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8화. 진정한 인류의 악? (2)
하루가 고단했던 탓인지 아니면 숙소로 복귀하면서 긴장이 풀린 건지 씻고 나온 사이 한건주는 잠들어 버렸다. 사윤은 침대에 엎드린 듯한 자세로 고개만 돌린 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머리도 다 안 말리고 자는 건지 손가락 끝에 걸리는 머리카락이 차가웠다.
감기 걸리려고 이러고 자지.
어디 나가거나 바로 누워서 잘 생각이면 머리 좀 똑바로 말리라고 그렇게나 잔소리했는데도 안 지킨다. 처음 봤을 때도 그렇고 어지간히도 고집이 셌다.
그런 주제 겁은 또 많아서.
서리로 겁을 주었더니 놀라서 펄쩍 뛰던 한건주가 떠올라 킥킥거렸다. 시간이 빨리도 갔다 싶어 새삼스러운 감회에 젖어 이불을 끌어 올려 주는데 문득 앓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불편한 건지 미간을 좁힌 얼굴에 사윤의 시선이 닿았다.
“으으….”
악몽을 꾸는 걸까.
잠깐 건주의 상태를 관찰하던 사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피식 웃었다. 그가 왜 이리 끙끙 앓아 대는지 이유를 파악한 탓이었다.
“이러고 자니까 불편하지.”
베개도 없이 엎드려선 힘들다고 끙끙거리는 꼴이 퍽 바보 같았다. 아무리 신체가 유연하다고 해도 저렇게 목을 꺾고 자면 누구든 불편하다. 고민하다 건주의 몸을 돌린 사윤이 그를 자리에 바로 뉘어 주곤 머리 아래로 베개를 밀어 넣었다. 비로소 정자세로 잘 수 있게 된 남자의 얼굴이 조금은 편안해진다. 잘 때만큼은 본능을 따라가서 그런지 표정 변화가 참 솔직했다.
이불을 마저 올려 주곤 평온한 얼굴을 눈에 담았다. 주름이 잡히지 않아 매끈한 미간이 시야에 들어온다. 호기심에 매만져 봤으나 웬일인지 한건주는 미동도, 호흡의 변화도 없었다. 이만하면 깰 때가 됐는데도 말이다.
자는 척인가 싶어 시간을 두고 관찰해 봤지만 여전하다. 변하지 않는 맥박과 숨소리를 확인한 사윤이 건주 쪽으로 기울였던 몸을 바로 세웠다.
고요하다.
시계 초침 소리와 심신이 편안해지는 숨소리말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방은 침음에 잠기기 딱 좋게 조용했다. 눈꺼풀이 느릿하게 올라갔다가 내려가며 눈동자에 초점을 잡는다. 24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다양한 광경을 마주했던 눈이 이번엔 창문 사이로 들어온 새벽빛을 응시했다. 소란스럽지 않고 은밀해 사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였다.
고개를 젖혀 뻐근한 목을 스트레칭한 사윤이 숨을 깊게 내쉬었다. 게이트 생성 알림창은 마치 시한폭탄 알림이라도 되듯 시야 한 칸을 당당히 차지하며 숫자를 달칵달칵 넘기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20시간이다. 그 이후 열릴 게이트가 무엇이 됐든 당황하지 않도록 미리 대비해 두어야 했다.
압박하듯이 깜빡거리는 푸른 창에서 시선을 내린 사윤이 이불을 꽉 쥐었다. 손이 심심했다. 길드 건물이었으면 뱀이라도 매만지고 있겠는데 아쉽게도 여긴 미국이었고 생판 모르는 사람이 운영하는 호텔이었다. 한건주가 자고 있어 까마귀를 부르기도 여의치 않아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자연스럽게 라이가 생각났으나 생각보다 주변 정리가 오래 걸리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일에 연루된 건지 몰라도 이재희 쪽의 복귀도 늦어 하얀 펜리르는 그림의 떡이 됐다.
아쉬움을 삼키고 있으니 직전 한건주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스콜피언은 이제 완전히 끝난 거예요?’
‘그건 놈들의 은신처까지 들어가 봐야 확실해져. 거기에 권력을 쥔 다른 놈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애초에 이거로 끝날 새끼들이 아니야. 바퀴벌레처럼 돌아오는 꼴을 보기 싫으면 이번 기회에 확실히 처리해서 씨를 말려야지.’
‘사막의 형벌은요.’
‘상황이 정리되면 회수해야지. 거기 밑에 묻어 두면 누군가는 용을 써 캐 갈 테니까 우리가 손수 쳐야 하지 않겠니.’
‘이겨도 끝이 아니네요.’
‘끝이 아니지.’
질긴 놈들이라 덧붙이니 한건주는 돌아가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곤 하는 말이 퍽 기특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1인 길드가 아니라 제대로 된 길드를 세워서 나를 도왔을 거라고….”
그가 했던 말을 곱씹어 중얼거린 사윤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래서 자식을 키우나 보다. 아직 보고 있으면 불안한 점도 많았고 못 미더운 점도 많은 놈이었지만 어느 정도 컸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간 크고 대가리 크고 한 게 아니라, 나름대로 등 정도는 맡길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도움을 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젠 제가 준 만큼 받을 수 있게 된 거였다.
그 사실이 사윤은 조금 얼떨떨했다. 체감은 망령의 늪에서도 했는데 스콜피언을 상대하고 나니 부정도 못 하게 확실해졌다. 그가 훌쩍 성장했다는 게. 이제는 정말로 더는 품에 안고만 다닐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그의 입으로 말했던 것처럼, 한 길드의 수장이 되길 자처할 수준의 실력을 지녔으니까.
