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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26)화 (226/266)

제226화. 패스파인더 경매장 (9)

“형이라고 부르지 말까요?”

“뭔 소리야? 잘 부르다 말고 왜.”

“형 말고 재희 형이요.”

재희 형. 그 말에 사윤은 제 눈썹이 산 모양을 그리는 줄도 모르고 건주를 노려봤다. 그딴 걸 왜 물어봐. 혀끝에 장전된 말이 나가질 않는다. 속이 은근하게 들끓고 눈앞이 간헐적으로 점멸하는 현상이 익숙했다. 제가 나름의 신경을 쓰며 기른 뱀이 먹이 좀 얻겠답시고 다른 자식들한테 쉭쉭거리며 재롱부릴 때 느낀 기분.

소유욕과 독점욕이다.

깨달음과 함께 사윤은 건주를 훑어보았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가 사 준 옷을 입고 있었다. 정확히는 제 카드로 산 옷을. 과거, 납치당해 왔더니 입을 게 없다고 툴툴대길래 카드를 주고 알아서 사 오라고 시켰을 때 산 옷이었다.

소유욕과 독점욕이라….

둘 다 느낄 만한데?

업어 키운 새끼가 남을 따르면 누구나 기분 나쁠 거였다. 자신이 한건주를 낳아 기른 건 아니었지만 납치 후엔 통장과 게이트로 길렀다. 이만한 소유욕을 느낄 자격이 충분하다는 소리였다.

자기 합리화가 발동됐다는 알림창을 못 본 척하며 해장용 커피를 한 모금 빨았다. 건주가 카페로 가면서 커피를 가져가는 게 말이 되냐고 핀잔했지만, 계속 속이 탔기에 이대로 가면 도착도 전에 커피가 거덜 날 판이었다.

“네 마음대로 해.”

“제 마음대로 불렀더니 기분 나빠 보이길래 물어본 건데요.”

“…….”

“부르지 말까요?”

아침부터 왜 이리 신경을 건들지.

기실 아침이 아니라 해가 중천에 뜬 대낮이긴 했지만 그래도 불쾌한 건 불쾌한 거다. 하필이면 건성으로 듣고 넘길 수도 없는 말이라 입에 물고 있던 빨대만 잘끈 씹어 괴롭힌 사윤이 단번에 반 컵이 넘는 커피를 들이켜곤 빈 일회용 컵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한참은 멀리 있는 쓰레기통에 정확히 던져 넣는 기술이 살벌했다.

까아앙! 플라스틱으로 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큰 소음을 내며 사라진 컵에 건주의 볼이 움찔, 경련했다.

“…누가 쓰레기를 그렇게 버려요.”

“네 마음대로 하라고.”

“지금은 그걸 물은 게 아닌데.”

“네 마음대로 해. 네 번은 안 말한다.”

자신이 같은 말을 두 번 이상 한 것도 기적이었다. 많이 봐준 거라 눈을 흘기자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린 이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사윤은 숨을 들이켜는 건주의 호흡기를 퍽 쳐 버리고 싶은 폭력성을 애써 참았다. 그래도 미국에 오고 나선 꽤 사이가 나쁘지 않았는데 성질머리대로 행동해 다시 그 삭막한 분위기 속에서 지내고 싶진 않았으니까.

힐끔.

혼신의 힘을 다해 주먹만 움켜쥐는 사윤을 곁눈질한 건주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형이라 부르지 마요?”

“알아서 하라고 몇 번을 말해.”

“왠지 그 말이 눈치 보고 살길 찾아 행동하라는 뜻으로 들려서요.”

“눈치가 늘었네.”

“형은 죽어도 안 늘던데 저만 느네요.”

“뭐?”

“카페다.”

당장이라도 분기탱천할 듯 눈을 곧추뜬 사윤을 카페를 가리키는 것으로 저지한 건주가 문을 열었다. 딸랑, 풍경이 한 번 울리고 보기 좋게 눈매를 휘어 접은 이가 안으로 들어오라 손짓했다. 누가 도망의 귀재 아니랄까 봐 빠져나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세 걸음 남짓 떨어진 장소에서 건주를 바라보며 서 있던 사윤은 입장에 붙여 둔 혀를 튕기며 안으로 들어섰다.

