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9화. 패스파인더 경매장 (2)
1시간의 열혈 강의가 끝나자 사윤을 제외한 모두가 녹초가 된 얼굴로 널브러졌다. 질문을 했던 장본인인 재희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그는 어깨가 붙잡힌 채 앞뒤로 흔들리면서까지 강의를 듣게 됐으니 혼백이 나간 표정을 지어도 그리 유별난 일은 아니었다. 경진이 손으로 귀를 마사지하며 끙끙 앓아 댔다.
“종식 형님 없어서 이번엔 안 들을 줄 알았는데.”
자타 공인 밤쥐의 구두쇠인 종식 덕에 연대 책임이란 명목으로 석 달에 한 번 이 강의를 들어야 했던 경진은 오늘 종식이 일정상의 문제로 따라오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고 감격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 이유가 이 지긋지긋한 강의를 안 들어도 된다는 것이었는데 메리트가 사라졌다며 투덜거리는 이를 두고 사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핼쑥해진 남들과 달리 홀로 개운한 표정이었다.
답답했던 만큼 실컷 쏟아 내고 마음껏 쓰고 오라며 협회장의 카드까지 건네주고 나니 속이 다 후련했다. 어디 가서 제 길드원들이 궁상맞게 꾸는 꼴은 죽어도 못 본다. 나름 소수 정예 길드의 고위 간부라면 어딜 가든 왕 행세를 해야지.
설령 가장 뛰어나지 않더라도 겉으로는 가장 뛰어나게 보여야 한다.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 행세 한다는 속담의 진가를 주입해 준 사윤은 먼지 묻은 옷을 털며 무심히 입을 열었다.
“뭐 하고 있어? 오늘부터 조사 시작할 거니까 일어나.”
“…오늘부터?”
“그럼 오늘부터 하지. 해가 대낮인데 뭐 하게. 놀고먹게?”
“…….”
사윤의 시선이 매섭게 변했다. 앓는 소리를 꿀꺽 삼긴 경진이 말도 안 된다고 중얼거리다가 현실을 외면하려는 듯 질끈 눈을 감았다.
“일중독 상사 만나서 과로로 죽게 생겼네.”
“불만 있으면 목 위에 그거 두고 평생 쉬어도 좋고.”
“…미친 길드장.”
이 정도의 욕설은 이제 애교다. 사윤은 오늘만 벌써 두 번째 들은 듯한 말을 가볍게 넘기며 첫 조사를 나갈 팀을 결정했다.
“넌 나랑 가고.”
쭉 뻗은 손이 건주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조금 온순해진 표정으로 널브러져 있던 건주는 군말 없이 주욱 하고 딸려 왔다.
“너희 셋이 팀 먹고.”
나머지 세 명을 보며 간단명료하게 말하자 경진의 표정이 그나마 밝아졌다. 자신이랑 가지 않게 된 게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었다.
쟤는 저렇게 표정을 못 숨겨서 어떡하냐.
처음 만났을 땐 저러지 않았는데 애가 갈수록 거침없어졌다. 지금은 그를 받아 주는 게 자신이라 오냐오냐 곱게 봐주는 거지 다른 데 들어가서 상사를 저리 무시해 봐라. 목이 잘려도 백 번은 잘릴 거였다.
처음에는 참 얌전한 놈이었는데.
어째 자신을 만난 이들이 다 저렇게 변하는 듯해 사윤의 미간에 홈이 파였다.
내 문제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려 10년 만에 근원에 다가선 꼴이었지만 사윤은 쓸데없는 생각이라 여기며 화제를 전환했다.
“다들 나갔다가 적당할 때쯤 알아서 귀가해. 스콜피언에 대한 소문 들리는 거 있으면 녹음이나 기록 둘 중 하나는 하고. 적당한 정보 찾으면 내일 오전은 쉬게 해 준다.”
“아니, 도착한 다음 날인데 오전은 당연히 쉬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넌 새벽에도 일할래?”
“…다녀오겠습니다.”
꼬리 마는 게 재빨랐다. 역시 밤쥐 간부 타이틀은 허투루 단 게 아니다. 사윤은 말 한마디로 찡찡거리는 경진을 퇴치하곤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건주를 챙겼다.
“어디 가요?”
이제는 익숙한 그 물음에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붉은 입매에 호선이 그려졌다. 건주의 숨소리가 희미해져 갈 때쯤 사윤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좋은 곳.”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발언에 건주의 얼굴이 굳었다.
“게이트요?”
“…….”
“아, 진짜. 여기까지 와서 그런 데를 가고 싶어요?”
자신이 대답하지 않은 걸 긍정으로 받아들인 건지 그가 성질을 냈다. 사윤은 이제 자동 반사적으로 게이트를 내뱉는 그를 보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경진 일행이 서쪽을 향해 먼저 출발하고 사윤은 길드원들을 쪼았던 모습이 무색하게 느긋한 태도로 건주를 끌고 동쪽으로 향했다. 번화가와 가까운 거리였다.
은행에 들러 자신의 미국 계좌 잔고나 확인해 볼 생각으로 걷고 있으니 건주가 중간중간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봤다. 나름대로 경계심을 갖고 무언가를 찾는 듯한 행세를 하고 있긴 했지만 그 본질은 구경에 가깝다는 걸 사윤은 모를 수가 없었다. 슬쩍 고개를 돌릴 때마다 보게 되는 게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었으니.
