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34)화 (234/266)

제234화. 전갈 사냥 (7)

“왜 그래요?”

“…….”

성대에 칼이 꽂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의 얼굴에서 흘러내린 안대 자락이 손등을 간지럽힌다. 호흡이 버거워져 밭아진 숨이 귓가를 울렸고 익숙한 체향이 코끝에서 맴돌았다. 모든 게 익숙하다. 지금의 체온도, 당황한 목소리도, 간헐적인 숨소리도. 한건주 특유의 싸늘하고 맑은 향까지. 그 수많은 익숙한 것 중 낯선 것, 하나. 그 하나가 심장을 곤두박질치게 해 사윤은 건주의 머리를 끌어안은 손에서 힘을 풀지 못했다.

잘못 본 건가.

그랬으면 했다. 확인하고 싶었으나 차마 그를 밀어 내고 다시 눈을 마주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이명이 울리고 많은 음성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사윤아.’

익숙한 것, 익숙한 것, 익숙한 것.

그리고, 그리운 것.

‘안에 들어가서 꼼짝도 하지 말고 있거라.’

‘우리 사윤이. 눈 잘 감고 있을 수 있지? 무슨 소리가 들려도 나오면 안 돼.’

‘죄송해요.’

‘…사윤아.’

‘형님.’

쿵쿵.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들린다. 제 것인지 건주의 것인지 구분이 안 돼 사막에 떨어졌다가 물 한 방울을 발견한 사람처럼 갈급하게 숨을 삼켰다. 차라리 제 심장이 빨리 뛴 거였으면 했다. 이 심장 박동이 한건주의 것이라면, 이 박동이 직전에 본 감정에 수반되는 반응이라면 자신은 견뎌 낼 수 없었다.

툭.

맺혔던 식은땀이 흘러내려 떨어진다. 왜 그래요. 한 번 더 걱정이 가득한 음성이 들렸으나 사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잘못 본 걸 거다. 그래야만 했다. 설령 제대로 본 게 맞더라도 잘못 본 거로 만들면 된다.

그래야만….

“…네가 살아.”

“네?”

“일단, 일단 나가자.”

“형?”

누구에게 하는 건지도 모를 말을 무언가에 홀린 이처럼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딱히 바라볼 경치도 없게 사방이 콘크리트며 잔해다. 빠져나가려면 옌이나 다른 인물들의 동사나 죽음을 각오하고 건물 전체를 얼려 구멍을 뚫어야 할 것 같았다. 2차 붕괴 한 번으로 죽어라 벽을 깎아 냈던 모든 수고가 무너져 내렸다.

시발. 상황이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다.

“형. 형, 이것 좀 놔 봐요.”

숨만 헐떡거리고 있자, 이 상황이 답답한 건지 붙들린 한건주가 버둥거렸다.

“얌전히 있어.”

냉정하다 해도 좋을 정도로 차가운 음성이 튀어나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건지 몸부림치던 남자의 움직임이 얌전해졌다. 그러나 입까지 얌전해진 건 아니었다.

할 말이 있다는 듯 몇 번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고 그마저도 힘이 들 만큼 열악해진 대기 상태에 앓는 소리가 한 번 퍼졌다. 그의 답답한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반응이었지만 사윤도 나름대로 착잡한 상황이었다. 양보하지 않으니 체념 섞인 한숨이 건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좋아요.”

그 말에 사윤이 표정을 구겼다.

“시발.”

마음대로 하라는 건주의 뒷말이 따라왔지만 제 목소리에 함께 묻히며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좋다는 그 말만이 귓가에서 메아리치는 듯해 표정이 일그러진다. 도피하고 있다는 걸 안다. 잘못 봤다는 판단은 현실 도피에 불과한 합리화라는 것도 안다. 직전 그의 눈동자에서 확인한 감정은 부정할 수 없이 애정의 전조였다.

자신을 잃을까 싶어 생성된 걱정과 불안이 드러낸 애정의 전조.

그리고 사윤은 저를 그런 눈으로 봤던 사람들의 말로를 알았다.

그러니까.

“한건주.”

“네.”

“넌 그러면 안 돼.”

