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9화. 전갈 사냥 (2)
“10만 달러 나왔습니다. 10만 달러. 더 없으십니까?”
장내를 숨 막히게 한 침묵을 걷어 낸 건 경매 진행 경험이 많은 사회자였다. 패스파인더 경매장에는 내로라하는 5만 헌터의 대리인이 출몰하고 대부호도 관심을 보인다. 이런 식으로 금액이 몇 배로 뛰는 일은 예전에도 종종 있었으니 당황할 일은 아니었다.
“자, 10만 달러입니다. 더 원하시는 분 없으십니까?”
능숙하게 진행을 이어 간 사회자는 새로운 신호를 주는 제시자를 찾아 눈동자를 굴렸다. 눈앞의 이들 역시 이런 경매에 몇 번이고 참석해 봤을 텐데도 상황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분위기가 술렁거리는 게 피부로도 와 닿았다.
저 남자 때문인가.
사회자는 조금 전 10만 달러를 부른 남자를 돌아보았다. 병색이 짙은 환자를 연상케 하는 창백한 피부와는 대비되게 생동적인 이목구비, 서구적인 콧대와 그 선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닿게 되는 이채를 띤 눈동자는 안 그래도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구석은 따로 있었다.
분명 친절한 웃음의 정석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선량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어째서인지 느껴지는 이유 모를 섬뜩함과 음험함. 온몸의 세포들이 자리를 박차고 도망쳐 나가라 경고하는 것만 같은 그런 위압감이 남자에게서 느껴졌다.
S급 헌터를 자주 만나 온 그였지만 이런 압박감은 쉬이 느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언가 천천히 심장을 조여 오는 듯이…. 마치 마비 독에 중독되어 죽어 가는 듯한.
“…….”
저도 모르게 뚫어져라 그를 응시하고 있으니 번호판을 내린 이가 눈을 가늘게 접었다.
“이상 제시가 없는 것 같은데.”
인간미와는 거리가 먼 외형과 어울리는 차가운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어디선가 파열음이 들리는 환청을 겪은 사회자가 퍼뜩 정신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시자의 말대로 번호가 적힌 팻말을 든 사람은 없었다. 하기야 A급 아이템 시세를 생각했을 때 10만 달러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으니 구태여 이상 가를 제시하진 않을 거였다.
10, 9, 8….
카운터를 세고 낙찰을 알렸다. 아이템의 주인이 확정된 그 순간 부드럽게 휘어지는 남자의 입꼬리를 사회자는 평생토록 잊을 수 없을 거라 직감했다.
“10만 달러라니, 미쳤어요? 돈이 그렇게 썩어 나는 거예요, 아니면 저 아이템이 그렇게 좋은 거예요?”
기어이 낙찰된 아이템에 건주가 사윤의 옆구리를 찔렀다. 귓속말로 열띤 잔소리가 쏟아진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음성을 재즈 바에 깔린 노래처럼 들으며 사윤은 심드렁하게 잔을 들었다. 직원을 불러 치우게 한 뒤 다시 새로운 와인 잔을 얻어 내자 경진과 재희가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는 게 느껴졌으나 제재를 가하진 않았다. 오히려 잔을 기울이려는 사윤의 손목을 붙든 건 건주였다.
“그만 마셔요, 형. 아무래도 취하신 것 같아요.”
웃기지도 않는 말장난이었다.
“안 취했어.”
“안 취한 사람이 그 금액을 그렇게 턱, 턱….”
미간을 찌푸린 남자가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사윤은 소심하기 짝이 없는 씀씀이에 피식 웃었다. 돈도 써 본 놈들만 쓸 줄 안다고 이 경매가 어지간히도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그럼 익숙해지게 해 줘야지.
힘으로 건주의 손을 떨궈 내고 잔을 기울인 사윤이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담았다 삼키며 붉은 호선을 그려 보였다.
