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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37)화 (237/266)

제237화. 진정한 인류의 악? (1)

…퀘스트가 완료됐다고?

앞이 안 보이는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뻗은 손이 실체를 갖고 있지 않은 반투명한 퀘스트 창을 훑는다. 손이 허공에서 미끄러졌지만 푸른 창은 사라지지 않는다. 허상이 아니었다.

갑자기 왜?

혼곤한 정신을 다잡은 사윤이 몽롱한 눈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한건주와 A급 이상의 게이트를 클리어하라는 게 두 번째 퀘스트였고 그와 함께 아델리아의 무덤을 공략한 게 벌써 한 달 전이었다. 그런데도 한참이나 뜨지 않길래 시스템이 그럼 그렇지 싶어 오류로 치부하고 넘겼다.

어쩌면 뜨지 않길 바랐던 건지도 모른다. 생각이 복잡했으니까.

저항하는 자를 활성화한 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가 방향키를 잡은 게 최근이었는데 또다시 난제가 들이닥쳤다.

그것도.

‘실패 시: 저항하는 자 성향 삭제’

무척이나 까다로운 난제가.

“형님, 왜 그래?”

적의 우두머리를 처치한 사윤으로 인해 격전이 펼쳐지던 곳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 정적을 깨고 승리를 선포해야 할 사윤이 멍하게 있어 다가온 경진이 어깨를 붙잡았다. 그런데도 미동도 하지 않은 사윤은 푸른 알림 창에 시선을 박아 두다 한 남자를 찾았다. 한건주. 그 역시 허공에 뜬 퀘스트 창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용은 읽히지 않았지만 자신과 같은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던 게 그였으니 아마 동일한 내용일 거였다.

무심코 흘린 시선을 다시 돌린 사윤이 손을 들어 시스템 창을 조작해 퀘스트 목록을 확인했다. 완료된 퀘스트에서 ‘활성화를 위한 두 번째 걸음’ 지령을 누르자 이전 퀘스트의 내용이 떴다. 기억에서 배제됐던 문장이 보인다.

‘우호적인 관계를 증명하세요.’

이거였나.

깨달음과 함께 의문이 찾아왔다.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한건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게 주된 목적이었다면 왜 이제야 창이 뜬 것일까.

아델리아의 무덤에서 그와 자신이 우호적이지 못한 관계였나?

그럴 리가.

자신은 그를 구하기 위해 아델리아의 무덤에 들어섰고 그 역시 저를 서포트하며 게이트를 클리어했다. 어딜 봐도 적대심은 없었다.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 건주를 바라보았다. 용신체의 지속 시간이 끝나 다시 시커멓게 물들고 있는 사윤의 눈이 당황한 저와 달리 생각만 깊어 보이는 남자를 품는다. 미간을 좁힌 사윤이 머리를 헝클였다. 예고되지 않은 상황이라 생각이 정돈되지 않았으나 물어봐야 할 건 확실했다.

“한건주.”

“네.”

“너한테도 떴어?”

“네.”

주어가 빠진 문장이었으나 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가 자신과 같은 것을 봤다는 증거였다. 예상했던 상황이었으나 확답을 들으니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도 그럴 게 이번 퀘스트로 주어진 것이 진정한 인류의 악 게이트를 클리어하라는 것 아니던가.

“진정한 인류의 악 게이트. 이거 네 퀘스트에 나온 거 아니니.”

그가 저를 알고자 했고, 그래서 시스템의 제안을 수락하고 받은 퀘스트 보상에 있던 게 지금의 게이트였다. 그가 해 준 이야기에 따르면 진정한 인류의 악은 한건주가 퀘스트를 완료해야 생성되는 거였는데 왜 자신의 보상으로 주어졌을까?

앞뒤가 안 맞는다. 그때 불현듯 머릿속이 번뜩였다.

설마.

사윤의 눈이 날카로워졌고 뻗어진 손이 건주를 낚아챘다. 힘을 주는 대로 끌려온 남자와 눈이 마주친 사윤이 이를 으득 갈았다.

“너 이재희랑 들어갔다던 게이트. 여기니.”

“……?”

의문스러워하는 눈동자는 진실해 보였다. 그러나 사윤은 드리운 의심을 쉽게 걷어 낼 수 없었다. 제가 그에게 어디 한두 번 당했던가.

안 그래도 게이트 하나 들어갔다 나왔다고 L급 스킬을 개방시켜 나온 게 의아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게이트가 진정한 인류의 악이라면? 그래서 그림자 지배 스킬을 보상으로 개방한 거라면?

그리 생각하면 얼추 앞뒤가 들어맞는다. 시스템이 자신과 엮어 직접 내 준 퀘스트라면 그저 그런 것을 보상으로 내주지 않았을 테니까.