데리고 다니는 재미는 있겠네.
반응이 신선해서 봐 줄 만했다. 아직 어리다는 티가 확 난다고 생각됐을 때였다. 어째서인지 귀를 부드럽게 감싸는 목소리에 사윤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그대로 느릿느릿. 베짱이처럼 걷던 걸음이 못을 박아 넣기라도 한 것처럼 제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
마른 입술이 벌렸다 닫히길 반복한다. 사윤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건주가 따라 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요?”
팔뚝을 슬쩍 잡아 끌어당기는 손길에도 사윤은 건주에게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돌리고도 남았을 힘이었는데도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한 곳만을 응시한다. 그에 건주가 호기심과 불만이 뒤섞인 눈으로 사윤의 시선이 향한 곳을 좇아갔다. 이윽고 사윤의 팔을 붙들고 있던 그의 손이 스르륵 맥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향한 곳은 화이트 위주의 테라스 인테리어가 깔끔한 한 카페였다. 그곳의 테라스에서 한 아이가 부모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모든 행인이 삭제되고 그 아이만 남아 있는 것처럼 강렬하게 감각을 사로잡았다.
열세 살에서 열네 살 정도 됐을까. 키가 꽤 크긴 했지만 서양 쪽 아이들이 빠르게 성장한다는 사실을 유의하면 그쯤 될 것이다. 그들이 기억하는 아이보다 큰 체격이었다.
그것이 기억 속 소년과 눈앞의 소년이 다르다는 걸 말해 주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 아이가 그대로 성장하면 꼭 저런 모습이 될 것 같아서.
금발과 색이 옅은 푸른 눈동자.
벽안은 흔한 눈동자 색은 아니지만, 영미권에서는 가끔 가다 볼 수 있었다. 금발은 차고 넘치는 수준이다. 그렇기에 만날 수 있게 된 한 소년에게서 두 사람의 시선은 오랫동안 머물렀다.
“…가자.”
한참 뒤에 먼저 입을 연 건 사윤이었다. 그때쯤엔 소년과 그의 가족들도 카페를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윤은 자꾸 돌아가려는 시선을 힘주어 떼어 내고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까지 그럭저럭 시시콜콜한 대화가 이루어졌던 둘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흐른다. 사윤이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켰다.
예쁘네.
입 밖으로 뱉지 못할 말이 혀 위를 맴돌기만 했다.
자랐다면 분명 더 예쁘게 자랐을 텐데.
그 미련은 허상이었다. 알고 있었기에 정신을 다잡으려는데 누군가 톡 손끝을 건드렸다. 하도 겪어 이젠 누군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무덤을 만들었어요.”
“……?”
갑자기 무슨 무덤 얘기인가.
사윤이 눈을 깜빡이자 건주가 태연히 이어 말했다.
“노아 무덤이요. 그 안에 있는 것들은 언젠가 사라지잖아요. 그래서, 밖에 만들어 놨어요. 제가 탑을 나온 그날에 바로.”
“…….”
“사진도 없고 시체도 없어서 사실상 별로 무덤 같진 않긴 한데….”
말끝을 흐린 이가 사윤의 손을 붙잡았다.
“나중에 같이 가 볼래요?”
조심스러운 물음이다. 그날 이후로 둘 중 그 누구도 먼저 노아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하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소년이 거론되었다.
사윤은 입천장 구석이 뜨겁고 답답해지는 기묘한 감각을 맛보며 열이 오르는 입 안으로 숨을 밀어 넣었다.
하필이면 노아라는 이름의 단체에 소속되면서 그 아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아니, 어쩌면 협회가 만들겠다고 한 단체의 이름이 노아였기에 소속되길 거부하지 못한 것도 있을 거였다. 그 이름과 결속돼 있는 느낌이 좋았으니까.
사윤도 무덤을 만들고자 했다. 생각은 그러했다.
그런데도 하지 못했던 건, 미련을 갖고 애착을 갖는 것의 말로를 많이 봐 와서였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한건주의 입에서 노아의 이야기가 나왔고 무덤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와 다시 그 아이 얘기를 할 날이 오면 불편하고 거북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숨만 버겁고 말 뿐 불쾌감은 전혀 없었다. 망설이다가 그래, 하고 대답하자 건주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지독하게 엉켰던 실타래의 끝이 데굴 굴러가 풀린 듯한 기분이다. 사윤이 맞잡은 손을 멍하게 내려다본 그때였다.
퍽!
누군가 강하게 사윤을 치고 지나갔다. 힘을 빼고 경계심을 풀고 있어 순간적으로 휘청거린 사윤을 건주가 붙잡았다.
시발.
주머니에서 묘한 가벼움을 느낀 사윤이 곧장 눈을 치켜뜨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부딪친 놈은 저 멀리 달아나고 있었지만 사윤 기준으론 못 잡을 만큼 먼 거리가 아니었다.
입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너 잠깐 여기 있어 봐.”
사윤은 건주의 손을 놓고 구두로 땅을 두어 번 콕콕 찍어 발목을 푼 다음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쏘아져 나가는 이에 건주가 눈만 깜빡거렸다.
“…하, 진짜.”
짜증 섞인 목소리가 자그맣게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