“한경진이 왜 그렇게 보는지도 이해가 되네.”
원래도 그런 놈이었지만 최근 들어 특히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무척 불손해졌다. 한건주를 지극히 챙기고 있으면 염병이라는 말을 중얼거렸고 한건주가 이상하다는 말을 하면 사춘기라서 그렇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그에 순간 혹해 ‘진짜인가?’ 하고 의심했을 때 경진의 반응은 가관이었다. 뭐라고 했더라. 아흔이 되고도 애새끼라며 옆에 끼고 살지 그러냐고 했나. 편하게 대해 줬더니 겁을 잃은 것 같아 사윤은 멋진 일거리를 만들어 그에게 안겨 주었다. 그때 경진이 지은 표정이 어찌나 우습던지.
반사적으로 웃던 사윤이 잠든 이의 얼굴을 내려다보곤 숨을 삼켰다. 사실 안다. 한경진의 말은 틀린 거 하나 없었다. 스물셋이면 아직 애였지만 그래도 성인이긴 성인이었다. S급 각성자고 1인 길드를 세워 노아에 들어올 정도면 한건주도 더는 세상 물정 모르는 B급 헌터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첫 만남 6초에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이 결정된다고 사윤은 아직도 한건주가 B급처럼 느껴졌다. 그게 아니라는 걸 이번 스콜피언과의 싸움에서 여실히 느끼고 나니 기묘한 상실감이 찾아왔다.
아직 가르쳐 줄 게 많긴 했으나 하나둘 가르치고 나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더는 손에 쥐고 있는 게 없을 것 같았다. 한건주의 성장이 빠른 편이었기에 더 그랬다.
조금 천천히 커도 좋았을 텐데.
이제야 종식이 열심히 보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부모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됐다. 동시에 괘씸한 감정이 들었다.
도망치는 것만 제대로 잡았어도 어리둥절해하는 한건주를 골려 먹을 시간이 더 많았을 텐데 그가 도망쳐 버려 그 많은 기회를 잃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잠든 얼굴을 노려보고 있으니 잠든 와중에도 예리한 신경이 빛을 발한 건지 그가 몸을 뒤척였다. 조금 어이없는 심정이 된 사윤이 걸터앉아 있던 침대 위로 완전히 올라가 침대 헤드 쪽으로 몸을 기대었다.
밤쥐의 수장이 되고 한평생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간만에 갈증을 느꼈다. 조급함도 느껴졌다. 이대로 있으면 따라잡힐 것 같았고 곧 제 바닥이 드러날 것 같았다. 그리되지 않으려면 제가 그를 성장시키는 만큼 저 역시 성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성장으로 가는 이정표일까.
<특수 게이트 ‘진정한 인류의 악?’의 생성까지 19시간 49분 23초>
아니면 주어진 절망에서 더 깊은 수렁으로 가는 무저갱일까.
눈동자가 어둠 속으로 깊이 가라앉았다. 왜 하필 나였을까 하는 생각은 열여섯 살 때부터 최근까지 지긋지긋하게 해 와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 해묵은 의문의 대답이 저 게이트로 들어가면 있을까 싶어 입을 달싹이던 사윤이 이내 인상을 찡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희망적인 생각은 위험하다. 늘 최악을 가정해야 도움이 된다. 그래야 차악을 맞아도 안도하게 될 상황이 오니까. 습관대로 머리를 굴리던 사윤은 게이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당황해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말자고 속으로 되뇌었다.
이미 너무 많은 꼴을 보여 줬으니까.
무심결에 뻗은 손이 한건주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그사이 머리가 말라 손끝이 건조했다. 곱게 잠든 얼굴을 응시하다가 되뇌는 말에 한 문장을 추구했다.
무얼 보더라도 네가 놀랄 일이 없었으면 한다.
자신이 의도한 위험은 괜찮았다. 예컨대 필드에서의 일이라든가, 자신이 들어가자고 해서 들어가게 된 일은 괜찮았다. 하지만 이번처럼. 망령의 늪 때처럼 의도하지 않은 위험은 한건주에게 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 일이 잦아지면 자신은 필연적으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
그의 행운이 저를 만나 갉아먹혀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최근 들어 종종 하는 생각이었다.
한건주를 수단으로 인지했던 초기와 달리 이제 사윤에게 그는 수단이 아닌 사람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자신이 그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에 대해 고민해 볼 수밖에 없었으니. 그런데 그 영향이 죄 악영향뿐인 것 같아 표정이 흐릿해진 사윤이 속으로 한 번 더 되뇌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건주는 괜찮길 바랐다. 이 기도는 이루어질 것이다. 자신의 기도는 옛적부터 더럽게 안 이루어졌지만 한건주는 그래도 시스템이 아끼는 존재였으니까.
그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으니.
불안을 떨치며 건주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던 사윤이 문득 입을 열었다.
“나 만나기 전엔 어떻게 살아왔냐.”
순전한 궁금증이었다. 지금 한건주의 삶은 솔직히 말해서 아무리 좋게 포장해 보려고 한들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그를 건들기 전엔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의문이라 중얼거린 사윤이 달을 바라보며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의문은 날이 밝고 나서 풀렸다.
“한건주?
말이 씨가 된다고 게이트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게이트가 열리기 전 바깥 구경이나 많이 해 두자는 한건주의 설득에 넘어가 걷게 된 거리에서 그의 친구를 만난 까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