“뭘 그렇게 놀라. 이제 시작인데.”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듯 장난스러운 어투에 건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도와 달라는 듯 경진과 재희를 바라봤으나 재희는 남의 집 불구경하듯 앉아 있을 뿐이었고 경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내버려 둬. 여기서 천억을 쓰고 가도 밤쥐가 파산할 일은 없거든.”
오히려 부추기는 듯한 말에 건주는 눈을 깜빡였다.
이 자리에 금전 감각을 상실한 사람들만 모여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두 번째 물품이 소개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건주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말의 진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10만.”
“50만 달러.”
“70만.”
“100만.”
“150.”
경매가 진행될수록 사윤의 입에서 나오는 숫자는 과감해졌다. 모든 물건에서 흥미를 보인 건 아니었으나 누구나 관심을 보일 법한 무기에는 빠지지 않고 번호판을 들었다. 특히 의류 아이템이 나올 때는 눈 돌아간 사람처럼 가격을 올려 대 처음에는 경쟁하듯 같이 가격을 올려 대던 대리인들도 그들의 주인과 전화 주고받고 나선 포기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경매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일방적인 쇼핑의 현장이었다.
“지금까지 얼마를 쓴 거예요.”
그 말도 안 되는 장면이 벌어진 태풍의 눈에 있던 건주가 멍하게 얘기하자 경진이 태연하게 500을 불렀다. 그 음성이 마치 밥 사 준다고 만 원 좀 썼다 얘기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들려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에는 돈지랄이 기분 좋았던 건지 시원하게 웃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금액을 제시하는데 전혀 신중을 기하지 않는 충동적인 남자였다.
새삼스러운 거리감이 느껴진다. 한건주의 시선이 가라앉았을 때 툭, 그의 볼을 치는 것이 있었다.
와인 잔이었다.
“너 주려고 다 샀는데 왜 그렇게 시무룩한 얼굴이야.”
“…뭐라고요?”
언성이 부지불식간에 높아졌다. 일순 사람들의 시선이 제게 쏠린 것을 느낀 건주가 아차 싶어 몸을 사윤에게로 수그렸다.
“방금, 뭐라고 그랬어요?”
“너 주려고 샀는데 왜 표정이 그따위냐고.”
대답하는 목소리는 상황이 불만스러운 건지 꽤 살벌했다. 원하지 않았다고 하면 경매장 안을 한바탕 엎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였다. 당혹스러움에 눈살을 찌푸렸던 건주는 하지 말라는 듯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고 있는 경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이해해 달라는 듯 간절한 얼굴로 눈짓을 보낸다. 차마 무시할 수가 없어 한숨이 흘러나왔다.
“저, 그렇게 비싼 거 안 필요해요.”
“비싸긴 뭐가 비싸. 네가 B급일 때 날려 먹은 포션값이 얼마인데.”
“…….”
반박할 수 없는 타박이었기에 잠시 입이 다물렸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사윤의 옷깃을 제 쪽으로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돈이 많다고 그렇게 막 써도 돼요?”
“돼.”
기껏 꺼낸 핀잔은 제 몫을 다하기도 전에 꺾여 버렸다.
금액 앞에서 기가 죽은 건지, 아니면 스스로를 초라하게 느끼는 건지 한건주는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거리면서도 쉬이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답답하게 그것을 바라보던 사윤은 신경질적으로 남은 와인을 원샷하곤 테이블 위로 머리를 괴어 건주를 바라보았다.
“100억도 안 썼는데 뭘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굴어?”
어차피 나중에는 다 네 게 될 텐데.
무심코 이어서 뱉을 뻔한 말은 간신히 혓바닥 아래로 숨겼다. 그러나 불만마저 숨길 순 없었다.
사들인 물건이 대여섯 개 되었으나 그것 중 S급을 넘어가는 등급의 아이템은 없었다. 매물이 안 나온 건 아니었지만 제 눈에 차지 않아 벌써 여섯 개의 물건을 별다른 제시 없이 패스하는 중이었다.
기왕 패스파인더 경매장에 온 거, 보란 듯이 괜찮은 SS급 이상 아이템을 하나 마련해 주고 싶었는데.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어 심기 불편한 와중 한건주까지 저리 구니 속이 뒤집혔다.
