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27)화 (227/266)

제227화. 패스파인더 경매장 (10)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우선 밀레의 칩을 제거하는 게 우선이었다.

“…아플 수도 있다.”

살점이 칩을 뒤덮고 하나가 된 듯 엉켜 있었기에 미리 경고했다. 붙잡힌 손이 부들부들 떤다. 사윤은 영 신용이 안 가 고개를 들었다.

“잘 들어, 밀레. 여기서 네가 비명을 지르거나 신음이라도 내지르면 너랑 나는 스콜피언 놈들한테 꼬리 밟히는 거야. 그럼 너는 그 지옥으로 다시 돌아갈 거고, 내가 세운 계획엔 차질이 생기겠지. 내가 그런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너는 알잖아?”

“…으응.”

“그럼 일이 그렇게 될 경우 내가 널 보러 오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겠네.”

“…….”

밀레가 울상을 지었다. 사윤은 그제야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게 싫으면 참아.”

냉랭하게 얘기한 사윤이 단도로 칩이 박힌 부위를 파냈다. 밀레의 팔이 크게 움찔거린다. 꽉 잡아서 칼이 허튼 데를 찌르지 않도록 조절한 사윤은 이를 악물면서도 소리는 내지 않는 밀레를 보다 반쯤 파낸 칩을 마저 빼냈다. 중간에 마비초를 쥐어짜 즙을 바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침내 툭, 하고 피에 젖은 칩이 빠져나왔다. 사윤은 즉시 포션을 쏟아붓고 피로 흥건한 테이블을 보다 호리병을 꺼냈다. 뚜껑을 돌려 여니 호리병이 곳곳에 흩어진 액체를 빨아들였다. 순식간에 깨끗해진 테이블을 본 건주가 오, 하고 감탄했다.

“별게 다 있네요.”

“너도 10년쯤 굴러 보면 얻기 싫어도 얻게 될 거다.”

연차가 꽤 쌓인 헌터들을 잡상인이라 부르는 이들이 있는데 그게 이런 이유에서다. 연차가 쌓이다 보면 좋든 싫든 온갖 잡다한 아이템들이 생기니까. 사윤은 그걸 최대로 확장된 인벤토리에 억지로 쑤셔 박아 뒀다. 처박아 두면 가끔 이렇게 효율적으로 쓰일 때가 있었으므로.

“…끝났어?”

손을 꽉 쥔 채 바들바들 떨던 밀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눈물로 젖은 얼굴이 청초하다. 새삼스럽게 밀레가 성적 착취를 당하지 않은 게 천운이라 생각한 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밀레.”

잘했어.

칭찬이 떨어지자 그제야 내내 울상을 짓거나 울거나 둘 중 하나만 했던 밀레가 웃었다. 사윤은 그의 쪽으로 커피 잔을 밀어 두곤 본론을 꺼냈다.

“챙겨서 일어나. 칩의 신호가 끊겼으니 스콜피언 놈들이 추적해 올 거다.”

“그, 그럼 어떻게 해?”

“어떡하긴 어떡해. 따돌려야지.”

오후 4시의 샌프란시스코 거리에는 로브를 뒤집어쓴 세 명의 사내가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쾌속의 물약을 복용해 폭주족 저리 가라 할 속도로 내달리던 사윤은 불현듯 몸을 돌려 주차되어 있던 차의 범퍼를 밟고 뛰어올라 높은 담 하나를 훌쩍 넘었다. 헉헉거리며 그 뒤를 따라오던 밀레가 담을 올라가지 못하고 낑낑거리며 벽에 붙었다.

“이, 이래도 되는 거야?”

“돼.”

사윤은 밀레의 손을 붙잡아 끌어 올리며 사위를 살폈다. 공원 너머의 작은 숲이 보인다. 로브를 벗기 딱 좋은 장소였다.

“아직 물약 지속 시간 있을 테니 따라와. 너한테 맞춰 주고 있으니까 여기서 더 처지지 말고.”

“응….”

선택지가 없어 순종한 밀레가 다시 담 아래로 뛰어 내려가는 사윤을 따라 추락했다. 몸을 쓰는 능력이 형편없어 그대로 땅에 처박힐 뻔한 밀레를 건주가 붙잡았다.

