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5화. 패스파인더 경매장 (8)
현시점에서 스콜피언 놈들이 가장 경계하는 건 미국 정부도, 길드 협회도 아닌 스콜피언의 수장이었던 데른을 죽인 자신일 것이다. 제게 사막의 형벌이란 비장의 수단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안 이상 놈들은 새로운 방법을 고안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틀어막을 또 다른 루트를.
그걸 고민하고 있을 때 소문이 돌았다고 가정을 해 보자. 어떻게 하면 권사윤을 막을 수 있을지 궁리하고 있는데 밤쥐 길드장이 싸고도는 놈이 있다는 소문이 고위 각성자들 중심으로 차츰차츰 퍼지는 거다. 처음에는 안 믿겠지. 그러나 소문이 계속 돌면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혹시나 싶어 사람을 보내 봤더니 정말 아끼는 것 같단다. 그럼 무얼 해야 할까.
검증을 해야지.
검증.
그래, 놈들이 구태여 한건주를 납치해 죽이려고 시도했던 건 자신을 향한 경고가 아니었다. 스콜피언이 돌아왔다는 선언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가장 큰 목적은 검증에 있었다.
제가 한건주를 아끼는 게 정말인지, 그 정도가 소문과 같은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난 그걸 물불 안 가리고 쫓아갔지.
떠오른 전적에 사윤이 이마를 짚었다. 그땐 눈이 돌아가 있어 여기까지 생각할 여력이 안 됐다.
한건주를 쫓아간 게이트 안에서 자신은 그가 제 약점이라는 걸 자각했다. 그 사실을 한건주를 납치했던 스콜피언 놈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제가 생각해도 유난 떨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인터뷰도 그따위로 했지 않은가.
“시발.”
“……?”
상대를 비웃다 말고 돌연 홀로 심각해져 굳어 있다가 욕을 토해 내는 사윤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사윤은 남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제 머저리 같은 짓거리를 욕했다.
누가 오든 한건주를 제 손에서 지켜 낼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막의 형벌이 놈들의 손에 들어간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직 경매가 열리지 않았고 사막의 형벌은 사윤에게도, 스콜피언에게도 넘어가지 않았지만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쾌했고 불안했다.
“왜 그래요?”
모두가 눈치를 보고 있을 때 먼저 입을 연 건 건주였다. 사윤은 입술을 짓씹었다 놓으며 고민했다. 이걸 지금 말해야 할지, 숨겨야 할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구태여 얘기해서 겁을 줄 필요가 있나?
해외에는 오랜만에 나왔을 텐데 주변을 경계하는 데 진을 빼게 하고 싶진 않았다. 주변 경계는 혼자 해도 충분했다. 그까지 고생시킬 생각은 없었다.
제멋대로 데려온 거니 적어도 미국에 있는 동안은 편안하게 해 줄 생각이었는데 계획이 죄 일그러졌다. 짜증과 후회가 동시에 치민 사윤이 어금니를 꽉 물자 건주가 탄식을 흘렸다.
“문제 생겼어요?”
이런 눈치는 좀 없어도 되는데.
모른 척 넘어가 줬으면 했지만 그럴 녀석이 아니다. 여기서 어물쩍 넘긴다면 분명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게 한건주였다. 그의 집요함을 알고 있었기에 사윤은 포기를 선언하듯 허공으로 긴 숨을 뱉어 내고 순순히 고백했다. 스콜피언이 그를 납치했던 목적과 사막의 형벌이 놈들에게 들어갔을 때의 위험성까지. 조금 전의 생각을 가감 없이 얘기하자 한건주가 눈을 깜빡였다. 생각보다 태연한 얼굴이었다.
죽을 수도 있다는데 왜 태연하고 지랄이야?
속이 타는 건 사윤이었다. 누가 보면 제가 아니라 그가 불사의 능력을 지닌 줄 알겠다며 속으로 힐난할 때 건주의 입이 열렸다.
