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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36)화 (236/266)

제236화. 전갈 사냥 (9)

경박하다고 느껴질 만큼 가벼운 걸음과 달리 내려앉는 그람은 묵직하고 차가웠다. 화룡이었으나 서리 지대에 갇혀 화염을 잃은 용, 공허하다 못해 빈자리에 시리도록 차가운 냉기가 들어차 미쳐 버린 광룡 파프니르 수명을 머금은 새하얀 검이 허공을 내리긋는다.

다섯 개의 칼날이 생성되었다. 용의 발톱처럼 날카로운 그것이 지정 대상을 할퀴고 지나가자 스콜피언 놈의 용신체에 피가 흘러내렸다. 피부 위로 용의 비늘이 돋아나는 감각이 소름 끼친다. 묘한 쾌감을 동반하는 신체의 변화에 사윤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기분이 꽤 좋았다.

이름을 물어볼 만큼.

“찰스였나 베릭이었나….”

기억 속에 가물거리는 이름의 흔적을 되뇌며 아래로 떨구었던 검을 들자 용들의 상징인 하얀 피를 흘린 상대가 표정을 구겼다.

또 틀렸나 보네.

이젠 익숙한 반응이라 사윤이 검을 휘둘렀다.

“이름을 틀렸으면 듣기라도 하든가…!”

기가 막힌 심정을 토한 이가 검을 들어 공격을 막았다. 사윤이 길고 날카롭게 빠진 장검을 쓴다면 스콜피언 놈은 두껍고 넓적한 대검을 사용했다. 검의 넓은 면으로 몰아치는 참격을 받아 낸 그가 사윤을 향해 뛰어들었다. 동시에 사윤 역시 안쪽으로 한 발 들어섰다.

걸음은 일 보였으나 이동 범위는 그 이상이다. 제대로 손질하지 못해 다소 길게 내려온 사윤의 머리카락이 뒤로 휘날리며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순식간에 상대방의 코앞까지 진입한 사윤은 휘두르는 검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검이 어깨를 내리찍도록 기꺼이 팔을 바치고 대검이 휘둘러져 허점이 생긴 상대의 급소를 노렸다.

“이래서 내가 대검은 잘 안 써.”

충고하듯 읊조린 사윤이 양손으로 검을 크게 휘두르느라 적나라하게 드러난 가슴팍부터 목까지의 부위를 장검으로 그어 내렸다. 사선으로 휘둘러진 검은 거리가 거리인 만큼 깊게 파고들어 갔다. 자칫 잘못하면 단번에 목을 베어 낼 정도로.

그걸 노리고 일부러 깊게 파고든 거였다.

용살검을 든 만큼 전투를 길게 끌어 봐야 좋을 게 없었으니까.

[용살검 그람(신기)]

‘가장 신에 가까운 미물은 용일지니. 그 존재를 해한 자에겐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깃들 것이다.’

-전설 속 파프니르를 베어 낸 신기 그람입니다. 용종을 상대할 시 모든 스탯이 20% 상승합니다.

-용의 피를 먹을수록 그람의 효과는 2배가 됩니다. 최대 8중첩까지 허용.

-용살검의 소유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사용 시간 1분당 체력이 10% 하락합니다.

* 거래 불가

용살검 그람.

신기인 만큼 그 능력이 뛰어난 무구였으나 사윤이 웬만해선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그람의 특성 때문이었다. 모든 효과가 용종을 사용할 때만 발휘되는 데다 좋은 효과만 있는 것이 아닌 저주 효과도 있었다.

1분당 10%의 체력을 바쳐야 쓸 수 있는 검.

일종의 버서커나 다름없는 무구였다.

그러니 단순 계산으로 따져 보면 그람을 들고 싸울 수 있는 시간은 최대 10분이다. 그 안에 공격받는다면 그보다 더 줄어들 것이고. 물론 체력이 다 떨어지면 즉시 부활할 수 있는 게 사윤이었으나 문제는 페어링이었다. 즉사가 아니기에 자신의 체력이 떨어지는 걸 한건주가 볼 수 있었고 녀석의 성격상 제 체력이 떨어지는 걸 보면 무리해서라도 체력을 공유해 줄 게 뻔했다.

