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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28)화 (228/266)

제228화. 전갈 사냥 (1)

신원 확인을 마치고 경매장 안으로 들어설 때부터 사윤 일행을 향한 사람들의 가벼운 수군거림이 이어졌다. 전 세계 헌터가 몰려드는 경매인 만큼 동양인이라서 쳐다보는 건 아니었고 그냥 워낙 한 명 한 명이 시선을 잡아채는 얼굴상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눈길을 끄는 듯했다.

익숙한 상황인지라 사윤은 그들의 시선을 마주하며 사위를 살폈다. 대부분의 유명 헌터나 고위 헌터들은 경매장에 직접 오지 않는다. 누가 무얼 구매했다는 소문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퍼지길 마련이지만 적어도 경매 당시에는 퍼지지 않는 편이 좋았으니까.

정체를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보유한 재산도 어림짐작이 가능한데 그럼 경매에서 불리하지 않겠나.

이런 데서는 알려진 게 적은 신인이 아니라면 정체를 숨기는 게 유리했다.

그러한 이유로 이름값이 좀 있는 헌터들은 거의 모든 경매에 대리인을 보냈고, 패스파인더 경매장은 이름값이 없는 사람들은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안면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제 얼굴을 알아볼 만한 인물이 없다는 걸 확인한 사윤이 비즈니스용 웃음을 장착했다.

인터뷰 때 진저리 나게 지어 보였던 제비 ‘사윤’의 웃음이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인 채 싱글벙글 안으로 들어서자 함께 들어오게 된 건주와 재희, 경진이 웃고 있는 사윤을 빤히 보았다. 경진이 감탄했다.

“와, 형님. 그 미소 진짜 안 어울린다.”

“즈용이 해라.”

복화술로 얘기한 사윤이 경진의 복부를 팔꿈치로 찍었다. 동반 3인은 인원이 많은 것 같아 옌과 함께 밖에서 대기시키려다 데려왔더니 기어오르고 앉아 있다.

이놈도 확 천장으로 보내 버려야 했는데.

경매장으로 들어오지 못한 옌은 경매장 천장에서 대기를 하기로 했다.

한 번 더 거슬리게 하면 천장으로 유배시킬 거다.

협박의 의미를 담은 시선에 경진이 꼬리를 내렸다. 사윤은 수십 개의 테이블 중 한국 협회 팀이라 적힌 자리를 찾아 앉으며 꿈틀거리는 입가를 매만졌다.

“경련 오겠네.”

남들이 보지 않도록 고개를 숙여 미간을 찡그리자 건주가 사윤을 툭 쳤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가 사윤의 얼굴을 붙잡았다. 정확히는 근육이 뭉치고 있는 입가를 붙잡은 자세였다.

엄지를 굴려 입 주변을 마사지해 준 그가 손에 힘을 풀곤 입을 열었다.

“그렇게 웃으면 힘들어요. 입꼬리를 당긴다고 생각하지 말고 입술 살짝 벌리고, 광대를 가볍게 올린다는 느낌으로 해 봐요.”

뜻밖의 조언이었다. 따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건주가 얼른 해 보라는 듯 사윤의 광대를 눌렀다.

“…….”

인상을 썼다가 미심쩍은 눈으로 따라 해 보는데 어색했다. 코가 자꾸만 찡긋거리는 게 거울을 보지 않고도 자신이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안 되는데.

광대를 가볍게 올린다는 느낌이 뭔지 몰라 여러 번 다시 시도하며 헤매다 쳐다보니 조언자가 손수 시범을 보였다.

“이렇게요.”

눈이 부드럽게 휘면서 그의 입술이 매끈하게 당겨졌다. 직접 알려 줬던 대로 그의 광대는 평소보다 미약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사윤은 어디서 많이 본 미소에 흠칫거렸다.

이거 이 새끼가 나 처음 봤을 때 지은 표정이랑 똑같은데.

고문 별장에서 봤던 표정이었다. 짧은 사이 씻은 듯 웃음을 지운 건주가 다시 해 보라 사윤을 종용했다. 묘한 기분으로 그가 보여 준 미소를 따라 해 봤다. 얼굴 근육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되새기며 재현해 내자 확실히 입가가 당기는 느낌이 전보다 덜했다.

“네. 그렇게요.”

단순히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던 건지 조언자로부터 오케이 사인도 받았다. 낯선 느낌의 표정이라 얼굴을 매만지며 잔근육들의 위치, 입꼬리가 올라간 정도를 파악하던 사윤이 눈을 흘겨 떴다. 가식적인 웃음을 짓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듯 구는 한건주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 뭐야?”

“뭐가요.”

“익숙해 보이길래.”

“그러게요.”

“……?”

맥락에 맞지 않는 대답이었다. 의혹이 담긴 시선을 보내고 있는데 문득 잊고 있던 한건주 관련 정보 자료가 떠올랐다. 1년도 더 전에 읽었던 그 보고서를 곱씹어 본 사윤은 ‘이미지 관리’라는 단어를 기억해 냈다.

주변 사람들한테 이미지 관리하고 지내는 것 같다 했었지.

확실히 자신을 처음 만났을 때 지어 보인 태도는 가식적이었다. 지금과 비교하면 딴판이었던 그때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보자 무의식이 언젠가 들었던 말을 되풀이하듯 속삭였다.

제 앞에서 가장 솔직하게 굴고 있다는 그의 말을.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지.”

“네?”

독심술은 깨우치지 못한 건주가 되물었다. 흐름에 맞지 않는 말을 한 번씩 주고받은 것에 만족한 사윤은 부연 설명 하지 않고 다리를 외로 꼬았다.