“괜찮아요?”

“응.”

“그럼 뛰어요.”

사윤과 비교했을 때 그나마 상냥해 보이던 건주마저 비정하게 얘기하고 선두를 쫓아 내달리자 밀레는 두 인영의 모습을 무호흡 상태에서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약한 건 서러웠다.

“윗옷 벗어.”

“네?”

“어어?”

무작스러운 명령에 이번엔 건주와 밀레 둘이 동시에 당황했다. 건주가 한 발 뒤로 물러났고 밀레가 너덜너덜한 옷을 슬쩍 가렸다. 사윤은 기막힌 눈으로 두 사람을 응수했다.

“무슨 생각들 해? 스콜피언 놈들이 옷으로 우릴 추적할 테니까 벗으라고. 바지는 다 검정이니 됐고 상의만 바꾸면 되겠네. 입고 있는 옷 대신 이거 입어라.”

인벤토리에서 로브와 코트 등이 끊임없이 나왔다. 그 귀하다는 의류 아이템이 사윤의 인벤토리에선 무슨 잡템인 양 보관되어 있었다.

“노출 쇼 볼 생각 없으니까 로브 같은 거 먼저 걸치고 기존 옷은 찢어서 버려.”

조언까지 해 준 후에야 두 사람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사윤도 로브를 걸쳐 입고 셔츠의 단추를 풀어 벗었다. 그다음 로브 끈을 조이고 나니 어색하게 서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그럭저럭 옷이 어울렸다.

“넌 그거 가져라.”

“이, 이거? 이거 아이템 아니야?”

“어.”

“그런 걸 내가 어떻게….”

“가지라면 가져. 걸레짝 같은 옷 좀 그만 챙겨 입고.”

신경질적으로 얘기하니 밀레가 수긍했다.

쟨 저것도 병이야.

격하게 말해야만 알아듣는 게 상당히 불쾌했다. 협박과 고함에만 반응하도록 학습된 것 같아 마뜩잖은 표정을 지은 사윤이 간택되지 않은 옷들을 다시 인벤토리에 처박고 세 사람의 옷을 모아 향수를 뿌렸다.

“휘익!”

휘파람을 부른 뒤 잠시 기다렸다. 반응이 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뭐가 뭔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자 곧 하늘에서 까마귀가 날아왔고.

스스슷!

땅에선 뱀이 기어 왔다. 사윤은 까마귀에게 건주와 제 옷을, 뱀에게 밀레의 옷을 감아 주었다.

“적당히 이동하고 떨궈.”

눈을 마주치며 얘기하자 두 생물이 몸을 흔들곤 산으로, 하늘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사윤은 선글라스를 꺼내 밀레와 건주에게 건넸다.

“쓰고 돌아서 나가자.”

“이러면 된 거예요?”

“어. 추적 향도 버린 옷에 묻혀 놨으니 똥개 훈련 좀 할 거다.”

도로를 활주해 시선을 끌었고 담을 넘어가 동선을 틀었다. 그다음 산으로 들어갔고 여기서부터 시작된 향은 뱀과 까마귀를 따라 사라지고 있을 테니 놈들은 산까지 추적하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향수에 혼란을 겪을 것이다. 그사이 사윤은 유유히 돌아가 재희의 명의를 대고 숙소를 바꾸면 됐다.

셋이서 나란히 선글라스를 쓰니 꽤 우스운 꼴이 됐지만, 얼굴이 괜찮아서 그런지 봐 줄 만했다. 사윤은 우물쭈물하는 밀레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산을 나섰다.

“웃어, 밀레. 친구처럼 보이게.”

“으, 응!”

밀레가 어색하게 웃었다. 셋이서 화기애매하게 산을 빠져나오고 숙소로 돌아온 사윤은 미리 연락받고 기다리고 있던 재희 일행과 합류해 새로운 숙소를 잡았다.

“방은 세 개고 얘랑은 네가 써라. 아무래도 네가 제일 덜 위협적으로 생겼으니까.”