자신이 죽어도 되살아는 걸 알고 있는데도.

최대한 죽이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든 살리려고.

그러니 그때도 그런 표정을 지어 보인 거겠지.

생각하니 다시 심장 부근이 답답하게 뻐근해졌다. 사윤은 인상을 찌푸리며 손목을 틀었다. 그람이 더 깊게 적의 몸을 파고들 수 있도록. 그리하여 더 많은 피를 흡수할 수 있게.

최대한 빨리 끝내야 했다.

그리고 그럴 자신이 있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애초에 그람을 꺼내지도 않았을 테니까.

“커헉!”

사윤의 한쪽 어깨가 대검에 절단되는 것과 동시에 그람이 스콜피언 놈의 목 끝까지 파고들었다. 눈을 홉뜬 놈이 피를 토하며 사윤에게서 벗어났다.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쫓아간 사윤이 서리 스킬을 사용했다. 서리의 주인은 본래 사윤이 아닌 광룡 파프니르였다. 녀석의 신체를 빌려 온 지금은 평소보다 더 강한 화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쩌어어억!

한순간에 온 땅이 얼어붙으며 도망치던 스콜피언 놈의 발목을 붙들었다. 경악한 눈이 마주쳤고 희미하게 익숙한 얼굴 위로 옛적의 기억이 떠올랐다.

놈의 얼굴은 총 세 번 보았다.

밀레를 구하러 갈 때 한 번, 녀석들과 1차전을 치렀을 때 두 번, 데른을 처치했을 때 세 번.

그만큼 질긴 인연이었으나 끊어 낼 때가 되었다.

자신은 더 이상 데른을 막 해치웠던 어리숙한 청년이 아니었고 그들 역시 극악무도했던 옛날의 스콜피언이 아니었다. 모두가 과거의 잔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흘러가야 할 때다.

사윤이 잠깐 사이 멀리도 달아난 놈을 향해 도약하자 등이 얼어붙으며 얼음으로 된 날개가 뻗어 나왔다. 화려해 보이지만 용신체의 부작용이다. 본래 없었던 기관이 새롭게 생기면 기형이 오는 것처럼 용신체로 몸이 변하면 변할수록 그 리스크는 커졌다. 오래 싸울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였기에 단숨에 놈의 앞을 차지한 사윤이 검을 휘둘렀다.

카아아아앙!

거대한 충돌음이 울려 퍼진다. 스콜피언 놈이 입술을 비틀었다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뭣들 해, 새끼들아!”

왈패 같은 외침에 홀린 듯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스콜피언의 잔당들이 화들짝 놀라 움직였다. 그러나 동료는 그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신경 쓰지 말고 처리하고 와, 형님!”

상황에 맞지 않는 상큼한 목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단말마 신음이 연주되었다. 옌의 짓임을 안 사윤이 맞닿은 대검을 노려보며 눈에 힘을 주었다. 서리의 기운이 밀집된다. 심장에 냉기가 서리는 게 느껴지는가 싶더니 상대의 대검이 얼어붙었다. 틈을 놓치지 않고 손에 힘을 주었다.

카가각!

그람이 대검을 갈라 낸다. 묵직한 검에 금이 그어졌을 때 용신체를 붙들고 있던 얼음이 깨지며 녀석이 위로 튀어 올랐다.

“시발!”

전력의 차를 실감한 건지 낭패라는 기색을 숨기지 못한 남자가 욕설을 지껄이며 달려들었다. 상대가 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덤벼드는 꼴이 불나방 같아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적이 우스워서가 아니라 자신이 우스워서.

그토록 과거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밀레를 향한 지원을 거두고, 스콜피언이란 이름을 밤쥐로 덮어 두었으면서도 결국 가장 의식하고 있던 건 자신이었다.

한건주에게 흉악한 놈이라느니 집단 쓰레기라느니 도를 넘은 범죄 집단이라느니 온갖 무게를 잡으며 말했는데 정작 마주한 놈들의 본체는 형편없었다.