어제 밀레와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아 똑같이 커피 세 잔을 시키고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는 10분이 남았다.

톡톡.

테이블 위를 두드리고 있자 진동 벨을 받아 온 건주가 옆자리에 앉았다.

“그 사람한테 박힌 칩은 구형이래요, 신형이래요?”

“구형과 신형 사이.”

“…음?”

이도 저도 아닌 대답에 건주가 상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사윤이 한쪽 다리를 무릎 위로 걸치곤 턱을 괴었다.

“신형 제작하기 전에 테스트용으로 만든 걸 박아 둔 모양이야. 부수려고 하면 안에서 터지니 기운을 흘려서 기능 멈추게 한 뒤 시술해서 제거해야 된다더라.”

“그것도 옌이란 사람이 알려 준 거예요?”

“어.”

“그 사람은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어요?”

어떻게 알기는.

“직접 시험해 봤으니 알겠지.”

아마 지나가는 스콜피언 조직 놈들을 붙잡아 칩을 터트리는 것과 기능을 마비시키고 제거하는 것 두 가지를 직접 실행해 봤을 거였다. 옌이 얻어 오는 정보는 보통 암시장과 거래해서 얻거나 그런 식으로 발로 뛰어 얻거나 둘 중 하나였다.

스콜피언 조직 놈들이라면 대부분이 미친놈일 게 분명했다. 평범한 놈들 잡아 족치는 거로는 성에 차지 않는 옌의 손에 걸렸다면 더더욱. 그런데도 한건주가 알면 꺼림칙해할 것 같아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은 사윤은 궁금하다는 시선을 외면하고 문에 눈길을 고정시켰다.

언제쯤 오려나.

8분 남은 시간에 다시 기다림이 이어졌다. 사윤에게 집요한 눈길로 어떻게 알아낸 거냐고 묻던 건주는 대답해 줘야 할 쪽이 묵묵부답이자 포기한 건지 질문의 방향을 틀었다.

“어제 경진이란 사람이 보여 준 창은 뭐예요? 단순히 최신 기술이라고 하기엔 너무 말도 안 되는 것들이 많았는데.”

“아.”

그러고 보니 얜 처음 봤지.

이번엔 무시하지 않은 사윤이 어린애가 새로 산 로봇을 자랑하듯 만족스러운 눈으로 씨익 웃어 보였다.

“한경진 능력.”

“무슨 능력이길래 그런 창이 떠요?”

상대가 놀람을 입에 담는다. 사윤도 처음 경진의 능력을 봤을 때 저것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말도 안 되는 능력이지. 그래서 데려왔다. 거리의 소년을 밤쥐로 스카우트했고 매년 연봉을 올려 고액의 연봉으로 그를 붙잡아 뒀다. 저보다 돈이 많으면서 경진을 보호해 줄 이는 손에 꼽긴 하겠으나, 만약 그가 다른 곳에 스카우트돼 퇴사 후 타 길드로 재취업한다면 사윤은 그의 혀를 잘라 보낼지 아니면 그를 죽여야 할지 고민할 정도로 좋은 능력이었다.

“마인드맵.”

“…마인드맵? 종이에 생각 정리하는 그거요?”

“뜻은 그거랑 같긴 할 텐데 한경진 능력은 완전히 궤가 달라. 걔는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생각을 마인드맵으로 볼 수 있거든.”

“…그런 능력이 있다고요?”

“있지.”

그것도 한경진밖에 없는 전용 스킬이다.

사윤은 최근에 봤던 경진의 상태창을 떠올렸다. 쏟아지는 B 스킬의 향연 속에서 경진은 마인드맵, 정보 채집, 목차 개괄 등의 정보 수집과 정리 관련 스킬만은 모두 A급 이상이었다. 그게 스탯이 머저리 같은데도 경진이 A급이란 등급을 달고 있는 이유다. 단순 스탯만 보면 A급도 문 닫고 들어온 수준이었지만 사윤은 그에게 밤쥐 정보 관리 총괄직을 내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건주의 표정이 경직됐다. 제가 장난치거나 거짓말하는 게 아니란 걸 눈치챈 얼굴이었다. 구경하는 재미가 있어 웃고 있으니 진동 벨이 울렸다. 이번에도 건주가 나서서 벨을 가지고 나갔다가 잔을 들고 돌아왔다.

