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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40)화 (240/266)

제240화. 진정한 인류의 악? (4)

첫인상부터 기운이 넘쳐 보였던 최연우는 카페 안에서 더 활발했다. 자주 가던 카페라던데 빈말이 아닌 건지 들어가자마자 음료를 추천해 준 이의 표정이 시종일관 해맑았다. 꾸며 낸 밝음이 아닌 타고난 성향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물과 기름만큼이나 한건주와 어울리지 않는 성격에 계산을 마치고 앉은 사윤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둘이 어떻게 친해졌니.”

눈짓으로 한건주를 가리키며 뱉은 말에 사윤을 빤히 응시하던 최연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비소로 느껴지진 않는 말간 웃음이었다.

“이야.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들마다 저 질문을 하지. 이쯤 되면 너랑 내가 좀 특별한 사이로 보이긴 하나 보다. 형이 보기에도 제가 아깝긴 하죠?”

이런 식의 질문을 꽤 자주 받아 봤다는 투였다. 능청스러운 대꾸에 반사적으로 웃음을 흘리니 사윤의 옆자리를 차지한 건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가 특별하긴 뭐가 특별해. 그리고 넌 언제 봤다고 형이라고 불러?”

“그럼 뭐라고 부르냐, 님이라고 불러? 이름도 모르는데. 아, 이름 물어봐도 돼요? 전 최연우고….”

“안 돼.”

거절의 말을 뱉은 건 사윤이 아닌 건주였다. 제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단칼에 선을 긋는 남자를 살핀 사윤이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안 되는데. 최연우에게서 배턴을 넘겨받아 추궁하니 남자의 미간에 잡혀 있던 주름이 더 짙어졌다. 어릴 때부터 저렇게 인상 쓰고 다니면 나이 차서 주름이 생길 텐데 젊음을 믿고 표정을 막 쓴다.

습관처럼 올라간 손이 주름을 펴 주려는 찰나 건주가 사윤의 손목을 낚아채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저 처음 만났을 때도 이름 안 알려 주셨잖아요. 최연우한테 알려 주면 불공평한 거죠.”

뭐, 납치해서 감금이라도 한 뒤면 모를까.

몸을 살짝 기울여 속삭이는 말에는 시원하지 못한 뒤끝이 담겨 있었다. 기가 막혀 그의 발을 툭 걷어찼다. 한건주는 눈썹을 모았다가 표정을 푸는 것으로 대꾸를 마치곤 최연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별거 아니고 동기예요, 그냥.”

“이 새끼가 친한 애들이 별로 없어서 제가 친구 해 주고 있죠.”

“나 군대 간다고 슬퍼서 유학까지 간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뭔 개소리야.”

감정에 매사 솔직한 편인 건지 표정을 험악하게 구기며 욕설을 내뱉는 데 망설임이 보이지 않았다. 딱 제 나이대 같은 대화를 나누며 투덕거리는 두 사람을 사윤은 의자에 반쯤 기댄 채로 관람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한건주가 최연우와 나름 친밀한 사이라는 게 느껴졌다.

밤쥐 길드원들을 대할 때의 태도와는 달랐으니까.

자신이 아닌 간부들이나 다른 길드원들을 대할 때의 한건주는 놀랍도록 말이 없고 또 냉정했다. 이미지 관리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건지, 무생물과 함께 다니는 양 굴었던 걸 생각해 보면 지금의 한건주는 꽤 눈앞의 남자를 사람으로 대우해 주고 있었다.

“시발 듣자 하니까 어이없네. 이 새끼. 너한테 먼저 말 건 사람이 누구야?”

“너지.”

“친구 먹자고 한 사람은.”

“그것도 너지.”

“너 모임까지 데려간 사람은.”

“최연우고.”

“그런데도 내가 너랑 친구 해 주는 게 아니냐?”

억울하다는 듯 얘기하는 최연우에 음료를 한 모금 마신 한건주의 입술이 밉살스럽게 올라갔다.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지니 최연우가 질색한다. 그가 안 듣겠다는 듯 두 손을 들어 올려 귀를 틀어막았지만 아쉽게도 건주가 한발 빨랐다.

“나랑 친구 하고 싶어 하는 너를 내가 받아 준 거지.”

