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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18)화 (218/266)

제218화. 패스파인더 경매장 (1)

도착한 공항에선 새하얀 정장을 입은 자들이 입국 심사를 통과하고 나오는 이들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제안하고 있었다. 고개를 젓는 이가 절반, 뭔지 모를 그 제안을 수락하는 이가 절반이다. 사윤은 협회장이 만들어 준 ‘제비 길드 사윤’ 신분으로 입국 심사를 통과하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선글라스를 쓴 이들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짧은 상념에 젖었다.

오랜만에 보는 풍경인데.

“저걸 보니 확실히 미국이 뒤숭숭하다는 게 실감 나네.”

“저게 뭔데요?”

뒤따라온 건주가 사윤의 어깨 너머에서 물었다. 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그는 궁금한 걸 참는 법이 없었다.

“가이드 같은 거지.”

“가이드가 저렇게 호객 행위를 해요?”

“여행 가이드가 아니라 경호 명목의 가이드라 그래.”

“경호 명목?”

미심쩍다는 듯 사람들을 향해 굴러가는 시선을 보아하니 딱히 이해한 것 같진 않았다. 사윤은 손이 많이 가기론 둘째가라 하면 서러울 제 애새끼를 어떻게 할지 잠시 응시하다가 데려온 게 저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같이 듬직한 체격의 사내들을 가리켰다.

“그냥 여행 가이드가 저만한 피지컬이 되겠니. 척 보기에도 신체 능력에 특화된 각성자들 같은데 저게 단순한 여행 가이드로 보이면 눈이 삔 거지.”

“지금 저보고 멍청하다고 하는 거예요?”

되묻는 어투가 날카로웠다. 픽 웃는 것으로 능숙하게 대답을 피해 간 사윤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덩치 큰 가이드들을 훑어보았다.

“7년인가 8년 전까지만 해도 일상이었던 광경인데 오랜만에 보네.”

옛 기억을 떠올리며 추억하듯이 말하자 경진이 그게 추억거리냐며 질색했고 옌이 재밌었겠다며 황당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재희는 장시간 이동으로 피곤한지 말이 없었다. 사윤은 평소 같았으면 한마디 거들었을 남자가 조용해 의아한 눈초리를 보냈다. 시선이 닿자 재희가 입꼬리를 옅게 올렸다.

“사람 많은 곳에 오면 원래 좀 처지는 편이에요.”

“그건 또 처음 안 사실인데.”

축제 때는 멀쩡해 보여서 몰랐다. 물론 공항 인파와 축제 당시의 인파가 비교도 안 될 만큼 차이 나긴 했지만 말이다.

보이는 게 많아서 그런가?

짐작 가는 것이 있어 짧게 읊조리자 경호 업체가 사윤에게도 다가왔다.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안내해 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한 사윤은 더 걸리적거리는 일이 생기기 전 서둘러 일행을 데리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입구에서 어슬렁거리자 동양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다가와 사윤의 신분을 물었다.

협회장이 만들어 준 신분증을 꺼내니 세 명의 남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숙소로 모시겠습니다.”

깍듯한 인사가 나쁘지 않았다.

그대로 안내를 따라 탑승하자 뒷좌석에 함께 올라탄 건주가 조금 전 끝난 줄 알았던 화제를 다시 끌고 왔다.

“경호받을 정도로 지금 상황이 안 좋은 거예요?”

“그야….”

“형 기준으로 말고 일반 사람들 기준으로요.”

“…음.”

곧바로 부정하려 했던 사윤은 민첩하게 덧붙여지는 조건에 침음성을 흘렸다.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탁탁 두어 번 튀어 올랐다.

“경호받을 정도로 상황이 안 좋다기보단 업체 놈들이 이 분위기를 이용하는 걸 거다. 사람의 부정적인 기억은 꽤 오래가거든.”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몰락하고 사라졌어도 스콜피언은 스콜피언이다. 놈들이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언질만 해 주면 30대 초반 이상의 여행객들은 경호 제안을 무조건 승낙할 게 분명했다. 그들은 젊은 시절 스콜피언의 만행을 직접 겪어 본 이들일 확률이 높았으니까.

