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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24)화 (224/266)

제224화. 패스파인더 경매장 (7)

“그러니까, 그때 형님이 챙기던 밀레라는 사람이랑 여기서 만났다고?”

모두가 숙소로 복귀하고 정보 공유를 위해 모인 밤, 낮에 있던 이야기를 들은 경진이 뭐 이런 인연이 다 있냐며 놀라워했다. 밤쥐의 간부면서도 모든 정보를 총괄하고 있던 그는 밀레와 사윤의 사이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스콜피언에 속해 있을 때의 일은 알지 못했지만 사윤이 밀레에게 어떤 부채감과 의무감을 느껴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기분 나쁜 표정 짓지 마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라며 쓸데없이 아련해지는 이의 머리통을 사윤은 가볍게 쳤다. 뻑 소리가 나며 경진의 고개가 아래로 꺾였다.

“아우씨. 형님은 걸핏하면 손만 나가는 이거. 이 손버릇 고쳐야 한다니까?”

얼얼한 뒤통수를 매만진 경진이 건주를 보며 고쳐야 한다는 말을 한 번 더 얘기했다. 손버릇이 험악한 건 사윤인데 왜 제게 당부하는지 몰라 얼떨떨해한 건주는 분위기상 뭐라 할 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경진은 그제야 만족해했다. 사윤은 그 광경을 보다 때리기 좋게 생긴 머리를 노려보았다.

“폭력 반대.”

위험을 감지한 경진이 뒤통수를 보호하며 재빠르게 물러났다. 잠시 소란이 일고 분위기를 다시 가라앉힌 건 재희였다.

“그럼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밀레라는 분의 손목에 박힌 칩을 제거하는 것과 데른이란 사람이 살아 있는지 확인하는 거네요.”

깔끔한 중간 정리였다. 샛길로 샐 뻔했던 이야기의 흐름을 능숙하게 잡고 이끄는 이에 사윤은 생경함을 느꼈다. 이 어수선한 분위기에 저 처연한 인상의 남자가 제법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색이 다르다 여겼는데 시간이 약인지 이젠 제법 번듯한 밤쥐 길드원 같았다.

녹아들었네.

제 길드원들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아무나 막 받아들이진 않았다. 간부들의 경계심을 모조리 허물고 한 자리를 차지한 그에게 간부 자리를 걸고 밤쥐 가입을 제안할까 고민하고 있으니 건주가 툭 하고 사윤을 쳤다.

“묻는데요.”

“아.”

아직 회의 중임을 자각한 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밀레의 칩은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데 문제는 그 새끼 손목에 박힌 칩이 내가 알던 칩이 맞냐는 거지. 새로 만들어 기능이 추가된 칩이라면 함부로 못 부숴.”

“그건 내가 알아볼게.”

옌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들어 역할 하나를 채 갔다. 암살 관련해선 지식이 뛰어난 게 옌이다. 암시장의 정보상과도 친분이 있을 테니 맡겨 두면 그럭저럭 괜찮은 소식을 물어다 올 거였다. 사윤이 긍정하자 옌이 곧바로 창문을 열었다.

“그럼 알아보고 올게. 새벽쯤엔 그 칩이 구형인지 신형인지 알 수 있을걸?”

눈을 찡긋거리며 웃은 남자가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멀쩡한 문을 두고 나가는 그를 방에 남은 두 사람이 몰상식한 이 보듯 응시했다. 태연한 건 옌의 기행에 익숙해진 사윤과 경진뿐이었다.

“여기 10층 아니에요?”

“놔둬. 제일 빠른 길로 알아서 가겠다는데.”

옌 녀석의 성격이 원래 그렇다. 사윤이 아는 그는 어차피 익혀야 할 거면 불이 강해야 잘 익는 거 아니냐며 요리할 때도 강불만 고집하고, 엘리베이터가 안 오면 기다릴 바엔 직접 내려가는 게 낫다며 닫힌 문을 강제로 열고 추락하는 놈이었다. 정상인 선에서 활동하지 않으니 이젠 창문 열고 뛰어내리는 것 정도는 일상이다. 실제로도 대여섯 번 본 적이 있었기에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사람이 뛰어내렸는데도 덤덤한 사윤과 경진을 번갈아 보던 건주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칩 관련 조사는 옌한테 맡기고 다음은 데른에 관한 건데. 주워 온 정보 있냐?”

옌의 부재를 자연스럽게 덮은 사윤이 경진에게 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요 인물 세 명의 정보 있는데 다 보여 줘?”

“일단 펼쳐 봐.”

손을 까딱이자 경진이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눌렀다. 초록색 홀로그램 창이 눈앞에 떠 건주와 재희가 동시에 놀랐다. 경진이 익숙하게 손을 뻗어 창을 몇 번 툭툭 건드리고 선을 긋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반투명한 허상의 알림창 위로 세 명의 사람 그림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그림 상단에 수십 개의 동그라미가 떴다.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한테 스콜피언에 대해 물었고 반응이 이상한 세 명을 추려 온 거야.”

경진이 설명을 시작했다.

“뒷조사는 아직 안 했으니 가명으로 설명할게. 대충 제임스, 앨리스, 피터 정도면 무난하니까 먼저 제임스부터.”

세 명의 사람 그림 중 하나를 끌고 온 경진이 그 위에 떠오른 동그라미를 하나씩 가운데로 끌고 오며 그 속에 적힌 단어에 대한 정보를 나열했다. 가족, 성적, 돈 문제, 성적 고민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각종 정보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스콜피언.”

불필요한 정보를 훅훅 넘기며 설명한 경진이 홀로그램 창에서 시선을 떼고 사윤을 바라보았다.

