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1화. 패스파인더 경매장 (4)
“그놈 죽는 걸 내가 봤는데 살아 있다는 건 또 무슨 개소리야?”
데른.
그 이름을 어떻게 잊겠는가?
사윤은 남의 이름을 자주 까먹었으나 그 이름만은 명백히 기억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놈이 스콜피언의 수장이었는데.
자신이 직접 맞붙었고 싸워서 이겼으며 그 목을 베었다. 최근 들어 스콜피언의 잔당들이 기승을 부려 점점 되살아나고 있는 그 기억에 밀레가 불을 붙였다. 사윤은 점화되는 기억들을 선명히 떠올리며 밀레를 노려봤다. 겁먹은 얼굴 하며 저 간절한 눈빛이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정, 정말이야. 그놈들이 나한테 그렇게 말했는걸….”
“그놈들?”
밀레의 말을 따라 얘기하자 남자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곤 눈을 동그랗게 뜬다.
“못, 못 들은 거로….”
“하겠니.”
사윤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그 사실을 인지한 밀레가 틱틱 손톱 거스러미를 뜯으며 사윤을 힐끔거렸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돌아간 곳은 건주였다.
한건주는 마치 도와 달라는 듯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녹색 눈동자에 고개를 한 번 숙였다.
“안녕하세요.”
상황에 맞는 건지 맞지 않는 건지 짐작하기 힘든 느닷없는 인사에 밀레는 당황하며 따라 고개를 숙였다. 그때 지잉, 징. 벨이 울렸다. 밀레가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사윤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네가 한 번만 다녀와.”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지글지글 끓는 낮은 음성이 떨어진 곳은 건주였다. 사윤의 표정을 확인한 그가 조금 고민하는가 싶더니 진동 벨을 들고 일어났다. 사윤은 눈치 빠른 이답게 이런 순간에는 또 말을 잘 듣는 건주의 뒷모습을 잠시 따라갔다가 밀레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으윽!”
밀레가 아프다며 신음을 흘렸으나 사윤의 손길은 거침없었다. 털옷을 뜯어낼 듯 걷고 손목을 가린 긴 티마저 걷어 올리니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하얗고 얇은 손목이 드러났다. 사윤은 손목에 그어진 작은 금과 피부치고 툭 튀어나온 손목 위를 매만졌다.
“하, 시발.”
욕설이 흘러나오자 지은 잘못을 아는지 밀레가 움찔거렸다.
아니. 지은 잘못이 아니지.
이걸 네가 잘못했다곤 할 수 없지.
인과를 명확히 한 사윤이 밀레의 손목을 꽉 붙든 채 눈을 감았다. 머리가 울린다. 두통이 느껴져 앓는 소리를 흘리고 있을 때 옆자리에서 끼익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나고 차가운 손이 이마에 닿았다. 커피를 받아 온 건지 손바닥에는 물기가 묻어 있었다.
“아파요?”
낮은 음성이 이성을 깨운다. 깊게 숨을 내쉰 사윤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눈꺼풀을 들어 올려 밀레를 바라보다 그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칩이야?”
“칩?”
건주가 사윤의 말에 관심을 보였다. 그의 시선까지 덩달아 밀레를 향하자 소심한 남자가 손목을 숨기듯 옷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새끼들이 다시 널 찾아왔어?”
밀레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걔들이 너한테 데른이 살아 있다고 얘기하면서, 널 다시 데려갔고?”
이번 물음에는 희미한 냉소가 섞여 있었다. 그 사실을 밀레 역시 눈치챈 건지 몸이 움츠러든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윤은 욕을 참았다. 아니, 참으려고 했다. 그러나 입술은 제멋대로 벌어져 험악한 욕설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조금 전부터 근질근질한 티를 내던 이가 기어이 궁금증을 토했다.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하기 위해 꺼낸 의문에 사윤은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은 의외로 밀레가 했다.
“…내가 잘못한 거야.”
“네가 뭘 잘못해? 넌 좆같이 멍청한 거 말고 잘못한 게 없는데.”
옹호인지 비난인지 모를 말이었다. 건주는 다른 때보다 입이 걸고 여유를 잃은 듯한 사윤을 유심히 살폈다. 그 시선에도 밀레만 복잡하게 응시하던 사윤이 건주가 가져온 아메리카노를 한 번에 절반가량 마신 뒤 입을 열었다.
“밀레가 스콜피언 잔당에 들어갔어. 아마도 노예 신분으로.”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는 짜증스러운 목소리였다.
“스콜피언이 노예도 들여요?”
“정확히는 노예 취급을 하는 거지. 그 새끼들은 악질이라 예전부터 그랬어. 그 개같은 짓을 지금까지 할지도 몰랐고 또 네가….”
거기까지 말하며 숨을 삼킨 사윤이 화를 억누르듯 입술을 짓씹었다.
“또 네가 그딴 거짓말에 속아서 그 단체에 들어갈 줄은 몰랐다.”
실망과 후회. 그 두 가지 감정이 맞물린 한 지점에서 사윤이 속마음을 토했다. 밀레가 억울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거, 거짓말이 아니야.”
“내가 그 새끼를 죽였어. 넌 그걸 보고도 몰라?”
“하지만, 정말로 살아 있는 것처럼 굴었어. 다들 그래. 다들, 이전에는 널 무서워했는데 이젠 그러지도 않아. 전보다 훨씬 기세등등해진 게 정말로 데른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단 말이야.”
“적어도 네 눈으로 확인하고 판단했어야지.”
“내가 무슨 능력으로?”
“…뭐?”
“난 D급이고 걔들은 최소 B급 헌터인데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해? 사실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는 걸 너도 알잖아. 나는 그저 무력해서 흐르는 대로 따라갔을 뿐이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왜냐면 이젠 내 곁에….”
