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0화. 전갈 사냥 (3)
“형님?”
물론 이상 제시가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내부의 잡음까지 없던 건 아니었다. 여태 잠잠히 있던 경진이 벌떡 일어나자 사윤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목을 긁고 가는 예리한 살기를 눈치챈 경진이 주춤 자리에 앉곤 목소리를 낮췄다. 경악을 금치 못한 얼굴이었다.
“맙소사. 형님, 아무리 협회장이 싫다지만 그 사람 카드로 10억 달러를 긁는 건 아니지 않아?”
그 말에 당황한 건 사윤이었다.
“뭐라는 거야? 내 돈으로 긁는 건데.”
“아, 그래? 그럼 됐지.”
난 또, 괜히 걱정했네.
남의 돈이 아니란 말에 경진의 표정은 부쩍 산뜻해졌다. 체기가 내려가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을 쓸어내리는 손동작은 조금 전 당황한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시원시원했다.
건주는 그 광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가 사윤의 옷깃을 붙잡았다. 이후 그가 할 말이 무엇인지 사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미….”
“안 미쳤어.”
“…….”
질문보다 먼저 나온 대답에 옷깃을 잡은 손이 움찔거렸다. 그에 따라 시선을 내리던 사윤은 아차 싶어졌다.
생각해 보니 잘못 말했네.
원래 디폴트로 미쳐 있긴 했으니 미치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 광기가 이 경매에 영향을 준 건 아니었다.
“음.”
돌아 있긴 했지만 그래도 제정신이다, 라는 말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사윤을 건주는 멍하게 응시했다. 버릇대로 테이블을 두드리다 말고 고개를 든 사윤이 그 어벙한 눈을 마주하고 무심코 웃었다.
“왜, 새삼스럽게 멋져 보여?”
장난스럽게 묻는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이 인상을 쓴다. 익숙한 표정이었던지라 사윤은 이미지 관리도 잊고 사악하게 킬킬거렸다. 테이블 위에서 별거 아닌 대화가 오가는 동안 제시 금액은 10억 달러에서 멈춰 있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렸다.
“10억 달러 이상 없습니까?”
없진 않을 텐데.
갑작스럽게 판돈을 올려 다들 당황하고 고민하고 있을 뿐이지 이대로 포기하는 건 아닐 거였다.
그도 그럴 게 1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신기다. 그중에서도 가공한 신기는 인기가 꽤 좋았다. 언젠가 되판다면 더 고가로 되팔 수도 있었고 유능한 인재를 영입할 때 미끼로 쓸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신기를 가공한 장인과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메리트가 있는 무기였다.
장인과의 인연을 맺는 건 쉽지 않다. 가치로 따지자면 꽤 천문학적인 금액이었으니 고작 10억으로 낙찰받긴 힘들 거라 조용히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카운트다운을 셀 무렵 끝 테이블에 앉은 이가 번호판을 들었다.
“…15억.”
금액이 올라가는 단위가 커졌다. 그때부터 다시 경쟁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20억, 21억, 25억. 차근차근 올라가는 금액은 경쟁의 과열을 드러냈는데 그와 대비되게 경매장 안은 서늘했다. 모두가 번호판을 들면서도 식은땀을 훔쳤고 자기도 모르게 어느 한 곳을 바라보았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모이는 자리에서 사윤은 번호판을 한 바퀴 돌렸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한 사람만을 주시했고 사윤은 3초를 남겨 두고 판을 들었다.
“30억.”
28억 7,200만 달러.
그 애매한 금액을 도로 깔끔하게 억 단위로 맞춘 사윤이 고개를 돌렸다. 자리가 배치된 구역이 거의 맨 앞이었기에 뒤로 펼쳐진 테이블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보며 사윤은 입꼬리만 올렸다. 적막이 내려앉았다.
30억 달러.
일반 시민들은 상상도 못 할 만큼 큰 금액이지만 경매장에는 그만한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이들의 대리인이 많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눈치 게임이라도 하듯 눈동자만 데굴 굴리는데 우스운 점은 그들 모두가 단 한 사람의 눈치만 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일방적인 게임이다.
“30억 달러. 30억 달러입니다.”
사회자가 경매를 다시 진행시켰으나 여전히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3, 2, 1….”
사회자는 마지막 숫자를 세며 사윤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쳐 저도 모르게 움찔거린 이가 낙찰을 알렸다. 사윤은 배부른 미소를 지으며 건주를 돌아보았다. 모처럼 그가 갖고 싶다고 한 물건을 직접 사 준 자신에 대한 감탄이나 감격 따위를 기대하며 몸을 돌렸는데 정작 마주한 건 멍청한 얼굴이었다.
이건 별론데.
“한건주.”
“…….”
“건주야.”
“…….”
“예쁜아. 넋 놓니.”
결국 손가락을 딱 튕기면서 그를 부르자 석화에서 풀려난 사람처럼 그의 시선이 돌아갔다. 여전히 기쁨이나 감격 따위는 보이지 않아 사윤은 입 안쪽을 한 번 씹곤 물었다.
“안 기쁘니.”
“…네?”
“너 저거 갖고 싶다며.”
내가 샀는데.