“그 사막의 형벌이란 거 경매장 물품으로 나온다면서요.”
“어.”
“형 돈 없어요?”
“뭐 이 새끼야?”
욕설이 나간 건 습관이었다. 모욕적인 발언을 하길래 생각할 틈도 없이 살기를 흘린 사윤이 건주를 흘겨보자 그가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형이 사요.”
“…….”
“경매에서 이기면 형이 갖는 거잖아요. 돈으로 사면 되죠.”
“내가 산다고 그게 무조건 내 손에 들어오는 게 아니니까 이러지. 그 새끼들이 중간에서 가로챌 수도….”
“뺏길 거예요?”
툭 치고 들어온 말이 신경질을 건든다. 되바라진 애새끼에 할 말을 잃고 있자 건주가 태연히 말을 이었다.
“안 뺏기면 되죠. 뭘 사서 걱정해요? 안 그러던 사람이.”
쓸데없이 덧붙은 사소한 핀잔까지 완벽하게 한건주스러운 대답이었다. 사윤이 눈만 깜빡거리자 경진이 나서서 손뼉을 두 번 치고 시선을 끌어모았다.
“건주 놈 말이 맞아. 경매에서 이기고 안 뺏기면 되지. 지금이라도 애들 더 불러 모을 수도 있으니 쓸데없이 걱정할 필요 없지 않아? 애초에 경매장 같은 넓은 곳에서 사고 치는 건 스콜피언이 아니라 옌이 전문이지. 옌만 믿고 있어도 반은 갈 것 같은데.”
일리가 있는 말이다. 사윤은 뒤늦게야 자신이 지레 겁먹었다는 걸 깨닫고 헛숨을 토했다. 자신이 경매에서 지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이기고도 스콜피언의 개 같은 수작질에 유물을 뺏겨 한건주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 가정. 아주 실낱같은 가능성 하나가 심기를 거스르다 못해 뇌에 꽂혀 극단적으로 생각해 버렸는데 다시 침착하게 곱씹어 보니 일어날 확률이 아주 적었다.
옌도 있었고 경진이 말한 대로 불안하면 A급 이상들로만 길드원들을 추가로 데려오면 된다. 그리고.
“비열한 짓은 나도 할 줄 알지.”
“그걸 뭘 그렇게 새삼스럽게 말해? 인생의 절반 가까이 그렇게 살아왔으면서.”
“매를 벌지?”
“폭력 반대.”
깐족거리던 경진이 다시 뒤통수를 보호하며 물러났다. 사윤은 피식, 호선을 그렸다 지우곤 머릿속을 환기시켰다.
인정하기 싫지만 두 사람의 말이 옳았다. 미리 걱정할 필요 없었고 스콜피언은 이미 한 번 처참하게 밟아 놓은 놈들이다. 벌레가 꿈틀거린다고 겁먹어서 되겠나.
경매장에서 수작을 부릴 거면 부리라고 해라. 그래 봤자 졸렬한 새끼들밖에 못 되는 거고.
“빌런은 간지지.”
사윤은 정보전에서 우위를 선점해 놈들을 다리 꼬고 지켜볼 생각이었다. 다시 한번 사악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 사윤의 표정을 차지했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한. 아니, 제정신이었다가 도로 미쳐 버린 듯한 사윤을 보며 경진은 안심했다.
“경매가 열리는 날까지 정보는 최대한 긁어모을게. 승부처는 정해진 거지?”
“그래.”
패스파인더 경매가 열리는 당일.
그날 스콜피언 놈들의 계획을 친절하게 깨부수면 되었다.
경진과 마주 보며 웃으니 건주가 따라 피식 웃었다. 그 사이에서 함구령이라도 받은 듯 조금 전부터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재희만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이 왜 그래?”
