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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43)화 (243/266)

제243화. 진정한 인류의 악 (2)

반복되는 회귀와 살인으로 미쳤다면 제 기억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왜곡된 정보일까.

힘이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다리가 흔들렸다. 걷기 위해 발을 들었다 놓는 짧은 순간에도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이 심장을 펌프질한다. 첫 번째 파편에서 본 장면은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의문을 깊게 파고들려면 어쩔 수 없이 다시 상기해 봐야 했다.

알고 있던 것과 다른 것.

자신은 부모님의 죽음을 두 눈으로 목격했으며 아버지의 시체를 보았다. 옆집에 사는 줄 알았던 아저씨는 구조 작전에 투입된 군인이었고 자신을 직접 옷장에서 꺼내 데려갔다. 이 짧은 문단 안에서도 기억과 다른 사실이 네 개였다. 본래 안고 있던 정보 위로 새로 알게 된 기억이 덧씌워진다. 아니, 그건 벗겨진다고 해야 맞을 거다. 진실을 새카맣게 덮고 있던 포장이 까지고 외면했던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눈동자의 이채마저 먹으로 칠한 듯 어두웠다.

이게 겨우 첫 번째 파편이었다. 앞으로 남은 여섯 개의 파편은 제게 무엇을 보여 줄까.

죽은 자의 것과 같은 시선이 퀘스트창을 응시했다.

대체 시스템은 이 던전에서 자신이 무얼 보고 무얼 얻길 원하는 걸까.

이번에도 단순한 조롱인가? 그저 유희일까. 어쩌면 자비를 내려 주는 척 조소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제 상태창에 버젓이 박힌 가장 불행할 당신에게처럼 말이다.

“형.”

케케묵은 감정에 잠긴 사윤을 목소리가 깨웠다. 살짝 떨리고 가라앉은 음성.

도착했나 보네.

시스템창에 고정돼 있던 시선이 추락하듯 떨어져 정면으로 향했다. 또다시 밝은 빛이 보인다. 분명 어둡고 습하기 짝이 없는 게이트 공간을 밝히는 빛인데 달갑지 않았다. 빛이 내뿜는 숨결이 어둠을 헤친다. 어둠만이 사윤의 유일한 안식처였으나 그것마저 저 빛에 뺏기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윤은 손을 뻗었다. 떨리는 손끝을 한건주가 채 갔다.

“형,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다른 길을 찾아봐요.”

“너도 봤잖아. 저 빛을 확인해야 진실 파편인지 파탄인지 하는 게 채워지는 거.”

“길이 하나란 법은 없잖아요.”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넌 시스템을 좆같이 몰라서 그래. 그 새끼들이 내어 주는 길은 언제나 가장 개같은 게 정답이거든. 설마 이것보다 더한 길이 있을 것 같니.”

자조와 분노가 섞인 대답에 한건주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순응하는 분위기가 아닌지라 한숨을 쉰 사윤이 마저 반박했다.

“그래. 만약 다른 길이 있다고 치자. 근데 그건 또 언제 찾으려고? 이거 찾는 데도 오래 걸렸는데. 그러니까 놔. 너 이러다 여기서 못 나간다.”

힘을 살짝 줘 쳐 내려는데 드물게도 건주가 더 강한 힘으로 사윤의 손목을 제압했다. 안 되는 걸 알고 제게 힘을 쓰지 않는 평소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신경질적으로 돌린 고개에 눈이 마주쳤다.

“왜 이래.”

“형 말이 조금 이상해서요. …아니죠?”

“뭐가.”

“저 때문에 이 게이트 클리어하려는 거요. 아니죠?”

“…….”

바로바로 튀어 나가던 반박과 대답이 이번만큼은 간극으로 메꿔졌다.

말실수라도 했나. 기억을 복기해 추측해 보려 했지만 머릿속이 엉망이라 쉽지 않았다. 조금 전 한건주와 나눴던 대화도 벌써 희미해지고 있었다. 기억해야만 하는 정보들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어 새로운 것을 채워 넣을 수 없었다.

지금 상태론 다른 생각을 하는 것도 버거워 고개를 저은 사윤이 과격히 손을 빼냈다. 그러곤 그의 가슴팍을 밀어 내자 한건주가 힘없이 밀려났다.

“뭔 헛소리야. 어차피 여길 클리어해야 내 성향도 활성화돼.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거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예쁜아.”

진이 빠진 탓에 목소리도 힘없이 들렸다. 사윤은 망연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빛 무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처음 겪었던 것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며 바다에 빠지는 듯한 환청이 귓가를 채웠다.

* * *

「사윤아」

아저씨다. 어쩌면 부모의 것보다 더 강렬하게 남은 기억 속 음성에 본능적으로 반응한 사윤이 소리가 들린 곳을 보았다. 희뿌연 안개가 형체를 갖추며 사윤이 덮어 두었던 장면을 세상으로 내보냈다. 군복을 입은 남자가 어린 소년의 머리를 매만지며 초코바를 건네고 있었다.

「뭐라도 먹어야지.」

남자는 걱정이 가득한 기색으로 말했으나 넋이 나간 듯 서 있는 소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충격으로 실의에 빠진 소년을 남자는 제 자식처럼 정성스럽게 챙겼다. 제 몫의 물을 넘겨주었고 밥을 챙겨 주었다. 심적 충격이 심해 걷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소년을 안고 대피소까지 이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가까이 있던 대피소는 이미 반쯤 폐허가 되어 몸을 맡길 수 없었다. 결국 다음 대피소로 향해야 했다.

