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4화. 진정한 인류의 악 (3)
그건 사윤에게 아주 익숙한 알림창이었다. 당신은 인류의 악으로 지정되었다는 그 빌어먹을 시스템창. 지옥에서도 달가울 리가 없는 푸른 창을 눈에 담은 순간 사윤은 깨달았다. 첫 번째 파편에서도, 두 번째 파편이 진행되는 지금까지도 시스템창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이것이 첫 등장인 거다.
자신이 기억했던 것과 달리, 시스템창은 세상이 망하기 시작할 때부터 제게 온 게 아니었다.
드러난 진실에 사윤이 당황하는 것처럼, 장면 속 소년 역시 당황을 금치 못하고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인류의 악?」
아무것도 모르는, 아직 천진한 시기의 소년이 의문을 담아 중얼거린다. 멀리서 괴물의 울음이 들렸다. 화들짝 놀라 몸을 들썩인 소년이 눈을 감아 버린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호흡에 미약한 힘이 실려 있다. 아직 살아 있다는 신호였다.
어찌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안절부절,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소년이 남자의 팔을 어깨에 걸치고 있는 힘껏 들어 올렸다.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힘을 썼으나 체격의 차이는 힘으로만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소년은 허약하기까지 했기에 하는 수 없이 남자의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려도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소년이 향한 곳은 몸을 숨길 수 있는 낡은 창고였다.
폐허가 된 거리에 위치한 다 무너져 가는 창고였지만 다친 남자가 몸을 뉠 수 있을 만한 수준은 되었다. 힘겹게 남자를 끌고 와 창고 바닥에 내려놓고 문을 닫았다. 달이 차오르고 괴물들의 울음이 짙어진다. 생존 본능을 자극하고 두려움을 짓쑤시는 울음에 소년은 남자의 손을 꽉 쥐었다.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릴 곳이 필요해 사위를 살핀다. 그러다 다시 푸른 시스템창과 맞닥뜨렸다.
「불길해.」
소년은 저 상태창이 불길한 것임을 본능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들리는 괴물의 울음소리가 무서워서, 잡고 있는 남자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꺼질 게 두려워서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남자는 해가 뜨고 달이 기우는 과정을 소년이 세 번이나 바라봤을 때 깨어났다.
신음과 함께 들리는 제 이름에 미친 사람처럼 넋을 놓고 있던 소년이 퍼뜩 정신 차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다. 죽은 것 같기도 했고 산 것 같기도 한 몽롱한 눈을 마주한 소년이 남자의 손을 꽉 쥐고 그를 불렀다. 아저씨.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맑은 음성에 남자의 눈이 커진다. 마치 지독한 꿈을 꾸었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부릅뜬 남자는 눈동자만 좌우로 데굴, 굴려 창고 안을 확인했다.
「사윤아….」
언제나 다정하고 듬직했던 목소리는 전에 없이 쇠약해져 있었다. 아주 작은 구멍을 통해 간신히 흘러나온 숨소리 같은 음성이다. 새된 바람 같았다.
「이거.」
남자가 부들거리는 손으로 겉옷을 들춰 제 허리춤에 있는 총을 사윤에게 보여 주었다.
「이거 갖고, 대피소로 가. 아저씨랑, …원래 가기로 했던 곳. 어딘지 알지?」
띄엄띄엄 들리는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아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남자가 했던 말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얼굴로 고개만 주억거렸다. 막 깨어난 남자가 살아 있다는 데 안도하고 또 그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데 집중하느라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남자가 신음을 참곤 손을 들었다. 입술을 꽉 다물었으나 기어코 그 사이로 작은 호소가 새어 나왔다. 통증을 느끼는 듯한 이에 소년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안심시키려는 듯 남자의 커다란 손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장하다.」
그 말이 유언처럼 떨어졌을 때 소년의 눈이 커졌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힘없이 추락한다. 시간이 정지되기라도 한 것처럼 굳어 있던 소년은 뒤늦게 남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숨소리는 처음보다 훨씬 미약해져 있었다. 손을 뻗어 남자의 몸을 더듬었다. 그의 체온이 내려가고 있다는 게 피부로도 와 닿았다.
