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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16)화 (216/266)

제216화. 사막의 형벌 (6)

순간적으로 네 사람의 시선이 한 남자에게로 쏠렸다. 그럴 만도 하다. 일부러 그런 건지, 무신경했던 건지 몰라도 그 말을 할 때 이재희의 목소리는 주변에 바짝 붙어 있던 사람들은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컸으니까. 평범한 사람들도 귀를 기울이고 집중하면 들을 수 있을 그 소리를 S급들이 놓칠 리가 없었다.

“형님, 그게 무슨 소리야?”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경진이었다. 팔뚝을 붙잡은 그가 답지 않게 심각한 얼굴로 재희를 바라보자 붙잡힌 이가 말갛게 웃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 저리 가식적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진정성 있어 보인다는 게 이래서 사람의 평소 이미지가 중요한가 보다.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는 명연기에 긴가민가한지 경진이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이재희는 그 아리송한 표정을 마주 보고도 아무런 말 없이 웃기만 했다.

순진한 척하기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흘리니 경진의 시선이 사윤에게로 돌아갔다. 이재희가 대답하지 않을 성싶어 머리를 굴린 듯한데 악수다. 이쪽도 말해 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하나.

이것도 나름의 동병상련이면 동병상련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과 언제든 죽고 싶어 하는 사람 사이에는 꽤 큰 차이가 있었지만 사윤은 아주 가끔 이재희를 볼 때 이유 모를 의문의 동질감을 느끼곤 했다. 지금이 그 순간이었다.

그러니 뭐 어쩌겠는가.

모른 척해 줘야지.

“어깨가 뻐근하네.”

맥락 없는 딴청을 대놓고 피우자 경진이 답답한 얼굴을 했다. 한건주는 눈을 가라앉힌 채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고 그나마 태평한 건 옌이었다.

“잘못 들었나 보지.”

옌이 경진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흥얼거리듯 얘기했다. 까딱거리는 손끝이 내심 그냥 넘어가자는 걸 종용한다. 역시 눈치 빠르기로 베스트에 들 만한 이다웠다.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던 경진이 알면서 속아 준다는 느낌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사윤을 노려보았다.

난 왜.

애꿎은 피해자가 된 순간이라 눈빛에 억울함이 깃든다. 경진이 혀를 차며 낮게 읊조렸다.

“뭔 자살 희망자들밖에 없어.”

작지만 날카로운 말이었다.

“…….”

그가 한건주가 떠난 직후 있던 일을 아직 신경 쓰고 있는 것처럼 굴어 사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경진이 한숨을 내쉬며 사윤을 지나쳐 먼저 승무원의 안내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기내로 사라지는 이의 모습을 멍하게 응시하고 있으니 이재희가 볼을 긁적였다.

“저 때문인가요?”

“알면 처신 좀 잘 해.”

“하하.”

타박을 듣고도 좋다고 웃은 남자가 옌에 이어 세 번째 순서로 계단을 올랐다. 사윤은 이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겠다는 듯 조금 거리감 있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의 어깨를 툭 쳤다.

“가자, 예쁜아.”

“그 말 되게 아저씨 같아요.”

“…….”

서늘한 시선이 건주의 목을 훑었다. 으쓱, 어깨를 위로 들었다 놓은 남자가 뒤따라가겠다며 사윤을 밀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어 먼저 올라간 사윤은 입구 근처에 앉아 통로를 지나가려는 건주의 팔을 낚아채 구태여 옆자리에 앉혔다. 혼자서 앉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좌석이었으나 미리 얘기해 둔 덕에 2인석으로 개조되어 불편하진 않았다.

“…여기만 2인석이네요.”

“특별석이라고 생각해.”

뻔뻔하게 반응하니 도리어 할 말이 없나 보다. 별다른 저항 없이 의외로 순순히 앉은 이가 고개를 돌려 사윤을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이 시트에 비벼지는 소리가 낙엽이 부서질 때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사막의 형벌이 뭐예요?”

“…….”

“왜 그렇게 봐요?”