건조하게 덧붙인 사윤이 단상을 향해 턱짓했다. 두 개의 신기가 놓여 있는 무대를 본 건주가 한숨을 내쉬더니 사윤의 쪽으로 툭 머리를 기댔다. 그가 옷에 대고 고개를 몇 번 돌렸다. 마른 머리카락이 문대지는 소리가 바스락 울렸다.
지쳤나.
힘이 잔뜩 빠진 사람 같은 동작에 사윤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30분은 더 있어야 했는데 벌써 지치면 어쩌나 싶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손을 들었다. 그의 머리채를 잡아 젖힐지 아니면 그냥 머리를 쓰다듬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한건주의 목소리가 불쑥 의식에 꽂혔다.
“…갖고 싶긴 했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많은 돈을 쓰라는 건 아니었어요.”
“후회하냐.”
“그건 아닌데….”
꽤 소심한 음성에 사윤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몸이 들썩거리자 어깨에 기대고 있던 건주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지금 비웃어요?”
“어.”
“…….”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긍정은 말문을 막히게 하는 좋은 수단이었다. 상대방은 더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아, 재밌네.
사윤은 불만을 머금어 평소보다 부푼 남자의 볼을 손끝으로 건드렸다가 제 지론을 얘기했다.
“돈 아끼는 새끼들은 거기까지가 제 그릇인 거야. 돈처럼 탐욕스러운 건 야망 있는 사람을 좋아해서 쓸 줄 아는 놈한테 몰려들거든. 안 쓰면 거기서 더 내려가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올라가지도 않겠지. 무슨 말인지 알겠니.”
“…대출까지 당겨서 주식 한 사람들이 할 법한 말이라는 건 알겠네요.”
“새끼가. 강의를 해 줘도.”
어디서 들을 수 없는 명강의인데 수강생 태도가 영 개판이었다. 볼을 잡아당기며 응징하고 있는데 경진이 염병 좀 그만 떨라며 얼굴을 가렸다. 사윤은 건주의 볼에 붉은 손자국을 남긴 후에야 실컷 잡아당겼던 살을 놓아주곤 웃었다.
“시답잖은 걱정은 됐으니까 그냥 기뻐해.”
“…….”
“네 첫 신기 아니냐. 그것도 내가 사 준.”
그럼 응당 더 기뻐해야 했다. 후회도, 미련도, 걱정도 담기지 않은 순수한 요청에 건주가 헛숨을 내쉬듯 길게 숨을 뱉어 내더니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생각보다 더 맥없이 느껴져 사윤은 한마디를 더 얹었다.
“두 개 다 네가 가져라. 보니까 같이 착용하면 세트 효과도 있다던데.”
금도끼 은도끼의 산신령인 양 두 개 다 준다고 하면 더 기뻐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상대의 표정이 구겨졌다.
“염치도 없게 어떻게 두 개를 다 가져요?”
“너 원래 염치없잖아.”
“…됐으니 하나는 형이 해요. 목걸이를 두 개나 걸고 있으면 꼴이 우습잖아요.”
“그런가?”
“네. 전 어차피 형 옆에 있을 거니까, 혼자 착용하나 같이 착용하나 세트 효과 얻는 건 똑같아요. 그럼 둘이서 좋은 게 더 낫죠.”
이유가 꽤 마음에 들었다. 제법 타당한 설득이라 고개를 끄덕이다 넘어간 사윤은 뒤늦게 눈을 깜박였다. 잠깐 방심한 사이 목걸이 하나를 넘겨받게 됐다.
“으음.”
자신이 괜히 쪼잔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신음을 앓자 누군가 손등을 툭툭 건드렸다. 왼손을 건드린 걸 보니 누군지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으나 그냥 쳐다봤다. 웃고 있는 얼굴이 시야를 침범했다.
“고마워요.”
“…….”
“저거 받으면, 안 뺄게요.”
생각했던 것보다 덜 야비하고, 더 순수한 웃음에 사윤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이후로 대여섯 개의 물건이 더 출품되었으나 사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번 신기를 눈에 담고 나니 전부 성에 차지 않는 것들이었다. 시간이 꽤 흘러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니 5시 정각이다. 슬슬 이 경매의 주인공이 나타날 시간이었다.
눈을 감고 천장에 숨어 있는 옌의 기운을 감지한 사윤이 잠들 듯 고개를 꾸벅거리고 있는 경진을 툭 치고 재희의 어깨를 두드렸다.
“혹시 모르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스콜피언 놈들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경매 자체는 참석할 거였다. 다만 그러다 경매에서 밀리면 수를 쓰겠지. 놈들이 경매장을 뒤엎을 타이밍을 잰다면 세 지점이 있다.
사막의 형벌이 나온 직후, 경매에서 밀린 이후, 경매가 끝날 때.
그 세 가지 경우에 모두 대비해야 했기에 숨을 들이켰다가 한건주를 바라보았다. 닿은 시선을 눈치챈 남자가 의문을 표한다.
“예쁜아.”
사윤은 경매장에 도착하고 나서 혹시 모를 위협을 계속 견제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론 어떻게 하면 사막의 형벌로부터 한건주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해답을 조금 전 내렸기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던 물건을 꺼냈다.
“너 이것 좀 쓰자.”
“…….”
테이블 위로 안대가 놓였다. 사윤을 보는 건주의 시선이 싸늘하게 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