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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20)화 (220/266)

제220화. 패스파인더 경매장 (3)

“이야,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고. 요즘 세상이 꽤 흥미로워?”

“히익!”

따라잡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까지 도둑을 추격한 사윤이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얘기하자 도망치던 남자가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기겁했다. 검은 비니를 꾹 눌러쓴 채 털옷까지 야무지게 챙겨 입었다. 놈의 품에는 제 것으로 추청되는 지갑도 들려 있었다.

그가 뒤를 확인한다고 제 쪽을 돌아본 순간 지갑까지 포착한 사윤이 눈을 휘어 웃었다.

일이 참 재밌게 돌아간다.

미국에 오고 나서 제 지갑을 꺼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민철의 돈이 있으니 그걸 쓰면 되는 거 아니던가. 그래서 협회장 카드만 제 것처럼 긁고 다녔는데 처음 꺼내진 순간이 한건주에게 건물 한 채 사 줄 때도 아니고 겨우 소매치기라니. S급이 되고 나서 이런 소매치기를 당한 적은 처음이었다.

뛰는 몸놀림을 보니 일반인은 아닌데.

민첩함도 그렇고 뛰는 속력도 그렇고 평범한 사람들이 낼 만한 신체 능력이 아니었다. 그럼 각성자라는 소리인데 각성자가 제 지갑을 훔치다니. 간이 부은 걸까?

어쩌면 낮은 확률로 등급이 너무 처참해 자신의 실력을 가늠하지 못한 걸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흔치 않은 이벤트인지라 꽤 즐거웠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미국까지 와서 소매치기에 당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종식이한테 자랑할 거 생겼네.

이야깃거리가 생겨 즐거워한 사윤이 뛰는 속도를 조절하며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워낙 빠르게 달리고 있어 길거리를 걷는 행인들의 시선이 죄다 이쪽으로 쏠려 있었다.

어딘가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곳으로 갔으면 좋겠는데.

그리 생각하기 무섭게 도망치는 놈이 알아서 골목으로 향했다. 아주 눈치가 빠르고 이용해 먹기 편한 놈이었다.

속임수나 수작을 부리는 거일 수도 있었지만 그럼 또 뭐 어떠한가.

일단 다 잡아 쥐어패면 그만이었다.

녀석이 골목 안쪽으로 들어섰을 때, 간을 보듯 따라가는 걸 그만둔 사윤이 발을 들어 올렸다.

콰아앙!

그대로 앞을 향해 무릎을 펴자 타격음이라곤 상상 못 할 굉음이 들렸다.

“흐어억!”

내달리던 놈이 곧장 날아가 벽에 처박힌다. 사윤이 발목을 가볍게 털며 서리의 기운을 풀었다. 협박할 땐 서리만큼 효과적인 스킬이 없었다. 심장마저 얼려 버릴 듯한 차가운 냉기가 올라오는데 제정신을 유지할 사람은 손에 꼽혔으니.

“쿨럭!”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가가자 벽에 처박혀 있던 놈이 피를 뱉어 내며 비틀, 상체를 일으켰다. 사윤은 놈이 완전히 일어나기 전에 도약해 도둑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사납게 시선을 마주치며 낯짝 좀 확인해 보려던 찰나였다.

“잡았어요?”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는데 기어이 쫓아온 건지 골목 입구에서 인기척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러면 험한 꼴은 못 보여 주지.

“쯧.”

아쉬움을 느낀 사윤이 모근까지 뽑아낼 정도로 거칠게 쥐었던 손에 힘을 푼 다음 도둑의 고개를 젖히게 했다. 비니 아래 시선을 마주치며 입꼬리를 올렸을 때였다.

서리의 기운이 놈을 덮치듯 퍼져 나간 순간 도둑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사윤?”

“…….”

예상치 못한 말에 사윤도 건주도 몸을 움찔거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도둑에게 꽂혔다. 벌벌 떨면서도 제 눈을 똑바로 마주하는 녹색 눈동자를 확인한 사윤은 문득 머릿속을 스친 기억에 생각을 더듬기 위해 시선을 비스듬히 했다가 아, 하고 짧게 탄성을 흘렸다.

