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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31)화 (231/266)

제231화. 전갈 사냥 (4)

“이걸 쓰라고요.”

“어.”

“이런 취향이었어요?”

“…….”

“…뭐, 맞춰 주지 못할 것도 없죠.”

선심 써 이해하겠다는 듯한 투였으나 와락 인상을 쓰고 하는 말인지라 그다지 미덥지 않았다. 사윤은 잠깐 말문이 막힌 사이 저를 파렴치한으로 몰고 가는 남자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사람이 자기 걱정하는지도 모르고. 순간의 황당함이 목구멍을 틀어막아 반박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건주는 사윤이 부탁한 일을 행했다.

안대는 귀에 거는 형식의 일반적인 안대가 아닌 머리 뒤로 묶어 시야를 가릴 수 있는 천 형태였다. 길게 늘어진 검은 천 쪼가리를 묵묵하게 들어 올린 이가 천천히 눈을 가린다. 여전히 오해는 풀지 못한 채인지라 마지막까지 저를 바라보던 눈빛이 불손했다.

“야, 네가 뭘 착각하고 있는데 이건 내 취….”

오해에서 비롯된 말다툼이 얼마나 사람의 신경을 갉아먹는지 알았기에 재빨리 정정하려 했던 사윤이 멈칫거렸다. 피아노 전공자라 추측할 수 있을 만큼 곧고 길게 뻗은 손가락이 머리 뒤로 가 느지막이 천을 묶는다. 안 그래도 느긋한 동작이었는데 마치 슬로우 디버프에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탓에 더 느릿하게 보였다.

그 덕에 사윤은 섬세한 동작 하나하나를 눈에 담을 수 있게 됐다. 유려한 턱 선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천 조각이 사뿐하게 감긴 속눈썹을 가리고 두 눈두덩을 뒤덮어 보기 좋게 자리 잡힌 귓바퀴 위의 관자놀이까지 이어지는 광경을.

한건주가 안대를 쓰고 있는 광경은 딱히 처음 보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직접 안대를 쓰는 장면은 처음 보았다. 그 사소한 차이가 가져다주는 시각적 자극이 입을 메마르게 했다. 그제야 자신이 아직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벌린 상태 그대로라는 걸 알아차린 사윤이 감쳐물듯 입술을 닫고 숨을 내쉬었다.

그럭저럭 예쁘다고 생각했던 눈동자가 안대에 의해 가려지면 조금 아쉬울 줄 알았는데 이거 웬걸. 오히려 더 만족스럽다. 남성이 여자가 머리카락을 높게 묶는 장면에서 설렘을 느낀다는데 그게 이런 감정인가 싶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사윤은 머리를 묶는 게 아니라 눈을 가리기 위해 천을 묶는 장면에서 만족감을 느낀 거지만.

내게 가학 성향이 있었나?

진지하게 고민하며 혼잣말로 나올 뻔한 말을 간신히 삼켰다. 얘기를 들은 한건주가 그럼 제가 피학 성향을 갖춰 보겠다며 대답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 탓이다.

근래 들어 부쩍 이상해진 놈이라면 충분히 그리 말할 가능성이 있었다.

미친 새끼지, 아주.

답을 내리지 못한 고민이 엉뚱한 샛길로 틀어 한건주를 욕하게 됐을 때 안대에서 손을 뗀 남자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보았다. 잘 고정됐는지 테스트하는 듯했다. 이윽고 그가 테이블 위를 더듬었다. 뭔가를 찾는 듯한 손동작에 호기심을 품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사윤의 손 위로 건주의 손이 뒤덮이고 남자의 몸이 기울어졌다.

향수인지 샴푸인지 모를 향이 훅 끼친다. 눈 깜짝할 사이 신체 부위의 일부가 가려진 얼굴이 코앞까지 들어왔다.

“흔들리는 것 같은데 다시 묶어 줘요.”

“…….”