그때의 기억을 잊을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거였다.

양아치 새끼들이라며 폄하하고 있으니 한건주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설명 교실을 길게 이어 갈 생각이 없던 사윤은 궁금한 게 많아 보이는 상대를 놔두고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리엔 경호원들과 함께 다니는 관광객이 즐비했다. 그들의 현대식 복장만 아니었다면 시간을 역행한 기분이었을 거다.

“이 정도로 현상이 나타난다는 건 정말로 스콜피언 놈들이 대대적인 움직임을 보였다는 건데….”

꼬리 말고 숨을 준비를 한다는 기존 지식과 다른 상황이다. 정보의 불일치를 인지한 건지 경진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눈이 마주치자 찡긋거리며 윙크했다가 두 손바닥을 맞대 기도하기도 한다. 별 짓거리를 다 하는 이에 사윤이 혀를 찼다.

“쯧.”

그의 보고가 잘못된 건 아닐 거다.

다만 짧은 사이 흐름이 바뀌었거나, 물밑의 움직임을 경호 업체에서 인지했다거나 둘 중 하나일 터였다.

이래서 민감한 정보를 확인할 땐 직접 와 봐야 한다. 앉아서 보고만 받아 알고 있던 것과 실재의 풍경은 사뭇 달랐으니까.

“이거 한 달 정도만 더 방치했어도 의뢰 들어왔겠네.”

지금 스콜피언을 경계하는 수준이 이 정도라면 한 달 정도만 더 내버려 뒀어도 차이나 넘버 식스 쪽으로 스콜피언 간부 처치 의뢰가 들어왔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권사윤을 처치해 달라는 의뢰도 몇 번 들어왔기에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며 웃자 경진이 의문스러워한다. 계속 눈치 보라는 뜻으로 아무런 설명도 덧붙이지 않은 사윤은 협회장이 잡아 둔 숙소에 도착하고 표정을 구겼다.

“배민철 이 새끼가.”

엄한 데서 돈을 아끼려 들었다. 나쁜 호텔은 아니지만 비즈니스호텔이었다. 생활하는 숙소 개념보단 잠만 자는 숙박업소 느낌이 강하단 소리다.

이런 호텔을 매치해 준 이유야 뻔했다.

‘놀고먹지 말고 나가서 일이나 해라.’

체크인 후 건네받은 호텔 키가 그리 말해 주는 듯해 불쾌감을 그득 안고 안으로 들어섰다. 하루만 자고 숙소를 옮길 생각을 하고 있는데 경진과 재희, 옌이 룸메이트가 되는 걸 피해 자연스럽게 같은 방을 쓰게 된 한건주가 방 안의 풍경을 보고 짧게 감탄했다.

“오.”

그 탄성에 신경이 곤두선 건 사윤이었다.

오, 는 얼어 죽을 오.

“괜찮네요.”

“눈 높여, 예쁜아.”

그를 이런 호텔에 감탄하는 놈으로 둘 생각은 없었다. 역시 숙소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며 침대에 걸터앉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숙소까지 안내해 준 정장 남자들이 짐 가방을 들고 문 앞으로 찾아왔다. 물 건너온 짐을 받아 든 사윤은 곧바로 경진의 방으로 쳐들어가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에게 계획을 설명해 줄 시간이었다.

“12일에 패스파인더 경매장이 열려. 그 전까지 우린 경매장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수상한 움직임이 없는지 살피고 우리랑 비슷한 방식으로 주변을 경계하고 정보를 찾는 놈이 있는지 확인할 거다. 수상쩍은 놈을 발견하면 바로 쫓거나 납치하지 말고 우선 추적 장치만 붙여 둬. 궁금한 거 있는 사람.”

마지막 질문은 형식적인 물음에 불과했으나 정말로 손을 드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두 명이나.

이재희와 한건주.

참 사소한 것 하나 예상대로 해 주지 않는 둘이었다.