형체 없는 것을 향한 두려움이 으레 이와 같았다.

막상 직면해 보면 별거 아닌데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약하지 않나.”

공격은 몰아쳤으나 대검인 무구가 낯부끄러울 정도로 일격에 실린 힘이 가벼웠다. 검이 부서질까 봐 조심하는 건지 아니면 의지를 잃은 건지 모르겠다. 그저 격분만 남아 마구 휘두르는 검은 막 각성한 헌터가 살고자 몬스터를 향해 눈 감고 휘두르는 검과 다를 게 없었다.

그 정도로 꼴사납다는 얘기였다.

사윤은 세로로 찢어진 상대의 눈을 마주했다. 그 안에 비친 감정이 보인다. 두려움과 분노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되살아나려 한 건 데른인 줄 알았는데 망령은 눈앞에 있었다.

밀레.

네가 이걸 봤어야 했는데.

너무도 어이없어 공격을 받아 흘리고 있으니 제가 맹공을 방어하는 데 급급해 역습하지 못한다고 착각한 건지 놈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네가 아무리….”

목이 찢어지고 상처가 났는데도 억지로 소리를 내 듣기 싫은 걸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눈살을 찌푸린 사윤이 팔꿈치를 굽히고 검의 손잡이 쪽으로 녀석의 턱을 밀어 올렸다. 큰 힘을 들이지 않은 동작이었지만 신체가 용신체인지라 바닥에 있던 상대가 순식간에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를 따라가듯 땅을 박차고 위로 오른 사윤이 허공답보를 사용해 공중을 디뎌 상대의 머리꼭지를 응시했다.

올라가던 상대를 따라간 거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의 각도는 어느새 스콜피언 놈을 내려다볼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 모습을 마주하고 나서야 사윤은 왜 그의 이름을 듣지 않은 건지 깨닫게 됐다.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거다.

이전에는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제대로 듣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의식할 대상이 아니었던 거다.

남은 체력은 절반이었고 오른쪽 팔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상태였다. 끝을 볼 만해 목이 덜렁거리는 상대를 내려다본 사윤이 검을 들어 올렸다.

“사냥이 아니었네.”

기대와 달리 감흥이 없어 낮게 중얼거리고 공중에서 무릎을 굽혔다가 상대를 향해 수직으로 낙하했다. 그람의 칼끝이 녀석의 머리를 노렸고.

푸욱!

그대로 꽂혀 들어갔다.

추락이 이어진다. 땅이 가까워지는 걸 보면서 사윤은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에 혀를 찼다. 시원시원할 거라 생각했는데 깨끗하지 않은 결말이라 오히려 찝찝했다.

콰아아앙!

마침내 사윤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땐 잔떨림도 없이 숨을 거둔 남자와 바로 선 사윤만이 모두의 시선 끝에 놓였다.

“…….”

용종이 죽어 특수 효과가 종료된다는 알림창을 멍하게 보고 있으니 누군가 팔을 매만지는 게 느껴졌다. 잘려 나간 어깨 쪽이라 고개를 돌리니 한건주가 제 팔을 들고 어깨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포션을 붓자 그대로 살이 붙는다. 대검이 깔끔하게 팔을 절단해 준 덕분에 뜻밖의 이득을 봤다.

서서히 붙어 가는 어깨를 보고 있으니 건주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이었다.

<‘활성화를 위한 두 번째 걸음’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음 퀘스트를 진행하세요! (º □ º l|l)>

[퀘스트 – 활성화를 위한 세 번째 걸음]

종류: 저항하는 자 퀘스트

진행 인원: (2/2)

‘성향 보유자와 협력해 지정 게이트를 클리어하세요.’

상세: 천상천하 유아독존 성향을 보유한 각성자와 지정 게이트 ‘진정한 인류의 악?’을 클리어하세요.

보상: 활성화를 위한 마지막 걸음 진행 가능

실패 시: 저항하는 자 성향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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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 게이트 ‘진정한 인류의 악?’의 생성까지 23시간 59분 5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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