“형?”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의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붙들린 손을 덜컥거린 사윤이 제게 고개를 숙이는 이를 바라보았다.

이거 꽤….

“한건주.”

이름을 부르자 남자가 다시 고개를 든다. 천 뒤로 가려진 눈동자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을지 웃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높게 뻗은 콧대 아래의 입술은 이 상황이 재밌는지 미약하게 웃고 있었다. 무심코 뻗은 손이 묶어 달라 했던 천이 아닌 남자의 귓불로 향한다. 엄지로 툭 건드리자 움찔거렸던 이가 이내 손길 아래에서 얌전해졌다.

그대로 타고 올라간 손이 볼에 닿자 자연스럽게 고개를 기울여 일정한 무게를 넘겨주는 이에 사윤의 손끝이 흔들렸다.

인정하자.

이건 꽤 취향이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놀라워하고 있으니 사회자가 사막의 형벌을 소개했다. 경진이 재희를 건너와 손을 뻗어 사윤의 어깨를 잡았다.

“염병 그만 떨고 할 거 좀 하자, 형님아.”

“아.”

그러고 보니 다시 묶어 달라고 했었지.

지적을 듣고서야 정신 차리고 목덜미로 손을 옮겼다. 살짝 누르니 신호를 알아차린 건주가 뒤통수가 보이도록 고개를 숙였다. 눈을 가려도 눈치가 빠른 건 여전한 모양이었다.

“내가 변태적인 취향이라서 준 게 아니고, 사막의 형벌에 당할까 봐 혹시 몰라서 가리라고 한 거다.”

“네.”

“…대답만 하지 말고.”

“그렇다고 쳐 줄게요.”

알아듣긴 개뿔이나 알아들었다. 누가 봐도 수상쩍지만 내가 봐주겠다, 는 투라 눈을 부라린 사윤이 복수랍시고 안대를 꽉 졸랐다. 엄살일 게 분명한 신음을 낸 건주가 다 됐다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움직임에 따라 묶고 남은 천이 살랑거렸다.

보기는 좋네.

“근데 형.”

“왜.”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요. 사막의 형벌에 당할 일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누가 누굴 안심시키려 드는 건지 모르겠다.

사윤은 코웃음을 한 번 쳤다가 한건주의 코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딱밤을 맞은 이가 이번에는 정말로 아픈지 미간을 홱 좁히며 코를 가리고 몸을 뒤로 뺐다. 붉게 변한 코끝이 손 틈 사이로 얼핏 보였다.

“사람이 왜 이리 폭력적이에요?”

“너한테 쓴 게 폭력이면 세상에 폭행 상해죄로 잡혀갈 놈들이 몇 명이야?”

“글쎄요. 천 명은 되나요?”

뻔뻔한 대답이었다. 사윤은 괘씸함에 건주의 귀를 한 번 잡아당겼다가 집중하라는 경진의 핀잔을 듣고 놓았다. 잠깐 헛짓거리하며 노닥거리는 사이 경매장의 분위기는 꽤 달아올라 있었다. 달뜬 시선이 사막의 형벌에 닿고, 쓸데없이 긴 설명을 끝낸 사회자가 경매 시작을 알렸다.

“10억.”

첫 제시 금액부터 살벌했다. 유명세가 유명세인 만큼 30억보다 낮은 금액으로 낙찰되진 않을 거다. 그걸 알기에 사윤은 초반 경쟁에서 한 발 뒤로 빠져 제시하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계속해서 경쟁에 참여하는 놈. 그놈을 찾아내야 했기에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는 동안 10억에서 시작된 금액은 순식간에 35억까지 뛰었다.

그리고 그렇게 가격이 뛰는 동안.

“37억.”

매번 더 높은 금액을 제시하며 경매를 끌고 가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토끼 가면이었다.

“…아.”

습관적으로 사람의 얼굴에서 전갈 그림을 찾으려 했던 사윤은 순하게 생긴 토끼 가면을 확인하고 탄성을 흘렸다.