“미친 새끼.”

이젠 놀랍지도 않다는 듯 힘없이 중얼거린 최연우가 지원을 요청하듯 사윤을 돌아봤다.

“형, 보세요. 이 새끼 뻔뻔한 거. 이런 자식이라니까요? 형 앞에서 무슨 내숭을 부리는 건지 모르겠는데 미친 새끼니까 그냥 곁에 두지 말고 상종을 안 하는 게… 어억!”

말을 하다 말고 의자를 뒤로 쭉 빼며 신음한 최연우가 정강이를 붙들었다. 건장한 몸이 안쓰러울 정도로 잘게 떨리고 원망 담긴 눈이 건주를 향했다.

“와 이 양아치 새끼. 이젠 폭력까지 쓰냐?”

“폭력이라니, 실수였어.”

“실수로 사람 다리를 걷어차?”

“다리가 좀 길어서.”

“…….”

뻔뻔한 대꾸에 최연우가 입을 뻐끔거렸다. 입씨름에서 패배한 사람을 무시한 건주가 음료 하나를 사윤의 앞으로 당겨 주며 태연히 빨대 꽂아 줄까요? 물었다. 그때까지도 연우를 바라보고 있던 사윤은 차별 대우에 항의하듯 씩씩거리며 저 새끼랑 친구 한 내가 잘못이라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집중하다가 입가를 매만졌다. 마음이 또다시 술렁거렸다.

뭐랄까.

생각했던 것보다.

“평범하네.”

“네?”

앞뒤 맥락을 전부 잘라먹고 흘러나온 감상이었다.

한건주의 성격이 보통이 아닌 걸 알았고 그가 사람들을 상대로 이미지 관리를 한다는 것도 알았으며 또 사람을 대하는 데 능숙한 면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지내는 일상 역시 범상치 않을 줄 알았는데 거리에서도 느꼈지만 한건주와 최연우의 대화는, 분위기는, 관계는 이렇다 할 거 없이 평범했다. 뭔가 특수한 상황이 더 있을 거라고 지켜봤는데도 그저 편안한 분위기만 이어질 뿐이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모습을 바탕으로 그려진 자신을 만나지 않은 한건주 역시 평범한 인간상을 이루었다. 얼굴은 지금보다 밝게 손과 발에는 굳은살 하나 박이지 않아 곱고 늘 웃고 다니나 의뭉스러워 보이는 태도와 초조해할 일 없이 항상 여유롭고 나긋한 작태. 딱 잘사는 집에서 곱게 자란 도련님 같은 모습이 그려져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문질렀다.

이럴 수도 있을 거라 어느 정도 짐작은 했으나 막상 직면하게 되니 마음에 너울이 쉬지 않고 일었다. 그러다 입가에 조소가 박혔다.

그가 자신을 만나 불행해졌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죄책감을 느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으니 그 감정을 사윤은 이기심과 뻔뻔함으로 덮었다. 수차례 해 왔기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처음부터 내 눈에 걸리지 말았어야지. 아니면 도망가고서 돌아오질 말았어야지.

…그래도 보상은 아쉽지 않게 해 줄 테니 너무 억울해하진 말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한건주가 밀어 주는 컵을 움켜쥐었다. 얼음이 동동 띄워진 음료를 무감각하게 바라보다 벌컥 들이켰다. 냉수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니 기이하게 들끓는 것 같던 속이 조금은 진정되는 듯했다. 피부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한건주겠지.

자신이 허튼 생각을 하거나, 대화에 집중하지 않고 있으면 귀신같이 알아채는 그였다. 구태여 옆을 돌아 시선의 주인을 확인해 볼 필요도 없어 테이블에 시선을 박아 두고 음료만 마셨다. 지금 그의 얼굴을 보면 어떤 감정이 밀려올지 예상이 되질 않았다.

불확실한 건 피하는 게 나아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분위기를 파악할 요량이었는지 말없이 건주와 사윤을 번갈아 보던 최연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누구인지 정말 소개 안 해 줄 거냐?”

“어.”

“고민조차 안 하는 거 봐라.”

배신감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에 한건주가 코웃음을 치는 게 들렸다.

“네가 알 필요 없는 사람이야.”