‘사윤’으로서의 첫 공식 일정이다.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여야 했기에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니 손 하나가 슬그머니 올라와서 왼 다리 위로 올라간 무릎을 밀어 냈다.

“경매면 오래 앉아 있어야 하니 똑바로 앉으시죠. 허리 아플 겁니다.”

이번에 참견한 사람은 이재희였다.

사윤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자리 배치를 잘못 했다. 이재희를 한건주 옆에 앉히든 해야 했는데 오지랖 넓고 타인에 관심이 많은 두 사람을 옆에 앉힌 바람에 양쪽에서 간섭받게 생겼다.

혀를 차며 몸을 들썩여 바로 앉았다. 수상한 움직임이 없는지 파악하기 위해 일찍 왔기에 경매가 시작되려면 아직 30분이나 남았다.

홀을 바쁘게 돌아다니는 직원을 불러 와인 석 잔을 추가로 가져오도록 했다. 그런 뒤 미리 세팅되어 있던 와인 잔을 들어 단숨에 비우자 건주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전에 그렇게 마셔 놓고 또 들어가요?”

“이 정도로는 안 취해. 기분만 내는 거지.”

빈 잔을 흔들며 얘기했으나 상대는 딱히 동의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사윤은 어깨를 으쓱거리고 건주의 잔을 뺏어 마셨다. 황당해하는 얼굴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거 제 잔인데요.”

“알아.”

“…그럼 됐어요.”

당당하게 대답하니 할 말이 없나 보다. 사윤은 픽 웃었다가 술 취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한건주에게 웃어 보라 시켰다. 눈을 끔뻑거리던 남자가 웃는다. 때마침 직원에게 부탁했던 와인 석 잔이 테이블 위로 도착했다.

사람을 즐겁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술과 웃음이었다. 그 두 개를 함께 즐기고 있으니 그럭저럭 기분이 괜찮았다.

다시 술을 홀짝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딱히 신경에 거슬리는 기운이 느껴지는 이는 없었다.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인지 패스파인더 경매장 안에는 늘 가면을 쓰고 온 이들이 많았는데 이번 경매도 마찬가지였다. 까마귀 가면도 있었고 눈까지 전부 덮어 가린 가면도 있었다. 흥미롭게 지켜보던 사윤은 토끼 가면을 쓴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씨익.

기분이 좋길래 와인 잔을 한 번 흔들며 눈꼬리를 길게 끌어 보였다. 눈이 마주친 이가 무릎 위에 얹어 두었던 손을 움찔거린다. 직후 손 하나가 시야를 가렸다.

“뭐야?”

“경매 시작하는 것 같으니 정면 봐요.”

텁 소리 나게 사윤의 눈가를 가린 건주가 약한 힘으로 머리를 뒤로 당겼다. 와인을 네 잔째 모조리 비운 사윤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입이 심심해 이재희의 잔을 노려보는데 그가 이건 안 된다며 웃어 보였다.

“그만 마셔요, 사윤 씨.”

조곤조곤한 충고가 귀를 울린다.

아, 역시 자리 배치 잘못 잡았다니까.

사윤은 예상했던 대로 양쪽에서 쏟아지는 잔소리에 손을 두어 번 휘젓고 다시 비즈니스용 웃음을 장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이 경매에 참석한 모두에게 통역 장치를 나눠 주었고 그로부터 10분 뒤,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경매인 패스파인더 경매가 시작되었다.

분위기를 서서히 띄울 첫 번째 상품은 독일의 장인이 만들었다는 피어싱이었다.

“귀환석을 갈아 만든 A급 피어싱입니다. 1,000일간 성수에 담가 신성력을 품어 동급의 아티팩트에 비해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설명창을 공유합니다.”

사회자의 말에 단상 뒤 화면에 푸른 설명창이 떠올랐다.

[비올라의 열망 피어싱(A급)]

독일의 장인 비올라가 가족의 귀환을 바라며 제작한 열두 개의 귀환석을 압축해 만든 아티팩트입니다. 열망 세트를 착용할 경우 세트 효과가 발동됩니다.

-착용 시 민첩 10% 상승

-착용 시 회피 판정 확률 20% 상승

-마 속성 모든 능력에 20% 저항

-마 속성 영역에서 모든 디버프 무효화

-단 1회 S급 이하의 게이트에서 탈출이 가능합니다. 탈출 기능 사용 시 아티팩트는 파괴됩니다.

-2개 세트 착용 시 개방

-3개 세트 착용 시 개방

“오.”

설명창을 보자마자 사윤을 비롯한 모든 참여자의 입에서 흥미로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세트 아이템은 안 그래도 귀하기 힘든데 단일로 착용해도 저만큼의 효과라면 구매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단 한 번 게이트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 주는 귀환석의 능력이 탐났다. S급 이하의 게이트라면 사실 현존하는 모든 게이트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거다. 제가 쓸 일은 없겠지만.

힐끔.

시선이 건주의 쪽으로 흘러갔다.

“천 달러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사이 사회자는 경매를 시작했다. 2천 달러, 3천 달러. 천 단위로 값이 올라갈 때 사윤은 건주를 쳤다. 주변 사람들에 집중하고 있던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귀 뚫었니.”

“네?”

“뚫었네.”

확인을 마친 사윤은 어느덧 3만 8천 달러에서 제시가 멈춰 낙찰 준비를 하는 사회자를 바라보았다.

“3만 8천 달러입니다. 정말로 더 없으십니까?”

마지막 질문이 올라왔을 때 사윤이 번호판을 들었다.

“10만.”

“…….”

일순 진득한 침묵이 깔렸다. 단숨에 억 단위로 뛴 금액에 모두의 시선이 제게 꽂혔을 때 사윤은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듯한 장면 속에서 그림처럼 웃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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