기억에 있는 놈이다.

그것도 꽤 선명한 기억.

억지로 묻어 두었던 기억 속 주인공이다.

“윌리?”

확인차 물으니 남자의 굵은 눈썹이 아래로 처졌다.

“…밀레야, 사윤.”

“아.”

그래도 받침은 얼추 맞혔으니 된 거 아닐까.

소심한 반박에 ‘그래, 밀레.’ 하고 말을 정정해 준 사윤이 눈을 깜빡이다 3년 만에 만난 남자의 고개를 과격하게 잡아챘다.

“흐으.”

밀레라 불린 색이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보유한 남성이 흐느끼며 갓 태어난 소동물처럼 벌벌 떨었다. 체구도 작은 놈이 그렇게 떠니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사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손을 뻗었다.

“내놔.”

명령조의 어투에 밀레가 다급하게 대답하며 품에서 지갑을 꺼내 바쳤다.

“말고, 하나 더.”

“어?”

순진한 눈망울이 깜빡거린다. 너른 아량으로 감히 제 지갑을 훔친 죄에 대한 처벌에서 폭력을 배제한 사윤은 벌금형 부여를 위해 뻗은 손을 까딱거렸다.

“내 걸 훔쳤으면 네 걸 내놓을 각오도 해야지.”

사근사근하지만 묵직한 어조였다. 내놓지 않으면 머리채를 옆으로 꺾어 자신을 살해할 것만 같은 살벌한 음성에 겁을 먹은 밀레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품을 뒤졌다. 이윽고 낡은 지갑이 세상 밖으로 꺼내졌다.

“흠.”

불만족스럽게 지갑을 내려다보던 사윤이 낚아채듯 가져가곤 밀레의 머리채를 놓아주었다. 분명 소매치기의 피해자는 사윤이었건만 마치 양아치가 선량한 시민의 물품을 갈취하는 듯한 상황을 목격하는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건주가 사윤과 밀레의 쪽으로 한 발 다가왔다.

“누구예요?”

호기심 가득한 물음에 사윤은 세월이 지나도 순진함만은 변하지 않는 듯한 밀레의 녹색 눈동자를 내려다보다 한숨을 쉬었다.

“…애새끼.”

신랄한 듯하면서도 어딘지 정감이 느껴지는 음정이었다. 건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여전히 벽과 사윤 사이에 갇힌 채로 눈치를 보고 있던 밀레가 소심하게 사윤을 불렀다.

“저… 내가 너보다 한 살이 더 많은데.”

“그래서?”

“아니야, 응. …애새끼야, 나.”

밀레가 기껏 용기 내 뱉은 말은 허무한 자학으로 돌아가게 됐다. 사윤은 강산이 변할 시간에도 한결같은 옛 친구를 바라보다 숨을 들이켜며 160센티 남짓 돼 보이는 작은 키의 밀레를 팔뚝 붙잡아 일으켰다. 그 우악스러운 힘에 강제로 일어나게 된 밀레가 데굴데굴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본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밀레의 팔을 놓은 사윤이 그 등을 꾹 밀었다.

“일단 어디로든 들어가.”

“어어, 내가 안내할게!”

툭 하고 뱉은 말에 자동 반사라 해도 좋을 수준으로 반응한 밀레가 카페로 안내하겠다며 몸을 움직였다. 그 재빠르고 비굴한 몸놀림에 잠시 당황한 건주가 짐작이 가는 것이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윤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괴롭혔어요?”

“뭔 소리야?”

“아니면 …노예. 뭐, 그런 거라도 사요?”

그 말을 할 때 건주의 눈동자에 은근한 환멸이 깃들어 있다. 사윤은 기다리라는 제 말도 무시하고 따라와서 헛소리나 해 대는 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콱 찍어 누르곤 밀레의 뒤를 따라갔다.

“헛소리하지 말고 따라와.”

그렇게 세 사람은 위험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 어둡고 더러운 골목길을 벗어나 멀끔한 카페로 향했다.