「아저씨…?」
부르는 음성에 대답이 없다. 한 번 더 남자를 불러 본 소년은 남자의 허리춤에 걸린 총을 바라보다 두 손으로 뺨을 내리쳤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볼 위로 붉은빛이 번졌다. 덜그럭거리며 남자의 총을 띠에서 빼낸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약국.」
멀지 않은 곳에 약국이 있었다. 남자와 나눈 대화를 상기해 보면, 폐허가 됐을지언정 쓸 만한 약품 몇 개 정도는 있을 거라고 했다. 거길 가야 한다. 남자는 지금 아프니까. 자신이 가서 약을 구해 와야 했다.
「아저씨 말고는 누구도 믿지 마, 알겠지?」
언제 들었는지 모르는 남자의 음성이 공간을 울렸다. 환청이었다. 네. 소년은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를 대답을 뱉으며 남자를 바라보다, 그가 춥지 않도록 제 외투를 벗어 덮어 준 뒤 창고의 문을 열었다.
「다녀올게요.」
꾸물거릴 시간은 없다. 한시라도 빨리 약국을 찾아야 했다. 두려움에 손발이 덜덜거리며 떨렸지만 그 공포심이 남자를 잃었을 때의 공포보다 심하진 않아 소년은 밤의 거리를 달렸다. 겨울이다. 헉헉거리는 숨을 고를 때마다 허연 입김이 안개처럼 번져 시야를 가렸다.
약국까지의 거리는 가까운 듯하면서도 멀었다. 소년은 그 여정을 떠나며 괴물과 두 번이나 조우했고 생존자 무리도 보았다. 그들을 본 건 사윤이 새끼로 보이는 괴물 한 마리에게 습격당해 수풀을 구르고 있을 때였다.
총성이 연거푸 들리고 괴물의 단말마 비명이 그 뒤를 따랐다. 그때쯤 팔뚝만 한 괴물을 간신히 떨어트려 놓은 사윤은 신음을 참으며 피가 흐르는 상처를 압박했다. 총성이 난 곳에서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30대로 보이는 남자 네 명이었다.
「시발 진짜. 괴물 새끼들 별로 없는 곳이라더니 없긴 무슨. 새끼들이 좆같이 많은데. 여기에 각성자가 있다는 거 확실해?」
「신호 보내잖아. 여기에 있는 건 확실해. 문제는 그놈이 정말로 괴물을 처치할 수 있냐는 거지. 각성자 사칭도 많다던데.」
「그거 보여 달라고 하면 되지 않냐. 왜, 각성자들한텐 시스템창 같은 게 뜬다며. 당신은 인류의 구원자로 선정되었습니다? 뭐 그런 거.」
「그건 각성자들한테밖에 안 보인다던데?」
담배를 뻑뻑 피우면서 다소 신경질적인 어조로 대화를 나누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소년은 숨죽인 채로 들었다. 각성자도, 시스템창도 소년에겐 낯선 것이었다. 그런데 낯설지 않은 게 있다면.
소년의 눈이 무심코 허공으로 돌아갔다. 창고에서 보았던 푸른 알림창은 언제부턴가 사라지고 없었다.
남자가 당부했던 대로 괴물 조심, 사람 조심을 위해 생존자 무리가 사라질 때까지 몸을 숨겼던 소년은 그들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발소리마저 들리지 않게 된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각성자….」
떨어진 시선이 조그마한 손에 닿았다. 양 손가락을 펼쳤다가 그러쥐어 본 소년은 창고에서 외로워하고 있을 남자를 떠올린 것처럼 고개를 휙휙 저었다.
「일단 약국부터….」
스스로에게 되뇌듯 우선순위를 분명히 한 소년은 다시 약국으로 달렸다. 중간에 두 번이나 시련을 마주한 덕인지, 아니면 그 생존자 무리가 반대 방향으로 오면서 새끼 괴물들을 전부 처치한 덕인지 약국에 도착할 때까지 추가적인 괴물의 습격을 받는 일은 없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약국에 도착하자 이미 다른 사람들의 손을 거친 거지, 깨진 유리가 보였다. 그 안으로 몸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은 소년은 얼마 남지 않은 약들을 일단 막무가내로 쓸어 담았다. 하나하나 확인하고 고를 시간이 없었기에 남은 걸 모두 챙긴다는 생각으로 작은 배낭 가방에 모조리 쑤셔 넣었다.