“…….”
“…너도 없잖아.”
자조적으로 읊조리던 밀레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더니 침울하게 덧붙였다. 이 역시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사윤이 할 말을 잃고 침묵을 유지하자 밀레가 그 간극을 메웠다.
“3년 동안 날 보러 단 한 번도 안 왔잖아. 이전에는 1년에 한 번씩 사람이라도 보냈으면서.”
“…….”
“다들 네가 날 버린 거라고 했어. 내가 쓸모없어서. 모두가 그래. 네가 다시 날 찾아오리란 보장도 없는데 내가 어떻게 스콜피언한테 저항할 수 있겠어? 나한텐 아무런 힘도 없어. 너도, 너도 나랑 같이 약자였어서 알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해….”
서러운 듯 얘기하던 밀레가 흠칫 떨더니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고 널 탓하는 건 아니야.”
실컷 탓하듯이 얘기한 뒤 할 말로는 적절하지 않은 얘기였다. 사윤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밀레는 이 침묵이 불편한 건지 손톱을 매만지다가 윽, 하고 신음을 흘렸다. 불편한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린 이가 손목을 매만지다가 사윤의 눈치를 보았다.
끼익.
얼마 지나지 않아 밀레가 의자를 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 호출이 있어. 이만 가 봐야 해.”
격정적이었던 재회치곤 싱겁기 짝이 없는 이별이었다. 밀레가 힐끔 건주를 보다가 우울한 낯빛으로 얘기했다.
“넌, 너한테 훨씬. 도움이 되는 사람을 찾은 것 같네.”
부러워하는 목소리 같기도 했고 질투가 어린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말갛게 웃어 보인 남자가 한마디를 남겼다.
“예전보다는 좋아 보여. 다행이다.”
이번에는 기쁨 외엔 어떠한 감정도 엿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다 투명하고 저렇게 순진하다. 사윤은 제 처지는 3년 전보다 더 시궁창에 빠졌음에도 자신이 좋아 보여 다행이라고 하는 이를 짜증스럽게 응시하다가 뺏었던 밀레의 지갑과 되찾았던 제 지갑을 동시에 꺼냈다. 그러곤 수표 몇 장을 꺼내 밀레의 지갑 안으로 쑤셔 넣었다.
“들고 가. 걔들이 상납금을 요구했으니까 그렇게 상대도 파악 못 하고 물불 안 가리고 소매치기한 거 아니야. 괜한 새끼들한테 걸리지 말고 들고 갔다가, 내일 오후 3시에 이 카페로 다시 와. 그때 다시 얘기해.”
“…어?”
“말귀 못 알아들어? 내일 다시 얘기하자고. 네 손목에 있는 그 빌어먹을 칩도 해결해 줄 테니까. 오늘은 그 돈 가져가면 최소한 처맞지는 않겠지.”
얘기하면서 수표 한 장을 더 쑤셔 넣자 밀레가 눈을 깜빡이며 낡은 지갑을 받아 들었다. 그러곤 카페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가 조금 전에 그랬듯 환히 웃어 보였다.
“내일 봐.”
작별로 건네는 인사가 조금 떨렸다. 7년 전에 봤을 때랑 똑같은 지갑을 소중한 것이라도 되듯 품에 안은 밀레가 카페를 나선다. 딸랑, 문에 달린 풍경이 한 번 울리고 사윤은 멀어지는 밀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구질구질하고 궁상맞고 지랄맞고.
밀레는 시궁창에서 튀어나온 소년 그 자체였다.
그 모습이 아른거려 커피 잔을 매만지고 있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알아서 입을 다물며 커피만 쪽쪽 마시고 있던 건주가 사윤의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감정적인데.”
“…그래 보이니.”
“무슨 사이예요?”
물어볼 줄 알았다. 방금까지의 신파 같은 장면을 보고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면 그게 멍청이일 거라 헛웃음을 내쉰 사윤이 밀레가 떠난 자리를 한참이고 바라보다 늦은 대답을 뱉었다.
“…글쎄.”
“그런 말로 정의하기엔 꽤 깊어 보이던데요, 관계가.”
“그래서 글쎄다.”
“……?”
알아듣기 힘든 소리를 하는 사윤에 건주가 몸을 틀어 사윤을 바라보았다. 소리도 없이 재촉한다. 시선으로 느껴지는 은근한 채근에 사윤은 꺼내 놓았던 지갑을 매만졌다가 인상을 구겼다.
“구질구질한 사이지.”
“…연인 사이였어요?”
“무슨 헛소리야? 저 조그마한 애새끼한테 무슨 연애 감정이 든다고.”
우습지도 않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반응하던 사윤이 지갑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보는 얻은 것 같으니 이만 들어가도 되겠네. 가자.”
“대답은 안 해 주실 거예요?”
의자에 앉은 채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순하다. 밀레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그보단 강단이 있었다.
속내도, 있어 보였고.
‘좋아 보여.’
사윤은 밀레의 나직한 한 줄 평을 떠올렸다가 건주에게 손을 뻗었다. 잡고 일어나라는 뜻이었다.
“가서 얘기해.”
“…그래요.”
대답할 시일을 미루겠단 얘기에도 한건주는 별말 없이 사윤의 손을 잡았다.
“가서 얘기해요.”
확실히 하겠다는 듯 말을 한마디 덧붙이며. 그 고분고분하고 조용한 태도 덕에 사윤은 숙소까지 돌아가는 길, 가물가물하게 덮어 뒀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밀레와 함께 스콜피언에 잡혀 있던 반년간의 기억을.
아주 어릴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