리며 한건주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그의 존재도 이상했다. 빌어먹게도 재수 없고 비참하게도 절망적이었던 제 삶에 그 같은 존재가 떨어진다는 게 말이 되나. 그간 시스템의 성정을 따지고 보면 자신은 더 비참해야 했고, 더 수렁에서 굴러야 했다. 시스템은 그런 놈이니까. 그리고 지금 상황은 놈의 입에 딱 맞는 구도였다.
모든 게 망상이란 걸 알게 된 자신과 망상으로 만들어진 희망.
얼마나 시스템이 좋아할 연출인가.
어쩐지 지나치게 제 취향으로 생겼다 싶었다. 자신이 만든 망상이었다면 저 얼굴을, 제가 탐낼 재능을, 시스템에게서 벗어날 단서라는 희망을 안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바짝 긴장했던 몸에 힘이 빠졌다. 파편은 아직 다섯 개나 남았는데, 자신은 이미 그 모든 파편의 진실을 본 것 같았다.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래, 애당초 말도 안 되는 거였다.
수년간 휘둘려 온 시스템에게서 갑자기 벗어날 수 있을 거란 게.
눈을 감자 어두운 시야에 파편 속 장면이 되풀이됐다. 죽어 버린 아저씨와 그를 끌어안은 자신, 제게 뜬 시스템창과 유혹하는 듯한 문구, 순진무구하게 내뻗은 손까지.
결국 자신이 선택했다.
모든 것이 망상이든 아니든, 시스템에게 휘둘리고 있는 이 결과는 제가 초래한 것이다.
누굴 탓할 것도 없었다. 왜 하필 자신이냐고 원망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말 그대로 제가 만든 상황이었으니까. 시스템 놈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얼마나 재밌어했을까. 발버둥 친 자신이 놈을 욕하며 신경질을 부렸을 때 얼마나 우습게 봤을까.
좋을 대로 생각하자. 어쩌면 이게 나을 수도 있었다.
만약 제 기억이 모조리 뒤틀린 거라면, 최소한 아저씨를 죽인 건 자신이 아니니까.
고개를 젖힌 채로 숨을 들이마신 사윤이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지쳤다. 더는 무엇도 알고 싶지 않았고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 이 게이트 안은 자신이 좋아하는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고, 게이트를 클리어하지 않으면 이 공간을 나갈 수 없었다. 귀환석도 사용되지 않을 듯했으니 이 게이트 안에 평생 갇혀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렇다면 적어도 현실로 돌아가 밤쥐가, 종식이, 경진이, 옌이, 찬희가, 이재희가 제가 만들어 낸 상상 속 인물인지 아닌지 가늠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 되는 거니까.
“…대체 뭘 보고 온 거예요?”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불쑥 들어온 목소리가 평온한 상상을 방해했다. 사윤은 눈동자만 굴려 건주 쪽을 바라보았다. 입체적이다. 저를 보며 불안한 듯 떨고 있는 눈동자도, 표정에 담긴 의구심도 모두 현실적이었다.
저렇게나 선명한데.
가짜일까?
대답 없이 있으니 남자가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조금 전 밀쳐진 충격이 컸던 건지 다시 다가오려고 하진 않는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더는 무엇도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제정신이 아니란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정신이 나가 있을 줄은 몰랐다. 제 광증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어째서 자신은 모든 기억을 덮고 왜곡시킨 걸까. 시스템은 대체 제게 무슨 일을 시킨 걸까.
염원과는 반대로 머릿속은 습관처럼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 맹렬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려 노력하는데도 몸에 익어 버린 태도란 게 무섭다. 사윤은 땀이 배어 나오는 손바닥으로 무릎을 짚었다. 당장 무얼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일어서는 걸 고민하고 있는 그때였다.
“형이 안 알려 줄 거라면, 제가 확인해 볼게요.”
한건주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그리 말하더니 몸을 돌렸다. 그가 제게서 멀어진다. 어둠 속을 홀로 헤쳐 가는 등을 사윤은 멍하니 응시했다. 등이 자꾸만 멀어졌다.
확인해 본다니. 무엇을?
혼잡했던 머릿속을 모조리 밀어 버린 의문에 심장이 덜컥거렸다. 이후의 움직임은 본능적인 것이었다.
망설였을 땐 언제고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사윤이 앞서간 이를 따라잡기 위해 내달렸다. 눈동자의 초점이 멀어지는 등에 고정된다. 축소된 동공에 익숙한 뒤태만이 잡혔고 뜀박질의 속도가 빨라졌다. 다가오는 사윤을 확인한 한건주가 똑같이 뛰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한차례 추격전이 펼쳐졌다.
한건주는 마치 이 추격전에 모든 걸 건 것처럼 사활을 다해 뛰었고 사윤 역시 헐떡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그 뒤를 쫓았다. 몸이 잔뜩 지친 상태라 뛰는 게 쉽지 않았으나 그래도 스탯의 차이는 노력으로 어떻게 이겨 내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국 사윤은 한건주를 잡는 데 성공했다.
쭉 뻗은 손이 목덜미의 셔츠를 낚아챘다. 그 상태로 끌어당기자 멀어지려던 몸이 제게로 기울었다. 코앞에 파편을 담고 있는 빛 무리가 있었다.
간발의 차로 파편을 잡지 못한 한건주가 거칠게 넘어졌다. 그의 몸이 제 쪽으로 쏠려 있었기에 함께 넘어진 사윤이 제 위로 엎어진 남자를 향해 호통쳤다.
“너 미쳤냐?”
네가 뭔데 그걸 확인해.
쏘아붙이는 말투는 예민함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한건주의 멱살을 붙잡으며 고개를 들어 올린 사윤이 얼굴을 바투 붙이며 노기를 토하자 한건주가 특유의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제가 여기서 뭘 어떻게 해야 해요. 같이 들어온 게이트인데, 그것도 제가 형을 알고 싶다고 해서 생긴 게이트인데 형 혼자 힘들어하게 놔둬야 해요? 최소한 형이 왜 힘든지 그 이유는 알아야 저도 뭔 조치를 취하거나 할 거 아니에요.”
“네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뭐라고 조치를 취해.”
“…….”
냉정한 말에 한건주의 눈이 커졌다. 제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한 눈동자가 흔들린다. 사윤이 그의 멱살을 더 꽉 붙들었다.
“애초에 난 네가….”
망상인지 실재인지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말을 삼킨 사윤이 입술을 짓뭉갰다. 한건주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망상이라고요?”
분명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무심코 말했나 보다. 제대로 된 기억이 없었다. 이젠 제 감각조차 믿을 수 없어 사윤의 표정이 이지러졌을 때 멱살이 붙들려 있던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확인해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