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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23)화 (223/266)

제223화. 패스파인더 경매장 (6)

‘어려 보이는 아이들이구나. 열네 살? 열다섯 살이니?’

사윤과 밀레를 번갈아 본 남자는 밀레의 나이를 두 살이나 낮게 불렀다. 사윤의 눈에도 열다섯 살 무렵의 아이로 보일 정도였으니까 확실히 서양 사람치고 성장이 더딘 편이긴 했다. 나이를 듣고 그가 저보다 형임을 알았을 때의 충격이 되살아나 새삼스럽게 쳐다보자 얼굴이 붉어진 밀레가 고개를 저었다.

‘열일곱 살이요.’

‘열일곱 살?’

놀란 듯 되물은 남자가 사윤을 돌아봤다.

‘너도?’

‘아뇨. 전 열여섯 살이요.’

‘흠. 둘 다 생각보다 나이가 많네.’

‘많, 많으면 안 되나요?’

밀레가 초조했는지 다급하게 덧붙였다.

저 멍청이.

저렇게까지 안달 난 티를 내서 좋을 게 없는데 밀레는 지나치게 솔직했다. 사윤은 한숨을 내쉬며 밀레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고 한 발 물러났다.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면 돌아갈게요.’

‘말이 서툴구나. 어디에서 왔니?’

‘…중국이요.’

‘음. 동양인들은 인기가 적지만 애호가들은 많지.’

‘……?’

이상한 말이었다.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밀레에게 통역을 요청하자 밀레가 서툰 한국어로 남자의 말을 해석해 주었다. 귓속말로 전해진 이야기를 들은 사윤이 눈살을 찌푸렸다. 여전히 제가 이해한 것과 비슷한 뜻이다.

조금 불길한데.

사윤은 감이 좋았다. 특히 불길하고 수상한 것을 감지하는 실력은 더욱 뛰어났다.

이상한 조짐을 느낀 사윤이 밀레의 팔을 뒤로 끌었다. 가자. 눈짓으로 그리 신호를 보냈을 때, 검은 차에서 사람들이 달려 나왔다.

‘어?’

밀레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뛰어!’

소복하게 쌓여 가는 눈 위에서 추격전이 펼쳐졌다.

“형. 아까부터 왜 대답이 없어요?”

불쑥 들린 목소리가 천둥처럼 퍼졌다. 고요한 세상에 기습적으로 침투한 음성에 퍼뜩 눈을 뜨자 시야가 일순 새하얗게 물들었다. 달음박질로 도망치는 소년들의 모습이 그 위로 펼쳐진다. 백일몽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툭 하고 누군가 어깨를 건드렸다.

“형? 저희 다 왔는데.”

그리 얘기한 남자가 확인해 보라는 듯 고갯짓으로 숙소를 가리켰다. 사윤은 그제야 모든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과거가 장막처럼 걷히고 현재가 보인다. 그 쇠 냄새와 시체 썩어 가는 악취로 가득했던 겨울의 골목이 눈 깜짝할 사이 사라졌다. 시야에 남은 건 방금까지 떠올린 기억과 대비되게 화려한 호텔이었다.

동냥을 위해 밀레와 함께 고급 호텔까지 다가갔다가 물을 흐린다며 쫓겨난 적이 있었다. 그때 사윤은 이런 멋들어진 호텔에서 호화스러운 일주일을 보내고 싶다 생각했다. 밤쥐로 자리 잡고 막대한 부를 벌어들인 이후엔 보복이라도 하듯 멀쩡한 집을 내버려 두고 호텔에서만 지낸 적도 있었다. 전부 잊고 있던 옛 기억이다.

새삼스럽네.

어느덧 자신은 이만큼이나 흘러왔다.

그 옛날. 세상 물정도 제대로 몰랐던 열여섯 살에서 열일곱 살 사이의 소년에서 벗어나 성인이 되었고 지긋지긋했던 궁상맞은 시절과 달리 돈을 물 흐르듯이 써도 괜찮은 재력가가 되었다. 10년 전의 일은 까마득한 과거가 되어 무용담이 되었을 뿐이다.

분명 그랬어야 하는데.

“넌 왜 아직 과거에 머물러 있어.”

“…네?”

무심코 혼잣말이 나왔다. 사윤은 제게 하는 말인 줄 알고 조금 당황한 듯한 건주를 힐끔 보다 호텔로 들어갔다. 손을 잡은 채였기에 곧 건주 역시 따라 들어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눌렀던 층에 내린다. 카드 키를 찍고 방 안으로 들어서는 내내 정신이 몽롱했다.

몸이 휘청거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을 부축하듯 양쪽 어깨를 잡아 지탱한 건주가 사윤을 침대까지 데려갔다. 침대에 걸터앉은 사윤이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이 신경 쓰여서 그래요?”

