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9화. 진정한 인류의 악? (3)
“너 뭐야? 휴학했다더니 왜 여기 있어? 유학 왔냐?”
놀라움과 반가움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이에 팔이 붙들리고도 멀뚱히 서 있던 한건주가 작은 탄성을 흘렸다. 마치 누군지 몰랐던 사람의 이름이 이제 기억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 탄성의 의미를 파악한 건지 흑발의 남자가 입을 떡 벌렸다. 상당히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너 설마 나 잊었냐?”
어떻게 우정이 편하니, 새끼야. 서운하다는 듯 털어놓는 말에 한건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찰나의 움직임이었고 금방 씻겨 내려갔으나 가까이 있던 사윤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미약하게 뒤따라 붙은 한숨마저도.
딱히 친한 사이는 아닌 건가.
호들갑을 떠는 남자만 보면 둘이 막역한 사이로 보였는데 한건주의 반응을 보아하니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판단은 이후 한건주가 취한 태도에 또 긴가민가해졌다.
“여기서 다 보네, 최연우. 오랜만이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부드러워진 그가 반갑다는 듯 남자를 대했으니까. 한건주의 입꼬리가 유순하고 편안하게 올라갔다. 최연우라고 불린 흑발의 남자가 반색하며 한건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스킨십을 시전한 사람도, 받아 주는 사람도 익숙한 모양새였다.
“사람 놀라게 하고 있어. 왜 잊어먹은 척이야?”
“내가 너를 어떻게 잊겠어.”
“…훅 들어오네.”
“이렇게 특이하게 생겼는데.”
“시발.”
이성을 거치지 않고 튀어나온 욕설에 한건주가 웃었다. 최연우가 곧바로 헤드록을 걸며 응징을 가했지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아하하. 나긋하게 퍼지는 웃음은 듣기 좋았다. 발등 위로 못을 처박기라도 한 것처럼 제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사윤은 눈앞의 이들과 자신을 구분하는 선이 바닥에 그어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일상과 비일상.
정상과 비정상.
꼭 그렇게 나뉘어진 듯했다.
최연우를 대하는 한건주의 태도는 낯설었다.
“각성자가 됐다고? 시발 세상 존나 불공평하네. 너 그럴 거면 운동은 하지 마라.”
“갑자기 무슨 소리야.”
“키 크고 잘생긴 놈이 헌터인데 운동까지 잘하면 나 같은 놈은 뭐가 되냐고. 네가 먹이 사슬 꼭대기에서 내려올 생각을 안 하니 내가….”
“왜, 연우야. 너 괜찮게 생겼어.”
“…진짜냐?”
“세상은 넓고 특이한 취향을 가진 사람은 많으니까. 심미안이 있는 사람이면 널 알아보겠지.”
“이 새끼가 진짜.”
찌르면 찌르는 대로 길길이 날뛰며 반응하는 최연우란 사람 탓일까. 한건주가 유독 말이 많고 장난스러워 보였다. 물론 중간중간 지어 보이는 ‘좋은 사람’을 표방한 듯한 웃음은 가면인 게 대번에 파악되었으나 그게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한건주와 최연우의 분위기는 편안해 보인다는 게 머리를 후려쳤다.
가면이 뭐 대수인가.
매사에 솔직하고 투명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필요한 불화를 막기 위해서 가면을 쓰고 좋은 사람 행세를 하는 이도 있는 거다. 위선도 매순간 행하면 착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한건주가 저렇게 행동하더라도 늘 저런 식으로 이미지 관리한다면 그냥 유순하고 장난기 많으며 느긋한 사람이 되는 거였다.
자신의 옆에 있을 때와는 달라도 지나치게 다른 느낌에 적응을 못 하고 있으니 때마침 건주의 시선이 사윤에게 닿았다. 그를 따라 최연우의 시선 역시 사윤에게로 흘렀다.
“헉, 일행 있었냐? 넌 있으면 있다고 먼저 말하지. 괜히 나 멋쩍게 하려고…. 그 안녕하세요.”
하나에 집중하면 주변을 살피지 못하는 편인지, 뒤늦게 사윤을 발견한 최연우가 죄송한 마음을 가득 담아 고개를 숙였다. 어색한 인사를 받고도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최연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 제가 무시하려고 무시한 건 아니라 제가 원래 이런 성격이라 어허허.”
머쓱함에 억지웃음을 터트리는 게 누구랑 달리 아주 서툴렀다. 둘이 어떻게 친구가 됐나 싶은 수준이라 꽤 흥미롭게 지켜봤다. 혹시나 싶어 천재의 눈을 써 봤지만 지정 대상은 각성자가 아니라는 창이 떠올랐다. 순박하고 활기찬, 딱 스물세 살이라는 나이에 어울릴 법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한건주의 친구가 신기해 빤히 보고 있으니 이윽고 손 하나가 최연우의 어깨를 붙잡았다. 사윤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이고 있던 이의 몸이 뒤로 훅 끌려갔다.
“형 불편하겠다.”
한건주였다. 최연우의 등이 제 가슴팍에 닿도록 과격하게 당긴 그가 사윤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다. 최연우를 상대한 직후여서 그런지 저를 보는 시선에도 평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녹아들어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확실히 다르다.
제 옆에 두고 있을 때는 그가 철없고 세상 물정 모르며, 아집만 많은 애새끼로 보였는데 또래를 옆에 갖다 붙여 두니 홀로 눈에 튈 만큼 여유로운 느낌이 있었다. 애늙은이처럼 성숙한 느낌과 또 속내를 모르겠어 섬뜩한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이건 확실히 첫인상이랑 비슷하네.