“그 능력이 정말이라면, 다른 길드로 못 보내겠네요.”

“못 보내지. 보낼 바엔 죽여야 하고.”

살벌한 말을 읊조리는 목소리는 덤덤했다. 물론 사윤도 경진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랬으면 그렇게 아끼고 좋은 것을 내어 주지 않을 거였다.

하지만 그가 저를 배신하고 다른 곳으로 간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 능력을 어디 다른 놈들에게 양보할 수 있는 능력인가.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경진도 백날 퇴사를 염불 외면서도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는 거다.

커피에 꽂힌 빨대를 매만졌다. 조금 전의 대답 때문인지는 몰라도 분위기가 무겁고 진득하게 침잠한 것이 느껴졌다. 사윤은 다시 시계를 봤다. 이제 4분 남았다.

설마 늦는 건 아니겠지.

멍청한 밀레라면 그럴 수 있었다. 귀한 사람을 누추한 곳에 앉혀 놓고 시간 낭비시킨 거라면 밀레의 멱살을 붙들겠다는 생각을 품었을 때 마침내 카페 문이 열리며 작은 남성이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밀레는 멱살을 지킬 수 있었고 사윤도 폭력을 삼갈 수 있었다.

“아, 안녕….”

쭈뼛거리며 다가온 그가 사윤의 눈치를 보다 자리에 앉았다.

“손.”

나직한 명령에 작은 손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사윤은 그의 손목을 잡아채고 서리 기운을 풀었다.

“어우, 뭔가 추운데?”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냉기에 추위를 호소할 무렵 밀레의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으으.”

그것이 싫은지 밀레가 투정에 가까운 소리를 내었다.

“참아.”

그러나 사윤은 배려 없이 계획을 속행했다. 손가락이 완전히 얼어붙기 직전 칩에서 느껴지던 파장이 끊어졌다. 세 번에 걸쳐 꼼꼼히 확인한 사윤이 인벤토리에서 풀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입에 물어.”

겁에 질린 밀레는 그것이 뭔지 물어보지도 않고 덥석 물었다.

“씹어. 마비초니까.”

“뭐?”

뒤늦게 놀란 남자가 입을 벌리자 풀이 툭 하고 떨어졌다. 사윤이 인상을 찌푸렸다. 손목을 잡고 있는 손아귀 힘이 억세지자 밀레는 주춤주춤 몸을 물렸다가 도망에 실패하곤 얌전히 초를 짓씹었다. 소가 여물 먹듯 우물거리고 있는 걸 확인한 사윤은 나머지 하나의 마비초도 밀레의 손목에 찢어 문대곤 칼을 빼 들었다.

“아니….”

예고 없이 꺼내 든 흉기에 놀란 건주가 의자를 틀어 사윤과 밀레의 몸을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가렸다.

“그런 건 좀 말하고 꺼내면 안 돼요?”

“말하면 뭐가 달라지니.”

익숙하게 잔소리를 무시한 사윤이 칩이 심어진 부위를 칼로 그었다. 시술을 빤히 보고 있던 밀레가 움찔거린다. 아프지도 않을 텐데 저러는 건 단순히 피가 무서워서 그런 걸 거다.

“고개 돌려.”

하여튼 하나부터 열까지 손이 가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었다. 조금 지치기도 해 한숨 쉬며 얘기하자 밀레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사윤은 칼을 조금 깊게 쑤셔, 첨예한 날 끝에 툭툭 걸리는 물체를 확인했다. 침으로 도구를 변경해 칩을 툭툭 건드려 가며 이동시키자 베인 부위에 칩의 모습이 보였다. 전갈 그림이 그려진 칩이었다.

“하.”

다시 보니 기가 막혀 사윤은 이를 사리물었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이 밀레를 향한 연민인지, 그를 내버려 둔 자신을 향한 혐오인지 스콜피언을 노린 분노인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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