“……?”

갑작스러운 당부에 한건주가 어리둥절해했다. 사윤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래선 안 된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중얼거리며 그의 머리를 제 어깨 쪽으로 더 힘껏 눌렀다.

진드기 같은 게 몸을 기어 다니고 고막을 파고드는 기분이 들었다. 지독한 것들이 몸에 달라붙고 달라붙고 달라붙는다. 떨어트리려 해도 떨어지지 않는 것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

불행.

오랜 시간 사윤의 생기를 갉아먹은 벌레였다.

그래도 아직 늦지 않았다. 전조였지 감정 자체는 아니었으니까. 더 커지기 전에 손을 쓰면 된다. 사람이라도 소개해 주거나. 그 말을 중얼거리며 사윤은 눈을 감았다.

호흡이 불편해 운신도 버거운 상황이었으니 차라리 죽고 다시 시작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판단을 마치고 포션을 꺼내 한건주에게 먹였다. 의문을 품으면서도 주는 대로 받아먹던 남자의 뒷덜미에 침을 꽂아 넣자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화등잔만 하게 키운 그가 그대로 기절했다. S급이니 10분도 안 돼서 깨어나겠지만 자신이 죽다 살아나는 시간이 더 빨랐으니 문제 될 건 없었다. 포션 덕에 숨이 막혀 죽진 않을 거라 건주의 눈을 감겨 준 사윤이 칼을 빼 들었다. 첨예한 날의 끝이 심장으로 향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 * *

“하.”

확실히 죽다 살아나니 시야가 조금 더 명료해졌다. 빌어먹을 특전을 얻은 덕에 지체되는 시간 없이 바로 되살아날 수 있는 게 이럴 땐 확실히 좋았다. 사윤은 아직 피가 흐르는 중인 단도를 털고 축 늘어진 건주를 안아 든 채 작업을 시작했다. 정말로 경진과 옌, 이재희를 포기할 순 없었으니 우선 그들의 위치부터 바로 파악해야 했다.

콰앙, 쾅!

잔해를 거세게 두드리고 1분 정도 기다렸다. 붕괴 피해는 자신과 건주가 있는 장소가 더 컸으니 앞서 있던 셋은 살아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옅은 진동이 되돌아왔다. 확인차 한 번 더 같은 장소를 두드리자 또다시 돌림노래라도 부르듯 파장이 되돌아온다.

살아 있네.

그럼 저들이 있는 장소까지 이동하고 건물을 얼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흡!”

겹겹이 쌓인 잔해를 칼로 부숴 깨고 밀어 내고 꺼내길 반복하며 길을 확보했다. 건주를 붙잡고 있는 탓에 쓸 수 있는 손이 하나뿐인지라 반복 작업에 어깨가 저렸다. 식은땀이 눈물처럼 쏟아진다. 밤쥐 수장 폼 다 죽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팔로 이마를 닦아 내고 다시 잔해를 해치웠다.

철근을 끊어서 내동댕이치고 나서야 길이 보인다. 슬슬 재차 숨이 막혀 왔으나 또 한 번 자살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저쪽이 한계일 테니까.

포션은 일시적으로 질식사로부터 몸을 보호해 주겠지만 완벽하진 않다. 한건주도 있었기에 여유를 부릴 수 없어 더 몰아붙인 사윤은 마침내 정신 사나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형님. 오고 있어? 형님, 형님, 형님. 어디까지 오셨나. 어디서 오시려나. 우리 형님 잘한다, 파이팅!”

쓸데없이 퀄리티 좋은 노랫소리가 들렸다. 이런 정신 나간 노래를 부를 사람은 한 명뿐인지라 저도 모르게 픽 웃은 사윤이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칼을 내리찍었다.

콰가가가.

건물이 한 번 진동하고 히익! 기겁하는 소리가 들린다.

“헛소리하지 말고 돕지?”