“…그래 보이냐.”

“네.”

“그럼 그런 거겠지.”

모호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미간을 좁힌 건주가 맞은편 침대에 앉으며 사윤을 응시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사윤은 추격에서 끊긴 기억을 다시 불러왔다.

모든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때의 가팔랐던 숨도, 빠르게 뛰었던 심장도, 놓을 수 없어 꽉 잡았던 손도.

사윤의 시선이 창밖으로 돌아갔다.

“예전에 스콜피언 놈들한테 붙잡혀 있던 때가 있었는데 밀레는 그때 만난 놈이야.”

“…몇 살이었는데요?”

“열여섯 살.”

“…….”

“처음 놈들을 마주쳤을 때 도망쳤는데 그대로 잡혔어. 그땐 내가 S급이 아니라서 허접이었거든. 뛰어 봤자 벼룩이었지.”

사윤은 개그라도 치듯 픽 웃었지만 상대는 그를 따라 웃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이야기는 쉼 없이 이어졌다. 스콜피언에게 붙잡혀서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폭력 속에 살았고 어떤 것을 먹었는지, 당시 스콜피언 놈들의 목적이 뭐였는지 등. 빠르고도 건조하게 설명하듯 얘기한 사윤이 무릎 사이로 손을 떨어트렸다. 몸에 힘이 빠졌다.

“사람을 죽이는 법도 거기서 배웠지. 이전까지는 요령 없이 검만 휘둘렀는데 어디를 공격해야 효과가 좋고, 어디가 급소고, 칼을 어느 방향으로 넣어야 출혈이 적은지. 지금 생각해 보면 밀레는 겁이 많았으니 나라도 암살자로 키우려 했던 것 같은데… 실패했지.”

“왜요?”

“내가 반년 정도 있다가 도망쳤거든. 밀레와 함께.”

사윤은 그때 생각이 나 웃었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쫓아오는 놈들을 보란 듯이 따돌렸다. 놈들에게서 훔친 돈으로 택시를 열세 번쯤 갈아탔고 항구에 도착했다. 그때까지 스콜피언 놈들은 제가 탄 택시나 쫓고 있었을 것이다.

“혼자 가기 싫다고 울며불며 떼를 쓰는 밀레를 배에 태웠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배였는데 일단 미국 안에 있는 것보단 어디로든 도망치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땐 내가 걔를 구할 힘이 없었으니.”

밀레는 특유의 그 순진한 눈망울 가득 눈물을 매달고 사윤을 붙잡았다. 차라리 같이 가자고 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반년 만에 다시 나타난 시스템이 고난을 잘 이겨 냈다는 우습지도 않은 시스템창을 띄우며 다시 게이트로 복귀시키겠다 얘기한 탓이었다.

밀레가 같이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는지는 둘째 치고 그를 그 위험한 필드에 집어넣을 순 없었다. 자신은 죽어도 되살아나니 괜찮았지만 밀레는 들어가자마자 죽을 거였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홀로 보냈다.

“나는 게이트로 들어갔어. 그리고 거기서 반년이 넘게 이를 악물고 싸웠지. 이전에는 별 의욕도, 흥미도 없었는데 확실히 원수 놈들이 생기고 나니 의욕이 생기더라.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은데 강해지는 것 말곤 방법이 없었어.”

미친놈처럼 공략에 임했다. 싸우고 살아남고, 죽고 되살아나고. 그 기이한 과정을 반복한 끝에 사윤은 마침내 A급에 도달하며 멸망한 세계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데 성공했다. 보상을 받고 사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보상으로 받은 돈으로 밀린 요금을 납부한 뒤 핸드폰을 확인하는 거였다. 밀레에게 연락하라고 번호를 건네줬는데 밀레는 용케 그 번호로 연락을 해 왔다. 일주일에 한 번씩. 스무 개도 넘는 문자가 쌓여 있었다.

가장 최근 연락은 밀레가 스콜피언한테 발각돼 다시 붙잡혔다는 얘기였다. 눈이 뒤집힌 사윤은 미국으로 넘어가 스콜피언과 부딪쳤다. 처음에는 패배했으나 밀레 하나만큼은 간신히 빼내 올 수 있었다. 자신이 도망가고 새로운 룰이 생긴 건지, 밀레의 손목에는 못 보던 칩이 처박혀 있었다.

“위치 추적 칩이지. 데른이 명령하면 폭발하는 장치도 깃들어 있었고. 그땐 칩을 어떻게 부수면 될지 감이 안 와서 밀레의 손목을 단번에 벤 다음 최고급 포션으로 회복시키는 짓을 했어.”