사윤이 턱을 치켜들어 말하라는 신호를 주자 건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패스파인더 경매장이 뭐예요.”

“…….”

순간 방 안이 조용해졌다. 그 이재희마저 조금 당혹스럽다는 눈으로 한건주를 바라봤다.

“건주 씨, 패스파인더 경매장 몰라요?”

“알아야 해요?”

되묻는 목소리가 제법 발칙하다. 사윤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한 재희를 대신해 배턴을 넘겨받았다.

“세계 최초의 헌터 전용 경매장이다. 최초라는 말이 붙을 만큼 규모가 크고 경매마다 참석하는 단골층도 적지 않지.”

“오.”

또 저 빌어먹을 오. 할 줄 아는 감탄이 저거밖에 없나 싶었다.

머리를 쓸어 넘긴 사윤은 기가 찬 심정을 숨기지 않은 채 설명을 계속했다.

“입장하려면 골든 티켓이 필요해서 웬만한 각성자들은 못 들어와. 괜히 C급 이하 각성자들의 인생 목표가 패스파인더 경매장 입장이겠니. 그만큼 경매에 나온 물건들 질이 좋고 이번 사막의 형벌처럼 손에 꼽히도록 귀한 물건들도 나오지. 그래서 상급 헌터들은 좋은 아이템을 사려면 상점이 아니라 여기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걸 몰라?”

“몰랐는데요.”

“…….”

당당한 대답엔 한 번 더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다. 모두가 별종이라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한건주의 모가지는 뻣뻣하기만 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던데 그는 커 갈수록 뻔뻔해지기만 했다.

누굴 닮아서 저러나 싶어 쯧 혀를 찬 사윤은 경진을 노려보았다. 간이 크고 뺀질거리는 게 경진의 행동을 꼭 닮아 있었다.

저 없는 사이 쓸데없는 지식이라도 전수한 거 아닌가 싶어 의심하고 있으니 자료 미스 건으로 눈치 보고 있던 경진이 슬쩍 뒤로 물러났다.

“왜 그렇게 봐? 나 뭐 잘못했어?”

“넌 쟤한테 뭘 가르쳤어?”

“쟤?”

눈꺼풀을 한 번 내렸다 올린 경진이 사윤의 시선을 따라간다. 이윽고 건주를 확인한 그가 어이없는 헛숨을 흘렸다.

“가르치긴 뭘 가르쳐? 여기 중에 쟤 끼고돌며 가르친 게 형님밖에 없는데.”

똑 부러지는 정론을 사윤은 무시했다. 이어서 재희가 손을 들었다.

“저도 물어도 됩니까?”

“말해.”

설마 한건주보다 더 황당한 질문은 없겠다 싶어 곧바로 허락하니 이재희가 목덜미를 쓸듯이 매만지며 어색하게 웃었다. 사윤은 거기서 1차적으로 불길함을 감지했고.

“여기서 지내는 동안의 비용 좀 빌릴 수 있을까요? 해외 결제가 되는 카드를 안 들고 와서….”

그 궁상맞은 말을 들었을 땐 머릿속이 징 하고 울리는 기분을 받았다. 누군가 두개골을 망치로 내려치는 것 같았다.

저 두 새끼 누가 데려왔어?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둘 다 제가 데려온 새끼였다.

저 무식한 놈 한 명과 찌질한 놈 한 명을 제가 데려온 거다.

안 되겠다.

한 번쯤은 그들을 바로 교육시킬 필요가 있어 결심한 사윤이 머리카락을 털었다.

“아이고.”

낌새를 눈치챈 경진이 앓는 소리를 냈다. 옌마저 한숨을 내쉬었을 때 사윤은 간지 나는 빌런의 삶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다. 밤쥐 길드원들은 대여섯 번 들은 그 강의였다.

경진이 염증이 난다는 얼굴로 벽에 머리를 처박았다.

“우리 형님 궁상떠는 걸 제일 싫어하는데.”

작게 투덜거린 그의 입에서 신음 같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또 누가 시작했냐….”

한탄조의 말에도 사윤은 아무렇지 않게 강의를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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