대화가 가능한 거리였기에 벽을 두고 얘기하니 알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땀을 닦아 내고 숨을 한 번 몰아쉬고 있으니 어깨 위에 얹힌 사람이 뒤척거렸다. 기절에서 깰 때가 됐긴 했다 싶어 사윤은 한 번 더 건주에게 포션을 먹였다. 그런 뒤 바닥에 내려놓자 눈꺼풀을 두 번 깜빡인 건주가 사윤을 발견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상황 파악이 끝난 건지 인상을 쓰는 남자의 입을 사윤은 포션으로 막았다.

“기력부터 회복해. 나가면 바로 전투 시작될 테니까.”

“으브으븝?”

“나갈 수 있으니까 포션이나 마셔, 예쁜아.”

말을 하고 나서 아차 싶어졌다.

예쁜아 호칭이 문제였을까.

그래, 어쩌면 이 호칭 때문에 호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사윤은 건주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못난아.”

“……?”

오, 확실히 싫어한다.

바로 인상을 찌푸리는 게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듯해 확신을 얻은 사윤이 웃었다.

“못난이로 하자, 너.”

“갑자기 무슨 헛소리예요? 공기가 부족해서 미쳤나.”

말투가 퍽 시니컬했다. 조금 전 형이라고 저를 부르던 온도와 확연한 차이가 있어 더 만족스러워진 사윤이 웃고 있을 때 투두둑, 흙이 떨어지면서 콰앙! 굉음이 한 번 들렸다. 옌 쪽에서 잔해를 뚫는 데 성공한 거다.

“기운 펼쳐서 잔해에 안 깔리도록 막아.”

한건주가 기절해 있어 여태껏 제가 대신해 주었던 보호를 거둔 사윤이 가볍게 충고하곤 옌이 뚫은 벽으로 향했다. 얼굴 하나가 들어갈 수 있는 구멍 사이로 누군가의 정수리가 보이더니 그가 고개를 마구 털어서 구멍을 넓히고 뽁 나왔다. 사윤은 머리만 빠져나온 옌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오, 우리 형님.”

그와 대비되게 밝은 표정의 옌이 고개를 들고 싱글벙글 웃었다.

“나 잘했지 않아? 구멍 뚫은 걸 아주 예술로 뚫었는데.”

“목 잘리고 싶으면 계속 그러고 있든가.”

단두대라도 되는 양 목만 내놓고 있는 게 딱 썰기 좋았다. 칼을 한 번 공중에 던졌다 잡으며 뱉은 경고에 깔깔 웃은 옌이 느지막이 구멍을 넓히고 몸을 빼냈다. 뱀처럼 유연하게 미끄러지는 남자를 본 사윤이 괜히 그를 한 대 쥐어박자 그가 또 웃는다. 이어서 옌이 넓혀 둔 구멍으로 재희와 경진이 속속 빠져나왔다.

“밖에 서른 명 정도 있는 것 같더군요.”

흙이 묻은 옷을 턴 재희가 위를 힐끔거렸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라 고개를 끄덕인 사윤이 일행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한건주는 표정이 불량해 보였지만 몸 상태는 멀쩡했으니 좋았고, 이재희는 가벼운 상처가 있었으나 시로가 핥으니 금방 나았다. 저건 좀 부러웠다. 그리고 한경진은 몸이 만신창이였지만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포션을 챙겨 먹는 중이었고 옌은 설령 목이 떨어진다 해도 어떻게든 붙이며 살아날 놈이었으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드디어 일행 전원이 조우했다.

이제 나가기만 하면 됐기에 냉기 저항 아티팩트 착용을 권고한 사윤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다음 서리의 기운을 폭발적으로 공간에 풀었다.

쩌저저적.

단숨에 주변 공간이 얼어붙고 기운은 더 빠르고 더 강하게 뻗어 나간다.

“신고식을 시원하게 치러 줬으면 보답을 해야지.”

비릿하게 웃은 사윤이 한 손으론 건주를 붙들고 남은 손으로 무기를 바꿔 쥐었다. 그런 뒤 일행들이 말리기도 전에 검을 휘둘렀다.

“헤리스의 참회.”

“이런 미-.”

누군가의 욕설이 끝나기도 전에 폭발음이 울려 퍼진다. 얼음 파편들이 우박처럼 쏟아지고 하늘까지 직행하는 길이 곧바로 뚫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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