밀레가 사윤을 겁내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아프다며 비명을 지르는 밀레를 붙잡고 포션을 쏟아부었다. 하나뿐인 최고급 포션이었지만 죽다 살아나는 사윤에겐 포션의 가치가 그리 귀하지 않았다. 팔아넘긴다면 돈을 꽤 벌겠지만 푼돈을 얻자고 밀레를 버릴 순 없었으니 별수 없었다.

그땐 그게 사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다음 밀레를 이탈리아에 보냈지.”

남은 돈을 거의 털어 넘겨주곤 이탈리아에서 몸을 숨기고 있으라고 했다. 이후 사윤은 시스템의 명을 받아 밤쥐 길드를 만들었고, 길드를 키웠으며 성장한 그 길드로 스콜피언과 싸웠다. 우여곡절이 많았고 실패도 겪었지만 끈질긴 도전 끝에 최종적으로 얻어 낸 결과는 승리였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 낸 복수. 사윤은 그 즉시 밀레를 데려와 그에게 경호원을 붙여 주었다. 밤쥐 길드의 마크를 보란 듯 옷에 박아 넣은 경호원이었다. 그가 밀레를 지키고 있다는 건 밀레가 제 보호 아래에 있다는 뜻과 같았다. 스콜피언과 밤쥐의 격전을, 데른을 죽인 제 실력을 알고 있는 이들은 섣불리 밀레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러나 밤쥐가 만들어지고 매년 정보원을 보내 밀레의 소식을 전해 듣던 사윤은 문득 지긋지긋함을 느꼈다. 언제까지 밀레를 보고 있어야 할지, 그가 성년이 된 지도 오래인데 아직도 제 보호가 필요할지, 그와 자신의 관계는 어디까지 이어질지 등. 염증에 가까운 의문을 느끼다 밀레만 생각하면 자동으로 연상되는 과거가 끔찍하게도 싫어 신경을 거뒀다.

그날이 사윤이 밀레와의 질긴 인연을 끊기로 결심한 날이었다.

거기까지 말하긴 지나친 것 같아 스콜피언을 쳐 승리했다는 말 이후로 설명을 이어 가지 않은 사윤이 침대에 누워 밀레의 말을 곱씹었다.

내가 그를 버린 걸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반쯤은 억울했다.

사윤은 그저, 처절했던 자신의 과거로부터 완전히 분리돼 남들 눈에 비치는 자신의 이미지대로 살고 싶었을 뿐이었으니.

시스템 하나만으로도 비참한데 자신이 누군가의 발밑에서 기었다는 것까지 받아들이고 수용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스콜피언에서의 기억은 제 이미지에 해만 끼쳤고 위엄을 해쳤다. 길드원들이 기어오를지도 몰랐으니 사윤 나름대로 최선의 수를 둔 거였다.

하지만 그게.

“…밀레에겐 최악의 수였지.”

눈이 피로해 한 번 길게 감은 사윤이 한숨을 내쉬자 건주가 다가와 물병을 건넸다. 딱히 갈증 난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물을 보니 또 마시고 싶어졌다. 뚜껑을 돌려 몸을 일으킨 뒤 입을 대자 건주가 말을 걸었다.

“그럼 그때 그 스콜피언이 지금 다시 활동하는 거예요? 형이 죽였다는 데른이란 사람도 살아서?”

“전자는 맞고 후자는 모르지. 이제 확인해 봐야 하고.”

경진이 놈이 오면 회의를 시작할 생각이었다.

핸드폰을 들어 경진에게서 온 연락이 없는지 확인하고 있으니 침대 한쪽이 푹 꺼졌다. 어느새 옆에 앉은 한건주가 제가 그랬듯 창밖을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저도 도울게요.”

담담하게 내뱉는 협력 선언에 사윤이 실소했다.

“네가 안 도와도 내 선에서 끝내.”

“그래도 도울게요.”

“뭐 사람 상대하는 거랑 몬스터 상대하는 건 다를….”

“도울게요.”

“…….”

막무가내였다. 거듭 얘기하게 하지 말라는 듯 반복해서 대답하고 저를 노려보는 이에 사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대로 해라.”

방관을 가장한 허락에 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사윤을 빤히 보다 침대 아래 발끝을 까딱거렸다.

“전에도 이렇게 얘기하면 좀 좋아요?”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투정은 과거를 저격하고 있었다. 슬그머니 어깨에 머리를 기대 오면서 구시렁거리는 이에 사윤은 대답 없이 어깨를 한 번 튕겼다. 머리가 위로 퉁 하고 올라가진 건주가 아, 하고 짧은 신음을 흘렸다. S급이라 아프지도 않을 텐데 엄살이 심한 새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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