사윤이 그 점을 짚자 볼을 긁은 남자가 객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뭔가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된 것 같기도 하고 망치는 악당이 된 것 같기도 해서 기분이 묘합니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이 와중에도 세상 구하기나 생각하고 있었다니. 사윤은 조금 질린 얼굴로 보다가 옌이 오는 길에 사 왔다며 자랑스럽게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와인병을 들었다.
“그럼 망치러 온 구원자 하든가.”
기분이 그럴듯한 게 오늘은 술을 마셔도 괜찮을 것 같은 밤이었다.
* * *
“형.”
“…….”
“형, 일어나요. 나가야 해요.”
눈꺼풀이 무거워 죽겠는데 누군가 자꾸 제 몸을 흔들어 깨웠다. 인상을 팍 쓰며 겨우 시야를 확보하니 한건주의 얼굴이 보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까지 눈을 깜빡거리며 멍하게 있던 사윤이 불현듯 신음 같은 탄성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웬 두통인가 싶어 이마를 붙잡고 주변을 둘러보자 양주 열댓 병이 테이블 위에 진열된 게 보였다.
희미했던 기억이 선명해진다. 사윤이 입을 다물었다.
저거 다 내가 마신 거냐?
그리 묻고 싶었지만 기억이 선명한 탓에 답을 알고 있어 묻지 않았다. 단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마셨다고 고삐가 풀린 건지 아주 제대로 마셨다. 취할 정도로 들이부은 건 오랜만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본 사윤은 술주정을 부리진 않은 것 같아 안심했다. 한건주를 앞에 앉혀다 두고 웃어 보라 명령한 기억이 있긴 한데 맨정신으로도 할 법한 짓이라 그냥 넘어갔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독 저항이 약해졌나.
1년 전쯤과 비교해 봤을 때 훨씬 일찍 취했다. 저항력이 낮아진 것 같아 묘하게 불편한 기세로 양반다리한 채 침대에 앉아 있자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며 방을 치우던 건주가 병 하나를 내밀었다. 꿀물이었다.
“어디서 구했어?”
“재희 형이 사 줬어요.”
“형?”
콧잔등을 찡그렸다. 한건주가 이재희를 형이라고 부른 적은 처음이었다. 매번 그 사람, 이 사람, 저 사람 따위로 불렀지 형이라니.
자신이 잠든 사이 뭔 일이 있던 건가 싶어 눈을 깜빡이자 한건주가 바닥에 널브러진 셔츠를 주웠다. 익숙한 셔츠였다.
내 건데, 저거.
사윤의 고개가 바로 아래로 향했다. 옷을 벗고 잤나 싶었는데 제 몸엔 하얀 셔츠가 곱게 입혀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이즈가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했다.
시선이 향하는 방향에서 의문을 눈치챈 건지 건주가 입을 열었다.
“형 옷은 어제 토가 묻어서 빨고 바닥에 널어 뒀어요.”
“아씹.”
얘기하니까 생각났다. 경진이 제 어깨에 팔을 걸쳤다가 그대로 토사물을 쏟아 낸 장면이.
몹시도 불쾌한 기억에 몸서리치며 인상을 구긴 사윤을 놔두고 옷을 한데 치운 건주가 의자를 빼 앉으며 설명을 이어 갔다.
“형이 입고 있는 옷은 밤중에 저랑 재희 형이랑 나가서 사 온 거예요. 사이즈는 제가 골랐는데, 생각보다 크네요.”
흰 셔츠를 걸친 사윤을 가만히 응시하면서 얘기한 이에 사윤이 꿀물을 꽉 쥐었다.
“넌 시발 형 소리가 그렇게 쉽니.”
“…네?”
갑작스러운 욕설에 건주가 당황했다. 사윤은 혀를 차며 신경질적으로 꿀물을 내려놓고 화장실로 향했다.
“…뭐야.”
문 하나를 두고 버려진 건주가 멍하게 있다 이내 작게 웃었다. 시계를 쳐다보니 3시가 다가온다.
밀레를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