먼지가 쌓여 있어 팔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재채기와 기침이 튀어나왔다. 그런데도 지독하게 눈을 뜨고 약을 찾아다닌 소년은 배낭이 빵빵하게 부풀어 더는 약이 들어갈 곳이 없게 될 때까지 챙긴 후에야 가방 문을 닫고 그것을 소중하게 품에 껴안은 채 창고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 역시 쉽지 않았다. 또다시 생존자 무리를 만났고 전에 보지 못한 괴물이 달려들어 죽기 살기로 뛰어다니고 바닥을 굴렀다. 넘어지고, 괴물의 발에 차이기도 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멀리 달아날 수 있어서 괜찮았다. 그 모든 일을 겪으면서 소년의 옷이 찢어지고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런데도 가방만큼은 무사했다. 팔이 부러질지언정 가방은 지키겠다는 기세로 꽉 껴안아 온몸으로 보호한 덕이다.
마치 남자가 소년에게 그랬던 것처럼.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어깨에 얼굴을 비벼 닦은 소년이 창고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남자에게 최대한 멀쩡한 꼴을 보여 주고자 옷도 털었다. 그다음 서둘러 창고의 문을 열어 뛰듯이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았다.
「아저씨. 약 가져왔어요. 약이에요.」
소년이 배낭의 입구를 활짝 벌리며 말을 쏟아 냈다. 이젠 괜찮을 거라고. 이 정도 약이면 다 치료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가방을 분주하게 뒤적거리던 손길이 뚝 그쳤다.
「아저씨?」
조심스럽게 그를 부른 소년이 바닥을 기듯이 짚어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대답이 없다. 침묵이 흐른다.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고 소년의 손이 움직였다. 호흡기로 가져다 댄 손에는 어떠한 숨결도 느껴지지 않았다. 얕게 부풀었다가 가라앉길 반복하던 가슴의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저씨.」
소년이 남자를 불렀다. 어깨를 흔들어 불렀다. 몰랐는데 남자의 허리 쪽에는 꽤 큰 상처가 나 있었다. 그곳으로부터 피가 마구 흘러나와 손으로 압박해 보며 다급히 남자를 깨웠다. 남자는 긴 잠에 빠진 듯 일어나지 않았다. 두 손이 붉게 물들고 먼지 냄새로 가득했던 창고 안이 피비린내로 채워졌을 때 소년은 깨달았다.
남자는 죽었다.
「…나 때문에.」
저를 지키다 죽었다.
부모도, 아저씨도. 전부 저를 지키다 죽었다. 제가 그렇게 약하지 않았더라면 지켜야 할 존재가 아니었더라면, 괴물을 해치울 수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소년이 미동도 하지 않는 남자를 꽉 끌어안았다. 피투성이 몸을 틈 하나 없이 끌어안은 소년이 잘못했다고 중얼거리고 있을 때 소년의 시야에 보란 듯이 환한 빛을 뿜어내는 푸른 창이 떠올랐다.
<당신은 인류의 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구원자들에게 맞서, 행성 9180호 ‘지구’를 멸망으로 이끄세요. (b ᵔ▽ᵔ)b>
각성자.
그 창을 본 순간 소년의 귀에는 길에서 만났던 남자들이 나눈 대화가 울렸다. 못이 박힌 듯 시선이 그 창에 고정된다. 이윽고 또 하나의 창이 떠올랐다.
<모든 미션을 클리어할 시 ‘소원권’이 지급됩니다. 각성을 수락하시겠습니까?>
예와 아니오로 구분된 선택창에 여전히 남자를 끌어안고 있던 소년이 물었다.
「소원권으로, 아저씨를 살릴 수도 있어?」
<소원권은 사용자의 소원을 ‘무엇이든’ 들어드립니다. (b ᵔ▽ᵔ)b>
대답 같은 알림이 뜬다. 소년이, 사윤이 시스템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