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2화. 패스파인더 경매장 (5)
얼마나 오래됐을까. 사윤이 처음 미국에 발을 들인 수단은 비행기도, 헬기도 아니었다. 한창 필드에서 A급 헌터가 되기 위해 발버둥 칠 때 시스템이 사윤을 미국에 떨어트렸다. 그 낯선 세상에 보호자도 없이 갑자기. 당시 사윤은 하급 몬스터 하나 제대로 상대하지 못해 스무 번도 넘게 사망한 D급 헌터에 불과했다.
예고 없는 기행에 역정을 내자 시스템이 내놓은 대답은 가관이었다.
<진정한 인류의 악은 고난과 역경 속에 태어납니다. 낯선 땅에서의 고난을 체험하세요. (b ᵔ▽ᵔ)b>
당황스러웠다. 사윤에겐 갑자기 들어가게 된 게이트도 충분히 고난이었는데 시스템이 보기엔 부족했던 걸까.
거무죽죽하게 물든 마음으로 도시를 둘러보았다. 떨어진 미국의 분위기는 그 시절 모든 나라가 그랬듯 흉흉했다. 게이트가 생성된 지 1년도 안 된 터라 다들 날이 서 있고 예민했으며 정체불명의 현상이 무서워 몸을 떨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만연해 제 몸 하나 챙기기 바쁜 분위기 속에서 동양의 어린 소년을 도와줄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도와주려는 소수의 선량한 시민이 있긴 했다. 부모를 잃은 거냐며 말을 걸어 준 이들도 있었고 빵을 내어 준 사람도 있었다. 정말로 운이 좋게도 며칠간 자신의 집에서 머무르다 가라는 부부도 있었다. 하지만 행운은 거기서 그쳤다.
불행하게도 이타심보단 이기심이, 선인보단 악인이 강하던 시절이었다.
사윤은 저를 도와주려 했던 한 백인 내외의 집을 습격한 괴한에게 붙들렸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였지만 그건 사윤도 마찬가지였다. 검붉은 잇자국이 남도록 강하게 괴한의 팔을 물고 들고 있던 단도를 마구잡이로 휘둘러 상처 입히고 골목길로 내달렸다. 괴한들이 쫓아왔지만 사윤의 초기 스탯 중 가장 높은 스탯은 민첩함이었다. D급이었어도 민첩만큼은 B-급이라 각성자도 아닌 사람들의 추격을 따돌리는 건 그간 겪어 온 시련에 비해 수월한 일이었다.
문제가 생긴 건 도망친 이후였다. 기껏 도와주려던 사람들의 집에서 도망쳤으니 사윤은 혼자다. 혼자선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었는데 쓸쓸하게도 혼자였다.
염치없이 다시 백인 부부의 집을 찾아갈 순 없었다. 괴한들은 어린 소년을 납치해 가는 게 목적인 듯했으니 자신이 다시 그 집에 방문하면 애꿎은 사람들만 피해 입을 게 분명했다.
안 그래도 제 손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 죄 없는 사람도. 잘못이 많은 사람도. 사윤은 더는 그 누구도 제 손에 죽지 않았으면 했고 어떤 이의 죽음에도 연루되고 싶지 않았다. 혼자 다니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는 신념이었다.
열여섯 살에서 열일곱 살로 넘어갈 무렵의 추운 겨울.
사윤은 백인 부부가 빌려준 옷 위로 검은 로브 하나를 걸친 채 낯선 나라의 골목길을 전전했다. 입고 있는 옷이 하얀 셔츠와 갈색의 바지였기에 밝은 옷들은 쉬이 더러워졌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꼬질꼬질해지는 옷을 보고 있으면 괜히 의기소침해졌다. 옷이 더러워지는 게 싫어 우연한 기회로 물 한 병 얻게 되면 소매 부분을 벅벅 문질러 빤 적도 있었다.