제 예측이 맞을 경우 결국 한건주는 제게 또 거짓말을 한 거였다.

속이 들끓었다. 그가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화가 난 건지 저 빌어먹을 ‘진정한 인류의 악?’ 게이트에 화가 난 건지 스스로도 혼란스러웠다.

만약 들어간 게 맞다면, 그 안에서 뭘 봤어.

묻고 싶은 말은 혀끝에서 걸려 나오질 않았다. 대신 멱살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셔츠를 찢을 듯 움켜쥠에도 한건주는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는데 그것이 사윤의 눈엔 정보를 먼저 독점한 자의 여유로 보여 이가 갈렸다. 상대의 말문이 트인 건 숨 막히는 정적이 체감상 10분이나 흐른 뒤였다.

“저 아니에요.”

부정하는 목소리는 차분하다.

“아닌 거 알고 있잖아요. 제가 게이트에서 나온 걸 형네 직원들이 봤는데 왜 의심해요? 그리고 위치 추적, 그거 저한테 달아 놨다면서요.”

따지는 듯한 말에 대고 차마 그건 네 몸이 아닌 네 가면에 처박아 둬서 완전히 신용할 수 없다고 얘기할 순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얼굴 근육의 움직임을 살핀 사윤이 목소리를 낮게 조절했다.

“아니라고.”

“네.”

“…그런데 왜 나한테 이 게이트가 넘어와?”

“제가 퀘스트를 클리어한 건 맞아서요.”

“뭐?”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굴어 놓고 내뱉는 결론은 딴판이었다. 미간에 힘줄이 돋았다. 멱살을 잡아끄는 손길이 더 거칠어지자 경진이 달려와 사윤의 손을 붙들었다.

“싸울 거면 때와 장소 좀 가려 주라, 어? 제발!”

적들 앞에서 폼 잡지 못할망정 뭐 하는 짓이냐는 타박은 합리적이었다. 다만 그 합리적인 핀잔을 오롯이 받아들일 만큼 진정한 상태가 아니라 눈을 부라리자 침을 꼴깍 삼킨 경진이 물러났고 그 배턴을 옌이 넘겨받았다. 순차적으로 일을 처리해야 되지 않겠냐며 어깨동무를 하고 너스레를 떠는 이를 신경질적으로 응시한 사윤이 사위를 살폈다. 살아남은 스콜피언 놈들이 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사사건건 도움 안 되는 새끼들 같으니라고.

안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자신이 그렸던 적보다 훨씬 미약한 스콜피언에 찝찝하던 참이었다. 마음에 드는 점이라곤 조금도 없어 옌과 경진에게 뒷정리를 명한 사윤이 건주를 끌고 라이의 등 위에 올라탔다. 턱짓하자 이재희가 알아서 라이를 보내 주었다.

펜리르의 등에 타서 도시를 가로지르는 동안 아무런 대화도 흐르지 않았다. 사윤은 이 정적이 어딘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필드에서 그가 제게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자신이 외면했을 때와 꽤 비슷한 상황이다.

시발, 쳇바퀴.

벗어난 것 같다 싶으면 자꾸만 예전의 상황이 되풀이된다. 과거에는 외면으로 덮어 두었으나 이젠 그게 누구의 문제인지 알 것 같아 라이의 털을 꽉 쥔 사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숙소의 문을 과격하게 열어젖혔다. 짖어 대는 라이를 문 뒤에 놔두고 들어가 끌고 온 상대를 침대로 옮겼다. 마음 같아선 내팽개치고 싶었지만 그가 사윤을 아는 만큼 사윤 역시 한건주를 얼추 알았다. 여기서 더 험악하게 굴면 그 태도를 핀잔하느라 대화가 샛길로 샐 거였다.

“말해.”

침대에 그를 앉혀다 두고 소파를 끌고 와 마주 앉았다. 갑자기 나타난 퀘스트 클리어 창과 진정한 인류의 악 이름을 지닌 보상, 게이트를 클리어하지 못할 경우 저항하는 자 성향이 영구적으로 삭제된다는 알림이 한건주와 무관할 것 같진 않았다.

“왜 이리 과격하게 굴어요? 이거 침대에 안 던져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한건주.”

“…….”

“내가 지금 말장난이나 하자는 것처럼 보이니.”

차가운 음성이 과열될 듯한 분위기를 싸늘하게 식혔다. 허튼 말을 받아 줄 여유가 없었기에 경고 후 입을 다물자 생각하는 듯 눈을 옆으로 굴렸던 이가 두 손을 마주 잡고 상체를 숙였다.

“새로운 성향을 얻었어요. 근데 정상적인 루트로 얻은 보상이 아니라서 형 눈엔 안 보일 거예요. 스킬 볼 수 있는 능력 있잖아요, 형.”