한건주를 처음 만났을 때가 딱 이와 비슷했던 것 같다. 상념에 잠겨 있으니 한건주의 손을 뿌리치며 징그럽게 뭐 하냐고 성을 낸 우연이 다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계속 서 있기도 뭐한데 어디 들어가서 얘기하는 건 어떠세요? 사과라고 하긴 뭐하지만 제가 커피 사겠습니다!”
얘도 군대를 다녀왔나.
한건주에게선 느껴지지 않는 군기가 그에겐 콱 박혀 있었다. 감자처럼 동글동글해 보이는 뒤통수를 묵묵히 내려다보던 사윤이 입꼬리를 픽 끌어 올렸다. 옅은 웃음이 들렸던 건지 최연우가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사윤은 겁먹은 건지, 미안해하는 건지 모르겠는 남자를 향해 카드를 꺼내 보였다.
“어린애한테 얻어먹을 정도로 빈곤하진 않으니 카페로 안내하기나 해.”
그래도 자신이 한건주의 스승 같은 존재인데 그놈 친구에게 얻어먹는 건 너무 양심 없는 짓이었다. 집 나간 양심도 너무한 거 아니냐고 찾아올 수준이라 카드를 흔드니 눈을 빛낸 최연우가 모시겠다며 집사처럼 허리를 깊이 숙이고 카페로 향했다. 한건주의 친구가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깍듯한 성격이었다.
“성격 좋네.”
그리 중얼거리자 또 뭐가 불만인 건지 콧잔등을 찡그린 한건주가 사윤의 손목을 붙잡았다.
“카페로 가긴, 왜 가요? 곧 게이트 열릴 텐데.”
“아직 열리려면 여섯 시간 더 걸려.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며. 너도 회포 풀 시간은 있어야지.”
“그런 거 필요 없는데요.”
“형이 주면 좀 줄 때 받아, 예쁜아.”
카드로 가슴팍을 툭툭 두드리며 얘기하니 한건주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그가 사윤의 손목 위로 원을 덧그렸다. 간지러운 감촉에 사윤의 움직임이 멎었다.
“무슨 생각 해요?”
“음?”
“이상한 생각 하지 마요.”
“내가 뭘.”
한건주가 이상하게 여길 만한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꼭 자신을 망상에 푹 빠진 사람처럼 대하는 듯한 어투에 신경질적으로 받아치니 한숨을 내쉰 그가 사윤의 손목을 끌었다.
“제 말 안 잊었죠. 전 형 앞에서 제일 솔직해요.”
“…….”
독심술을 배워 왔나.
귀신도 놀랄 정도로 속을 꿰뚫어 본 듯한 발언이었다. 잠깐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던 사윤은 이내 알겠다는 말로 어르고 달래듯 한건주의 어깨를 토닥인 뒤 그를 끌고 카페로 향했다.
그가 최연우 앞에서 솔직하게 군다는 감상을 받아 멍하게 서 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솔직하게 굴지 않더라도, 그 가면 쓴 모습마저 편안해 보였기에, 또래 친구와 어울리는 한건주의 모습이 제 곁에 있을 때보다 더 안정적으로 보였기에 여러 생각이 치민 거였다.
자신의 곁에 있을 때의 한건주는 솔직한 만큼 그가 갖고 있는 불안함이나 무모함 등이 너무 투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한건주는 그걸 숨기려 들지 않았다.
언젠가는 사고를 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바엔 차라리, 지금처럼 가면이라도 씌운 채 안전하게 또 안정적으로 사는 게 낫지 않을까.
게이트가 열리기까지는 여섯 시간 하고도 오 분 정도가 남았다.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미래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사윤이 건주를 끌고 가는 손에 힘을 주었다. 허튼 생각을 안 하려고 하는데도 자꾸만 고개를 치미는 생각이 있다.
아니 그건 기실 생각이 아니라 어떤 확실한 사실이었다.
자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한건주는 조금 더 편안했을 것이고 행복해졌을 것이다.
네가 내 앞에서 솔직한 걸 좋게 받아들여야 하니.
반박의 말을 혀끝을 말아 건져 내고 앞서 걷는 최연우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편하게 대화하는 그 모습을 다시 눈에 담고 싶었다. 저를 만나지 않았을 때의 한건주가 어땠을지를 그려 보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을 만나지 않았을 때 지금 한건주가 어떤 모습일지를 그리고 나면, 그러고 나면.
…뭐가 달라지나.
설령 자신을 만나지 않은 한건주가 정말로 행복하고 완성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제 심경만 조금 변화가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자신은 진정한 인류의 악 성향을 지녔고, 게이트는 열릴 것이며 한건주는 제 조력자일 거였다.
사윤은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기분에 건주의 팔을 끌던 손에 힘을 풀었다. 손끝이 멀어지고 아래로 추락하려던 순간 한건주의 손이 다급히 사윤을 붙잡았다. 다시 접촉이 이어지고 피부가 맞닿는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땐 조금 창백한 인상의 한건주가 보였다.
그 얼굴 위에 선명히 떠오른 감정을 읽어 낸 사윤이 숨을 삼켰다.
아.
불안하구나.
너도, 나도.
곧 닥쳐올 미래가 어떨지 몰라 불안해하고 있구나.
소용돌이치던 감정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자각한 사윤이 고민하다가 한건주의 손을 더 꽉 잡아 쥐었다. 조금 전보다 더 거세게.
들어가려는 카페의 입구가 시커먼 게이트의 입구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