하나 그것도 여유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미국에 떨어진 지 보름이 넘어가자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사윤은 도탄에 빠져 허덕거렸다. 죽은 눈으로 벽에 기대 있다가 버려진 빵이라도 찾으면 허겁지겁 주워 배를 채웠고 비가 오면 혀를 빼내 떨어지는 물을 받아 마셨다. 깨끗하고 멀끔했던 옷은 보름 만에 누더기가 되었다. 미련은 품지 않았다. 옷이 더러워지는 건 불가항력이란 걸 깨달았으니까.
낮에는 골목 밖으로 나가 선량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밤에는 질 나쁜 범죄자들을 피해 골목 깊숙이 들어가 잠을 자는 일상이 반복됐다. 언제쯤이면 시스템이 말한 고난과 역경이 끝날지 매일같이 궁금해했으나 시스템은 묵묵부답이었다.
우울했다.
길을 지나치는 사람이 많은데 그중 말이 통하는 이도, 제게 온정을 베푸는 이도 없다는 게 삭막해 군중 속에서 기이한 외로움을 느꼈다. 툭하면 마음이 아려 차라리 게이트에서의 삶이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다시 보름을 넘겨 한 달을 지냈을 때 사윤은 소년을 만났다.
골목 안쪽에서 흐느끼는 소년을.
슬럼가 근처까지 밀려나다 보면 버려진 아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지만 그 소년의 분위기는 숱한 아이들과 달랐다. 보이는 건 동그랗게 공처럼 말린 작은 등이 전부였는데도 시선을 끌었다. 미약한 울음은 그냥 지나가려던 사윤의 발을 자꾸만 멈춰 세웠다.
‘왜 울어?’
결국 이끌림에 저항하지 못하고 다가가 서툰 영어로 묻자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을 처음 마주한 순간 사윤은 모든 할 말을 잃었다.
눈물에 푹 젖어 갈라진 속눈썹과 뜨거운 액체에 녹아내릴 듯 흔들리는 녹색의 눈동자. 바람에 부서질 것 같은 얇고 가는 갈색의 머리칼까지.
모든 게 신비했다. 한국에서 살아왔던 사윤이 쉽게 보지 못할 외형이었고 미국에서도 쉽게 보지 못할 분위기의 사람이었다.
이런 애가 왜 슬럼 근처에서 버려져 있지? 누구든 주워 가 키울 정도의 생김새인데.
눈앞의 존재가 믿기지 않아 속으로 그리 생각했다. 그게 사윤과 밀레의 첫 만남이었다.
‘부모님이 널 버리고 갔다고?’
‘정확히는 삼촌이 그랬어. 부모님이 날 버리고 가서 더는 키워 줄 수 없다고.’
하얀 피부에 주근깨까지 매력적으로 콕 박혀 있는 밀레는 예쁘장한 외형에 맞지 않는 드라마적 비극을 앓고 있었다. 영어로 흘러나온 그의 말을 전부 알아듣는 건 무리인지라 알고 있는 단어들로 대강 해석한 사윤은 탄식을 흘렸다. 자신만큼 기구하게 사는 이가 없을 거라 했는데 밀레의 삶도 못지않게 박복했다.
밀레는 본래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으나 부모님의 사업이 망하고 슬럼가 근처 땅값이 싼 지역을 찾아 내려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차 사고로 사망했고 어머니만 살아남아 둘이서 생활하다 2년 전 새아버지를 맞았다. 평범보다는 조금 많은 수준의 재산을 보유한 새아버지 덕분에 가난에서 탈출하고 드디어 행복한 생활을 하는 건가 했다더라.
거기까지 듣고 사윤은 자연스럽게 미래를 알게 되었다.
게이트가 나타나면서 밀레네 가족의 평화도 산산조각 난 것이다.
‘모두가 비명을 지르며 거리로 뛰쳐나왔어. 나는 그때 가족들이랑 헤어졌고, 소란이 가라앉고 나서야 부모님을 찾아다녔어. 그런데 부모님은 보이지 않았고 겨우 찾은 삼촌은 나를 일주일간 데리고 있다가 버렸어. 부모님이 나를 버렸으니 자기도 나를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나는 매일같이 삼촌을 찾아갔지만, 오늘 엉덩이까지 맞고 쫓겨났어. 다음에 찾아가면 날 죽여 버리겠대.’