이동 거리가 달라지니 필연적으로 준비해 둔 식량이 바닥났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사윤아. 알겠지.」

남자는 소년을 자동차 트렁크에 두곤 식량을 찾아 떠나려 했다. 그동안 무표정했던 소년이 처음으로 반응했다.

「가, 가지 마세요.」

옷깃을 붙들어 곁에 두려는 손길이 떨렸다. 두려움 가득한 눈동자가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어린 소년을 안심시키듯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금방 올게.」

머리부터 볼까지 느릿하게 쓰다듬어 준 남자가 총을 들고 떠났다. 소년은 트렁크 안에서 얌전히 기다렸다. 트렁크 문이 닫혀 소년을 감싸고 있는 건 어둠뿐이었다.

옷장 속에서와 비슷한 느낌의 공간 속에서 소년은 숫자를 세었다. 백 초를 백 번 세어도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저씨? 소년이 트렁크 안에서 작게 남자를 불렀다. 쫄쫄 굶은 탓에 흘러나온 목소리는 빈약했다. 바로 옆에 있어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소년의 얼굴에 불안이 서렸다. 어떻게든 트렁크 안에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소년이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덜커덩. 차체가 한 번 흔들리며 빛이 스며들어 왔다. 닫혔던 문이 서서히 위로 올라가고 인영이 보였다.

「미안하다. 늦었지.」

멋쩍은 표정의 남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남자를 안았다. 한 번 더 놀란 표정을 짓던 남자는 이내 소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가져온 식량을 나눠 주었다. 초코바를 거절했던 소년은 빵 하나를 받아 들고 남자를 힐끔 보다가 입에 물었다. 반색한 남자가 기특하다며 소년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였다.

그것을 계기로 남자와 소년은 빠르게 친해졌다. 실제로는 며칠이었을 시간이 단 몇 분 만에 빠르게 감겨 지나가고 남자의 손을 잡고 걷고 있던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는 왜 절 도와주세요?」

「네 또래의 동생이 있었는데. 내가 못 지켜서 죽었거든. 널 보니까 동생 생각이 나서.」

「…그 동생은 어쩌다 죽었는데요?」

「계곡에 갔다가.」

「아.」

이어지는 말을 듣지 않아도 내용을 짐작한 건지 소년이 작게 죄송하다고 중얼거렸다. 남자가 웃으며 그런 소년을 달랬고, 사윤은 그 광경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기억에 전혀 없는 장면이었다.

인지하는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틱틱, 손톱을 물어뜯은 사윤이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안개 속 장면에 시선을 박았다. 남자와 소년은 이제 가족이라 볼 수 있을 정도로 친해져 있었다.

문제는 꾸준히 음식을 섭취하고 남자와의 정서적 교류를 통해 어느 정도 안정을 취한 소년이 야밤에 거처를 벗어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자다가 깬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소년과 남자가 잠을 청한 곳은 주인 없는 트럭 위였는데, 소년이 찾는 건 풀숲이었다. 화장실이 가고 싶어진 모양이었다.

아.

사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곧이어 찾아온 두통에 신음이 되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뇌에서 번개가 번쩍이는 듯했다.

그사이에도 안개 속 장면은 멈추지 않았다. 소년은 기어코 트럭에서 내려와 풀숲을 향해 걸어갔다. 일이 생긴 건 그 다음이었다.

풀숲에 도착한 소년에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키에엑?」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들자, 나무에 매달려 있는 괴물이 소년의 시야에 들어왔다. 괴물의 크기는 작았다. 소년의 부모님을 죽인 괴물보다 몇 배는 작았으나 위협적이긴 매한가지였다. 놀란 소년의 몸이 굳었을 때 괴물이 소년을 덮쳤다.

「키에엑!」

「사윤아!」

제게로 하강하는 괴물을 본 소년이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며 눈을 질끈 감았을 때.

타앙!

총성이 들렸다. 뒤늦게 깨어난 남자가 다급히 트럭에서 내려 소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총을 맞은 괴물은 목적지에 떨어지지 못하고 바닥에서 바르작거렸다. 거기서 해결되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나무에는 괴물 하나만 매달려 있는 게 아니었다.

「키에에에엑!」

동족의 사망을 본 괴물 수십 마리가 흥분하여 하늘에서 뛰어내렸다. 남자가 기겁하며 총을 쏘았지만, 한 번에 한 발씩 나가는 총으로 괴물을 모두 사살하긴 역부족이었다. 결국 남자의 어깨에 괴물의 이빨이 틀어박혔다. 남자는 그 다급한 와중에도 소년을 한 팔로 꽉 끌어안아 보호했다.

「크윽!」

신음을 흘리던 남자가 소년을 안은 채로 내리막길로 뛰어가더니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가속도가 붙은 몸이 험하게 바닥에 부딪히는 동안 남자에게 들러붙어 있던 괴물들도 따라 바닥을 나뒹굴며 비명을 내질렀다. 견디다 못한 놈들이 남자에게서 떨어지고도 내리막길이 끝나지 않아 한참을 더 굴렀던 남자는 나무에 들이박고서야 굴러가는 몸을 멈춰 세울 수 있었다.

나무에 부딪힌 남자의 몸에 힘이 빠지고 그 품에 꽉 안겨 저보다 배로 큰 남자의 덩치로 보호받았던 소년이 감았던 눈을 떴다. 피투성이로 거친 숨을 내쉬는 남자를 본 소년의 얼굴이 굳었다.

「아저씨!」

놀라서 팔을 붙드는 소년을 본 남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감기는 남자를 소년은, 사윤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순간 소년의 앞에 푸른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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