“전에 형님이 아델리아의 무덤에 가서 주워 온 정보와 전부 일치해. 전형적인 사이비 교단의 형태로 비각성자, 각성자 할 것 없이 사람을 끌어모아 덩치를 불리고 있어. 입단 자체는 자유. 일반 등급에서 정예 등급으로 올라가려면 천만 원 이상의 금액을 요구하고 그 정예 등급 중에서 각성자인 엘리트를 뽑아 길드원으로 만든다는 모양이야. 정예부턴 돈 대신 아이템을 받는 것 같고 길드에 가입하면 포상금과 스콜피언의 보호, 각종 아이템을 줄 수 있다고 지속적으로 얘기해 가입 의지를 끌어 올리는 것 같아. 가입하지 않더라도 스콜피언이란 단체에 소속되는 증표만 받으면 미국 시내에서 안전하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말로 일반 시민도 영업하고 있고. 여기까지가 기본 틀이고 더 안으로 들어가려면 앨리스를 파 봐야지.”

그리 얘기한 남자가 기존 인영을 훅 치워 버리고 긴 머리의 여인 그림을 가운데로 끌고 왔다.

“앨리스. 자세한 신원은 알 수 없는데 여기 보여?”

경진이 동그라미 하나를 끌고 와 손끝으로 가리켰다.

“정예 길드원. 앞선 제임스와 달리 단순한 스콜피언이 아닌 정예 길드원까지 깊게 생각하고 있는 걸 보면 높은 확률로 스콜피언의 정예 멤버거나 정예를 목전에 둔 사람이겠지. 관심이 가서 대가를 치르고 파 봤는데 녀석이 코일과 접촉하는 장면을 확인했어.”

“코일?”

사윤이 눈살을 찌푸렸다. 경진이 이 대화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할 건주와 재희를 보며 배려차 길게 설명했다.

“그래. 스콜피언 간부 그 자식. 죽은 줄 알았는데 숨어 있던 거지. 놈이 발견된 거면 사실상 스콜피언의 남은 간부들이 뭉쳐서 재기를 노리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터. 얘는 정예 길드원이 아니라 스콜피언이랑 연결된 상인으로 보였는데….”

경진이 마지막 인영을 끌고 오더니 모든 동그라미를 치우고 단 하나의 원만 가운데로 가져왔다. 두 음절 단어에 모두의 시선이 꽂힌다.

“…제물?”

건주가 작게 뇌까리자 고개를 끄덕인 경진이 말풍선 하나를 더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 더. 신기.”

“…….”

“형님이 가져온 데른이 살아 있다는 정보까지 합쳐 보면 아무래도 얘네, 부활 신기 얻은 것 같다.”

경진이 한숨을 내쉬며 창을 끄는 것으로 정보 공유를 마무리 지었다.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윤이 고개를 젖히자 바로 뒤에 놓여 있던 침대에 뒤통수가 처박혔다. 목이 꺾일 정도로 각도를 높여 하늘을 본 사윤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

“미친 새끼들. 일반 시민까지 긁어모으는 목적이 이거였네.”

왜 스콜피언 놈들이 그들답게 살해와 폭력을 행사하며 거리를 활보하지 않고 사이비 교단 같은 짓을 하나 싶었는데 결론이 나왔다.

제물로 바칠 사람을 긁어모은 다음 부활 신기를 사용해 데른을 되살리려는 듯했다.

미국에 직접 안 왔으면 이거 엿 될 뻔했네.

단순히 길드원만 보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저 상황에서 이번 유물까지 얻으면 겁날 게 없겠네.”

사막의 형벌만큼 사람을 협박하기에 좋은 게 없다. 무슨 짓을 하든 즉사인데 그걸 들이밀며 협박할 때 겁먹지 않을 이가 있을까? 불사 특전을 지니지 않은 이상 누구든 기겁할 거였다.

게다가 사막의 형벌은 스콜피언의 상징성이라고 봐도 무관했다. 그걸 되찾은 순간 일부의 사람들은 전성기 시절 놈들을 떠올릴 거였고 그 시절의 놈들이 되돌아올 것이라는 불안에 떨 거다. 두려움이 얼마나 큰 힘인지 사윤은 알았다. 그 힘은 지금은 사라진 블랙 지역을 다시 스콜피언 놈들이 집어삼키고 영역까지 확장하게 해 줄 것이다.

오리무중에 가까웠던 놈들의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그 형태가 그려지자 사윤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내가 또 남 잘되는 꼴 못 보지.”

모르고 있다가 역공당했다면 뼈 아팠겠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이쪽이 먼저 꼬리를 밟았다. 놈들이 저를 압박하기 위해 한건주를 건든 게 오히려 독이 된 꼴이었다.

…아니지.

생각을 이어 가던 사윤이 문득 뇌리를 스치고 가는 가정 하나에 고개를 뻣뻣하게 세워 건주를 바라보았다.

한건주를 건든다면 제게 정보를 흘릴 수도 있다는 걸 놈들이 몰랐을까?

왜 그 위험을 감수하고도 구태여 한건주를 건드렸을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나?

물음표가 얽히며 이어진 생각의 종점. 호흡이 부족해졌다. 뇌가 흔들리는 기분을 맛본 사윤이 건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딱딱히 굳었다.

사막의 형벌.

그게 자신에겐 안 통한다는 걸 놈들은 안다. 알 만한 사람은 제가 죽어도 되살아나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불사신이란 소문이 괜히 돌았겠는가.

그렇다면 한건주는?

그에게도 사막의 형벌이 무용할까?

갑작스럽게 떠오른 의문들은 소나기처럼 쏟아져 사윤의 미소를 씻겨 냈다.

사윤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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