기가 막히게도 오늘 생긴 사연도 있었다. 밀레의 차림이 다른 슬럼가의 아이들보다 봐 줄 만했던 건 최근까지 평범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과 연이 닿아서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다.
사윤은 골목길에서 만난 기묘한 인연에 흥미를 느꼈고 또 동질감을 느꼈다. 시스템에게 버림받듯 게이트에서 쫓겨나 벌써 한 달째 별다른 알림창도 보지 못하고 길거리를 전전하는 자신의 모습이 가족에게 버려지고 쫓겨나 흐느끼고 있는 밀레와 닮아 보였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윌리?’
‘…밀레라고.’
소년은 코를 훌쩍이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사윤은 피식 웃으며 제 이름을 알려 주었다. ‘권’이라는 발음을 어려워하길래 ‘사윤’이라는 두 글자만. 그날부터 사윤과 밀레는 세트라도 된 양 붙어 다녔다.
재앙이 닥쳐 쑥대밭이 된 세상의 골목은 홀로 살아남기 어려운 곳이었지만 둘이 되니 좀 나았다. 적당히 질 나쁜 양아치들이 오면 사윤이 쫓아냈고 D급 이상의 헌터 양아치가 오면 싸우다가 패배해 밀레와 같이 얻어맞았다. 혼자 맞던 걸 둘이서 맞으니 덜 아팠다. 창피함도 덜했다. 버려진 빵을 줍다 보면 아주 가끔 창피할 때가 있었는데 둘이서 같이 주우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고통을 나누라는 어른들의 말이 이런 거였나.
밀레와 함께하는 시간은 빈말로도 좋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궁상맞고 비참했으나 혼자일 때는 외롭기까지 했으니 최악은 아니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을까. 밀레가 수상한 소식을 물고 돌아왔다.
‘최근에 골목 아이들이 많이 사라졌잖아. 그거 자선 단체에서 나온 어른이 도와줘서 데려간 거래.’
‘세상이 이 지경이 됐는데 자선 단체가 멀쩡히 돌아간다고?’
‘세상이 망해서 새로 생긴 단체라나 봐. 우리도 가 볼래?’
나는 너 따라 할게.
밀레는 사윤이 알려 줬던 한국어를 서툴게 구사하며 덧붙였다. 제 결정을 따르겠단 소리였다.
덕분에 책임감이 무거워진 사윤은 자리에 앉아 오랫동안 고민했다.
자선 단체라니.
망조가 깃든 세상에서 정말로 그런 단체가 존재할까?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선택지는 얼마 없었다. 여기서 이렇게 궁상맞은 시간을 계속 보낼 거냐, 위험한 기회라도 잡을 거냐 한다면 사윤의 선택은 후자였다. 가만히 있어선 바뀌는 게 없다는 걸 지난 몇 개월 동안 통렬히 깨달았기에.
‘근처까지 가서. 살펴보기만 하자.’
‘응.’
‘위험해 보이면 바로 나오는 거야.’
‘응.’
두 소년은 불안을 희망으로 덮어 가리곤 손을 맞잡고 수상한 자선 단체가 나타난다는 곳으로 향했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오기 시작했다. 코끝이 빨개진 사윤은 오랜만에 보는 눈을 홀린 듯 쳐다봤고 밀레는 추위 때문인지 볼까지 불그스름해진 채 좋아했다.
‘눈이 오는 게 좋은 징조일지도 몰라.’
속 편한 소리를 해 대는 얼굴이 순했다. 세상을 하얗게 물들일 수도 있을 것 같은 순진무구한 미소에 대고 면박을 줄 순 없어 대충 긍정한 사윤은 걸음의 속도를 올렸다. 이 날씨라면 얼어 죽는 것도 가능했는데 밀레와 같이 동사했다가 혼자 되살아나 밀레의 시체를 보게 된다면 속이 안 좋을 것 같았다.
동상을 입어 벌겋게 부은 소년들의 손이 틈 없이 맞닿고 둘은 소문의 장소에 도착했다. 두 사람을 맞은 건 얼굴에 전갈 그림이 새겨진 선한 인상의 동양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