대답이 없는 이를 빤히 응시하다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럼 넌 뭐가 갖고 싶은데.”
그때 사회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 경매의 첫 번째 하이라이트입니다. 패스파인더 경매장에서 최초로 소개드리는 아티팩트 장인, 페르세의 걸작 마창 켈트하르를 기도와 성수로 정화시켜 만든 ‘루인’과 ‘켈트하르’입니다!”
고막에 깊게 침투하는 음성과 함께 화면에 설명창이 떴다.
[루인(신기)]
유럽의 장인 페르세가 신기 ‘마창 루인 켈트하르’의 촉을 성수로 씻어 내리고 신에게 기도를 올려 만든 축복받은 목걸이. 켈트하르와 짝을 이루며 루인과 켈트하르를 타인과 나눠 착용할 경우 운명 세트 효과가 발동합니다.
-착용 시 신앙심 10% 상승
-착용 시 해제 불가 및 타인에게 양도 불가
-마 속성 모든 능력에 30% 저항
-S급 이하 저주에 저항
-켈트하르와 함께 착용 혹은 켈트하르를 착용한 사용자와 함께 있을 시 세트 효과 발동
-세트 효과는 발동 시 공개됩니다.
두 개의 목걸이를 가렸던 붉은 천이 내려갔다. 사윤은 루인 옆에 뜬 켈트하르의 설명창 역시 루인과 똑같은 걸 바라보고 눈을 빛냈다.
신기 등급의 아이템이 하나 더 있었다니.
이건 듣지 못한 정보였다. 뜻밖의 수확이라 바로 번호판을 들려는데 조금 전 한건주의 말이 신경에 거슬렸다. 무심코 돌아간 시선이 건주의 얼굴에 닿는다. 그리고 그 순간 사윤은 여태껏 그 어떤 경매 물품에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던 한건주의 눈이 단상 위 두 목걸이에 꽂히듯 박혀 있는 걸 확인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이 가늘어지긴 했으나 그가 보이는 건 분명한 관심과 흥미였다.
“…그, 갖고 싶은 거 말하라고 했죠.”
그것이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는 건 조금 뒤 한건주의 말로 확신하게 되었다. 멋쩍은 건지 목덜미를 한 번 쓸었다가 고개를 숙이고 다시 슬그머니 시선을 들어 보인다. 귀 끝이 조금 붉어진 게 보였고 입이 할 말을 뱉지 못하고 망설이는 게 보였다. 자존심 때문인 건지 신세 지기 싫은 건지 몰라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형.”
마침내 떨어진 부름에 사윤이 피식 웃었다.
귀엽게 굴면 다 되는 줄 아나.
그리고 제 앞에 요 몇 턴 사이 얌전하게 놓여 있던 번호판을 들었다. 신기가 나온 만큼 금액은 200, 500, 800을 넘어 어느새 천만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사윤은 길드 금고에 남은 재산과 차이나 넘버 식스의 계좌, 앞으로 들어올 의뢰의 양과 사막의 형벌 낙찰 금액가까지 고려해 혀를 굴린 뒤 입을 열었다.
“1억.”
데자뷔처럼 조금 전의 정적이 짧게 찾아왔다. 건주가 놀란 듯 사윤을 바라보았으나 말을 걸 틈은 없었다. 등급이 신기인 만큼 이번에는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얼마 없었으므로.
“2억.”
곧바로 제시가 나왔다. 2억 2천, 2억 5천. 금액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상황에서 사윤은 2억의 제시자가 조금 전 자신과 눈이 마주쳤던 토끼 가면임을 확인하고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입꼬리가 삐딱하게 올라가고 마침내 3억까지 금액이 뛰었을 때 사윤은 판을 키웠다.
“10억.”
누구도 섣부르게 뛰어 올라올 수 없는 판으로.
“…….”
새롭게 깔린 판은 경매장을 뒤덮을 듯 컸으나 이상 제시는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