“뭐야?”

카페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그 누구의 의견도 묻지 않고 아메리카노만 석 잔 시켜 자리를 잡은 사윤이 기럭지 자랑하듯 다리를 밀레 쪽으로 쭉 뻗고 물었다. 죄인처럼 두 손을 무릎 위로 올린 채 바닥만 내려다보던 밀레가 마치 화상이라도 막 입은 듯 화들짝 놀라며 사윤과 눈을 마주쳤다.

“어, 어?”

그 어눌한 음성에 진저리가 났다. 시간이 이만큼 흘렀으면 좀 변해도 될 텐데 밀레는 예나 지금이나 처음 만났을 때와 지나치게 똑같았다.

마치 그 시절에 묶여 있기라도 한 것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질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기에 눈살을 찌푸렸던 사윤이 눈을 감았다.

“그만 좀 여전해. 언제까지 그렇게 구차하게 살래?”

“네, 네가 너무 변한 거야….”

“너는 너무 안 변했고.”

“무섭게 하지 마.”

“내가 지금 너 협박했어?”

눈을 뜨고 으르렁거리듯 얘기하자 곧바로 고개를 숙인 밀레가 입을 달싹였다.

“눈부터 무서운데.”

어눌한 한국어라서 더 얄밉게 들리는 반박이었다. 사윤이 피식 소심한 남자를 비웃었다.

“명줄도 짧은 게 말만 많지.”

“내 명줄은 네가 어떻게 알아?”

“내 눈엔 보여. 내가 지금 널 죽이면 명줄이 짧은 거지, 안 그래?”

꼴에 몇 년 같이 지냈다고 친밀감을 느끼는 건지 받아치는 게 끝이 없었다. 이쯤에서 누가 우위인지 확인시킬 필요가 있어 목소리를 낮추자 밀레는 또 그놈의 으응, 하고 대답하며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치가 떨릴 만큼 구질구질하다. 그는 궁상맞은 거로 따지자면 사윤이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지독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싫었다. 그 위로 자꾸만 과거의 제 모습이 겹쳐 보여서.

이건 필연적인 연상이었다.

밀레와는 어릴 때 알던 사이였으니, 그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거다.

미국은 땅덩어리도 더럽게 넓은데 어떻게 딱 이놈을 만날 수 있는 건지.

마음이 소란스러워 머리카락을 턴 사윤이 의자를 툭 걷어차며 조금 전의 물음을 이어 갔다.

“그래서 뭐야.”

“뭐가?”

“왜 소매치기나 하고 있냐고.”

“아….”

밀레가 대답을 망설인다. 사윤은 그가 고민하거나 망설임을 이어 갈 틈을 주지 않았다.

“머리 굴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왜 소매치기 따위나 하고 있어? 내 지갑은 왜 훔쳤고. 네가 아무리 D급이라고 해도 내 수준이 어떤지는 알잖아.”

“그게….”

“나 기다리는 거 싫어해.”

사형 선고처럼 내려진 싸늘한 음성에 밀레가 움찔거렸다. 건주는 제게 화를 낼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의 사윤을 생소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도 겁박하듯 밀레만 응시하던 사윤이 콰앙! 남자 옆에 놓여 있던 의자를 발로 차자 쇳소리가 나며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으!”

걷어차인 건 의자인데 꼭 제가 맞은 양 군 밀레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살! 살아 있대!”

초조하게 흘러나온 그 말에 사윤이 고개를 기울였다.

“누가.”

“…….”

“묻잖아, 밀레. 누가 살아 있어?”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이건 사윤이 주는 기회라는 걸 밀레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그가 매섭게 변하리라는 것도. 잠시 주변의 눈치를 보듯 사위를 살핀 남자가 스물여덟 살이나 먹고도 소년같이 앳된 얼굴로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사윤과 밀레의 거리가 부쩍 가까워지고 건주가 심기 불편한 얼굴이 됐다. 밀레가 마지막으로 자신 쪽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없는지 확인한 후에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낮게 속삭였다.

“…데른이 살아 있대.”

그 말을 들은 사윤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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