고려하지 못한 게 하나 있었다.

저런 식으로 가면을 쓰고 들어오면 놈이 스콜피언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반대로 얘기하자면 가면을 쓰고 들어온 놈이 범인일 수도 있었다. 사윤은 토끼 가면 남자를 주의 깊게 주시하다가 서서히 열기가 식어 가는 걸 느꼈다. 금액이 50억대로 넘어가면서 주춤거리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한 거다.

때를 기다리던 사윤이 경매에 뛰어들었다.

“60억.”

토끼 가면의 반응을 봐야 했으므로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제시하지 않았다. 여태 조용하다가 사막의 형벌이 나옴과 동시에 경매장을 독무대로 삼은 듯 존재감을 드러내던 남자가 사윤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사윤은 다시 전에 지어 보인 웃음으로 그를 응수했다.

“…61억 달러.”

눈을 게슴츠레 떴던 남자가 다시 금액을 올렸다.

“65억.”

사윤 역시 지체하지 않고 번호판을 들었다.

이후부턴 경매장에 둘만 놓인 듯 사윤과 토끼 가면 남자의 싸움이 이어졌다. 66억. 70억. 71억. 75억. 남자가 1억을 올리면 사윤이 5의 배수를 부르는 식의 경쟁이 계속되자 사람들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둘을 살폈다. 감히 이 싸움에 뛰어드는 이는 없었다.

“90억 달러.”

기어코 사윤의 입에서 신기를 낙찰했을 때보다 세 배나 되는 가격이 튀어나왔다. 토끼 가면의 남자가 인상을 썼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지노선이다.

신체의 반응으로 결과를 예측하고 웃자 한숨을 내쉰 남자가 다시 번호판을 들었다.

“95억.”

승부수를 걸었다고 봐도 좋은 금액이었다. 사윤은 설마, 하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눈빛을 태연하게 받아들이다 어깨를 으쓱였다.

저쪽이 승부수라면 이쪽도 체크를 둘 때였다.

“120억 달러.”

“허억!”

누군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무척 예의 없고 몰상식한 행위였으나 사람들의 시선은 소리를 낸 남자에게로 꽂히지 않았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놀람과 경악, 당황을 가득 담아 사윤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윤은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다 제쳐 두고 토끼 가면의 남자만 쳐다봤다.

다시 시선이 맞물리고 남자의 가면이 한 번 들썩거린다. 그가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린 순간 사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옌!”

외침과 함께.

콰아아앙-!

경매장을 뒤엎는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비명이 빗발친다. 자욱하게 깔리는 먼지구름 속에서 사윤은 단도를 빼 들었다.

“이재희, 한경진 지켜.”

“네.”

“그리고 한건주….”

사막의 형벌!

건주의 이름을 부르다 말고 물건을 떠올린 사윤이 눈을 크게 떴다. 뺏기기 전에 찾아야 한다. 머릿속이 백지로 변했다가 유물로 가득 찼다. 곧바로 몸을 틀고 달려가려던 때였다.

퍼어엉!

한 번 더 폭음이 들리더니 삐삐삐, 시끄러운 도난 방지 경보음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무언가 쐐액! 얼굴을 스쳐 지나가며 허공을 가른다. 혼비백산한 경매장을 가로지른 무언가로 안개가 잠시 걷히며 단상 위의 풍경이 드러났다.

그림자가 사막의 형벌이 놓여 있던 자리를 뒤덮고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던 그림자들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온 단도를 쳐 내고 사막의 형벌 주변을 엄호하듯 돌았다.

“시발, 저게 뭐야?”

통역 장치를 통해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단도를 날린 범인으로 추정되는 음성이었다.

“그림자….”

사윤은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기운을 확인하고는 헛웃음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그러게 제가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툭툭,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고 있는 남자가 붉은 입술을 끌어 올렸다.

“이제 안대 벗어도 돼요?”

상황과 맞지 않는 나긋한 목소리를 흘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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