“이게 아까부터 사람 면전에 대고 선 긋네. 예전에는 내숭이라도 부리더니 이젠 그것도 안 하냐?”

“해 줘?”

“말을 말자.”

이쯤 되면 불쌍한 수준인데.

말싸움만 진행됐다 하면 최연우가 연전연패했다. 말문이 막혀 한숨을 내쉬고 대화를 포기하는 그 모양새가 어딘지 익숙했기에 동질감을 느낀 사윤이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니 그것을 인지한 연우가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안 말해 주면 형님한테 물으면 되지. 한건주랑은 무슨 사이예요, 형?”

눈길을 준 게 화근이었나 보다. 손바닥 뒤집듯 빠르게 표적을 바꾸는 행동에 순간적으로 웃음이 샜다. 눈치가 빠르다면 빠른 것 같았고 얍삽하다면 얍삽하다. 이런 걸 보면 그가 괜히 한건주의 친구가 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적절한 때를 노려 치고 빠질 줄 아는 것 같아 보였으니.

그래도 사람은 잘 봐야지.

한건주는 공략하기 어려울 것 같으니 넘기고 저를 통해 정보를 얻어 내려는 태도에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제가 한건주보다 쉬워 보이나 싶어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하자 최연우가 돌연 몸을 부르르 떨더니 팔뚝을 쓸었다.

“뭐야, 갑자기 왜 한기가….”

어리둥절해하는 반응은 꽤 재밌었다. 왜 한건주가 그를 자꾸 골려 먹는지 알 만할 정도로.

“궁금하니.”

나직한 되물음에 팔뚝을 쓸던 이가 석고처럼 굳었다. 그러다 이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사윤을 살폈다. 관찰의 시선을 기꺼이 받아 주며 눈매를 접자 황당하다는 듯 헛숨을 내쉰 최연우가 몸을 물렸다. 그의 손이 허공을 좌우로 휘저었다.

“됐어요. 웬일로 사람이랑 붙어 있어서 물어보려 했는데 그럼 그렇지.”

“……?”

뜻을 파악하기 힘든 말이었다. 여러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어 추궁의 시선을 던지자 최연우는 제 심정을 숨기지 않고 얘기했다.

“한건주랑 똑같이 수상하고 위험한 사람 같다는 의미예요. 사람은 끼리끼리라더니. 물들기 전에 나도 친구 관둬야 하나.”

끝말은 꽤 장난스러운 어투였다. 포기하겠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고개를 젓는 이에 웃음을 흘린 사윤이 음료가 담긴 컵을 들었다. 그래도 겁 안 먹는 거 보면 과연 한건주의 친구답다. 한건주가 저 깡을 옮은 건지, 최연우가 한건주의 깡을 옮은 건지 모르겠지만 신기한 건 마찬가지라며 음료를 들이켠 순간이었다.

“네가 보기엔 어떤 사이로 보이는데.”

문득 한건주가 물었다. 그에 너무 춥다며 외투의 지퍼를 끌어 올리던 최연우가 태평하게 대답했다.

“애인?”

“푸흡!”

사윤은 마시던 음료를 그대로 뱉어 냈다. 추태를 부렸다는 것도 잊고 황당한 눈으로 최연우를 응시하고 있으니 한건주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휴지를 뽑아 입가를 닦아 주었다. 눈동자가 굴러가 그의 얼굴을 확인한다. 같은 말을 들었는데도 건주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만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당황한 건 저뿐이었기에 컵을 내려놓으니 최연우가 의아해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아니야.”

뜸 들이지 않고 튀어나온 부정에 입가를 닦아 주던 손이 멈칫거린다. 최연우가 눈을 깜빡거리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이야….”

웃음기 가득한 감탄사를 흘린 남자가 사윤과 건주를 번갈아 바라본 뒤 턱을 괸 자세로 입가를 가렸다.

“재밌는 거 하네, 한건주.”

그 말만큼은 여태껏 보았던 순진하고 무해한 느낌과는 다르게 와 닿았다.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미소를 짓는 남자에 사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건주가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눈앞의 남자는 한건주의 친구가 맞았다.

끼리끼리라는 말은 그가 아니라 제가 써야 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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