천재의 눈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사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건주가 그림자 지배를 얻고 나왔을 때 확인해 본 그의 상태 창에 있는 성향은 여전히 천상천하 유아독존뿐이었다.

“그래서.”

“제 새로운 성향이 뭔지 안 궁금해요?”

“그걸 내가 알아야 하니.”

“알아야 하실걸요. 제가 보기엔 형이랑 관련 있는 것 같거든요.”

확신하는 듯한 어투였다. 사윤의 눈이 의혹으로 가늘어질 때 망설이는 건지 때를 기다리는 건지 모르게 뜸을 들이던 이가 입을 열었다.

“조력자예요. 제 새로운 성향. 망령의 늪에서 활성화됐어요.”

“…거기서 퀘스트를 끝냈다고?”

“정상적인 루트는 아니었지만 뭐 일단 끝냈다고 하더라고요.”

“자세히 설명해.”

심기가 불편해 흘러나온 말이 딱딱했다. 그런데도 익숙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유지한 이가 평소의 덤덤한 음성을 흘렸다.

“형을 돕고 싶다고 생각했더니 활성화됐어요. 조건을 충족해서 퀘스트가 조기 달성됐다는 알림이랑 함께. 그래서 보상이 조율돼 성향만 먼저 얻었고, 진짜 보상은 게이트를 클리어해야 얻을 수 있다고 하던데 그 게이트가 제가 보기엔 이거 같거든요.”

톡톡. 곧게 뻗은 손가락이 허공에 떠 있는 퀘스트 창을 가리켰다. 사윤은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하는 말, 묻고 싶은 것이 뒤엉켜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유지했다. 그 표정을 눈에 담은 남자가 손깍지를 풀었다가 다시 엮길 반복하다 말을 이었다.

“제가 보기엔 시스템이 어떻게든 저랑 형을 엮어 보려는 것 같거든요. 형한테 성향자를 찾으라고 했을 때도 그렇고 저한테 시스템이 직접 말을 걸었을 때도 그렇고. 그냥 심심해서 그런 짓을 하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저는 시스템이 제가 어떤 역할을 맡아 주길 바라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역할이 이번에 나온 성향인 것 같고.”

라디오처럼 잔잔하게 흘러나온 말들은 평온한 음성과 달리 사윤의 머릿속을 죄 헤집어 놓았다.

“저항하는 자.”

그 말에 줄곧 가만히 있던 사윤이 움찔거리며 반응했다. 건주가 그런 사윤을 유심히 관찰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성향이 괜히 생겼다고 생각해요? 저한테 조력자 성향이 뜬 건 우연이고요? 제 생각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엮일 수밖에 없어요.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형한테 저항하는 자를 띄우고 저한테 조력자를 띄운 시스템이 우리가 같이 있길 원하는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말끝을 늘어트리며 사윤의 앞에 선 이가 소파에 앉은 사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앉는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봐야 했던 시선의 각도는 조금씩 내려와 수평이 되었고 이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볼 정도가 되었다. 기껏 푹신한 곳으로 그를 옮겨다 놨건만 바닥에 앉기를 자처한 이가 소파에 늘어져 있던 피 묻은 손을 붙잡았다.

“형한테 득이 된다면 이용해요. 이용당해 줄 테니.”

“…….”

“쓸데없는 생각으로 게이트에 들어가길 망설이지 말고 괜히 재고 따지지 말고 나를 이용해서라도 그 성향을 얻어 내라는 소리예요. 의심할 필요도 없어요. 제가 원해서 얻은 역할이 그거니까.”

덧붙이는 말과 함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격정적인 감정이 모두 해일에 휩쓸려 가라앉은 것처럼 고요해지고 남은 건 무어라 정의하기 힘든 혼란뿐이었다. 사윤은 종용하는 이를 보다가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

얼핏 미련하다고 탓하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에 한건주가 피식거렸다.

“말했잖아요. 저는 형을 살리고 싶다고. 저항하는 자 성향이 제 계획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형이 그 성향을 얻을 수 있도록 도울 생각이에요. 그리고.”

그리고?

사윤의 고개가 기울어지자 잠시 음, 하고 목을 진동시킨 이가 가늘게 웃었다.

“그냥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미묘한 대답이었다.

순간적으로 그 웃는 얼굴 위로 누군가가 비쳐 보이는 듯했던 전투의 후유증인 건지 삐, 하고 울려 대는 이명과 두통에 눈을 감았다.

<특수 게이트 ‘진정한 인류의 악?’의 생성까지 22시간 38분 42초>

직전에 본 시스템 창의 문구가 감긴 시야에 오랫동안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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