사윤이 키 하나를 재희에게 건네며 밀레를 가리켰다. 나갈 타이밍을 잡지 못해 얼결에 동행하게 됐던 밀레가 화들짝 놀랐다.

“나도 가? 같이?”

“그럼 넌 여기 가만히 있다가 스콜피언한테 잡히려고?”

“…그건 아닌데.”

“내가 그 수고를 들여서 칩을 빼 줬으면 너도 살아남을 성의를 보여야지. 따라와. 경매 끝날 때까지 새 숙소에서 지내.”

칩을 제거하고,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동선을 틀고, 숙소를 바꾸고. 그 모든 것이 반나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거절은 염두에도 안 뒀다는 듯 단호한 말에 떨떠름하게 알겠다 대답한 밀레는 소심하게 재희 옆으로 갔다. 경진이 그런 밀레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실물이 더 괜찮은데?”

“나, 날 알아?”

“사진으론 봤지.”

“난 실물도 봤어.”

옌이 자랑하듯 말하며 밀레에게 팔을 걸치고 친한 척해 댔다. 지난 몇 년간 밀레를 일방적으로 알고 있던 이들이라 그런지 내적 친밀감이 꽤 있는 모양이었다.

적응은 걱정 없겠네.

그럴 놈들이 아니지만, 혹여나 밀레를 내치면 어떻게 할지 고민이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사윤은 떠들썩한 뒤쪽을 힐끗 보았다가 새로운 숙소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비즈니스호텔이 아니었고.

“…와.”

한건주는 사윤이 민철의 카드로 거액을 긁은 보람이 있는 리액션을 보여 줬다.

이거지.

비로소 모든 게 원위치로 돌아온 느낌이다. 밀레를 발견한 이후부터 언짢은 기분에 조금씩 짓눌려 있던 사윤은 개운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낄낄거렸다.

“왜 그렇게 웃어요?”

악랄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라 건주가 반응했다. 사윤은 성인 남성이 세 바퀴 뒹굴어도 떨어지지 않을 침대 위에서 만족스럽게 눈을 휘어 보였다.

“이제 경매까지 이 호텔에서 안 나갈 거라.”

“…네?”

“룸서비스 마음대로 시키고 헬스장도 있을 테니 심심하면 거기 가서 몸 풀어. 카지노는 가지 말고.”

“진짜로 안 나가게요? 정보 조사해야 한다면서요.”

“그건 경진이 놈이 알아서 할 거니 너랑 나, 밀레, 이재희는 여기에서 죽치고 놀면 돼. 그래야 스콜피언 놈들이 똥줄 태우지.”

최고급 호텔이다. 스콜피언 놈들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을 테니 놈들은 대부호들도 곧잘 머물고 가는 이 호텔을 습격하진 못할 거였다. 그렇기에 일부러 유명인들이 자주 머물고 갔다는 호텔을 찾았다. 한국에 있을 민철이 뒷목 잡고 꺽꺽거릴 걸 생각하면 즐거움이 두 배였기에 악동처럼 웃으니 누군가의 고통을 감지한 건주가 생각이 많은 눈으로 사윤을 보다 침대에 누웠다.

“형이랑 있으면 지루할 틈은 없겠네요.”

당연한 말에 사윤은 코웃음으로 응답할 뿐이었다.

호화스러운 호텔에서 사치 부리는 시간은 유수처럼 흘렀다. 그사이 옌과 경진으로부터 스콜피언 놈들이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단 보고도 받고 자신이 들어갔던 숲에서 스콜피언 놈들을 봤다는 보고도 받은 사윤은 허탕을 쳤을 놈들을 생각하며 재밌어하다가 건주가 시끄럽다며 입에 넣어 준 과일을 먹고 잠잠해졌다. 그러다 밀레가 카드 게임 하자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들기면 같이 카드를 돌려 줬고 손이 심심하면 이재희의 방에 쳐들어가 라이를 불러내게 했다.

그렇게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니 마침내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패스파인더 경매 당일.

“이참에 쇼핑도 할까.”

겁이 많은 밀레는 호텔에 머물기로 하고 정장을 빼입은 다섯 명의 남자들이 경매장으로 향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