“일찍도 물어본다 싶어서.”

그러고 보니 한건주는 사막의 형벌에 대해 모를 거였다. 경매에 나올 만큼 기성 헌터들에겐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물건이지만 한건주는 아직 신입에 가까웠고 헌터 업계에 대한 관심이 너무 없어 지식이 부족했다. 이거 헌터 맞나 싶은 생각이 그가 각성한 지 1년이 지난 지금도 종종 들 정도라면 말 다 한 수준이다.

이 청정수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겪은 일은 많은데 아는 게 없으니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고 허접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윤이 한탄하듯 조그맣게 탄식을 흘렸다.

“넌 그렇게 아는 게 없어서 어떡하니.”

“차차 알아 가는 중이잖아요.”

“그 차차가 너무 늦지.”

반박할 수 없는 말이라서 그런지 한건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 뒤 어딘지 소심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그가 대꾸했다.

“…전 원래 신경 쓰이는 게 있으면 그것만 파고들어요. 그래서 헌터 정보를 찾아볼 시간이 없었어요.”

“핑계 잘 들었고.”

“아, 좀.”

기어이 손 하나가 찰싹 사윤의 손등을 때렸다. 그가 이런 식의 반항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 사윤이 맞은 손등과 때린 손을 번갈아 보았다.

“지금 쳤니.”

“사막의 형벌이 뭐냐니까요.”

채근으로 분노를 피해 가는 실력이 예술이다. 옌이 봤다면 박수를 칠지도 모르는 그런 수준이었다.

1년간 이런 것만 늘었지.

괘씸해서 대답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으니 매끄럽게 빠진 손끝이 사윤의 손가락을 툭툭 두드렸다. 아까는 냅다 치더니 이젠 또 손장난을 시도하는 이에 말문이 막혔다.

“어느 장단에 맞춰 줘?”

“그냥 보이길래요.”

“…마음대로 해라.”

솔직하게 굴겠다더니 컨셉을 막무가내 애새끼로 잡은 듯했다. 사윤은 더는 뭐라 하는 것도 질려 좌석에 몸을 기댄 채 한건주가 궁금해했던 사막의 형벌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때까지도 톡톡 손끝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사막의 형벌.

본래 이름은 ‘고대 신의 결정’이다.

그 아이템이 어엿한 이름이 있는데도 사막의 형벌이란 별칭으로 더 유명해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이템이 발견된 게이트가 클리어되기 전까지 사막이 증발하는 현상이 멈추질 않았다. 이미 잔뜩 마른 사막이 증발한다는 표현은 모순적이었으나 그리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사막의 모든 모래가 사라지고 갈라진 땅이 드러났으니 말이다.

놀랍게도 그 현상은 게이트를 클리어하자 말끔히 해결되고 다시 본래의 사막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게이트 근처에서 오래된 인신 공양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고대 신의 결정이 사막의 형벌로 불리게 된 건 그때부터였다.

게이트를 클리어한 헌터가 신의 형벌과도 같은 현상이라고 얘기한 말에 힘이 쏠린 게 이유다.

그 이야기를 추억에 젖은 기분으로 줄줄 늘어놓으니 한건주가 지겹다는 표정을 했다. 사윤은 발끈했다.

내가 남한테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일이 흔한 줄 아나.

알려 달라고 해서 기껏 설명해 주고 있는데 태도가 꽝이다. 이런 애가 어떻게 수능을 잘 쳐 한국대를 들어갔나 싶을 때 한건주가 사윤의 손끝을 그러쥐었다.

“그래서 사막의 형벌이 무슨 아이템인데요. 능력이나 뭐 이런 거요. 언제 유래 물어봤어요?”

퉁명스러운 말투와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언행일치 좀 해라.

사윤은 제 손을 장난스럽게 건드는 손끝과 지겹다는 표정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행동과 표정이 이렇게 매치 안 되는 사람은 또 처음 봤다.

“…나름 유물로 불리는 거라서 효과는 꽤 좋아. S급 이상의 아이템이기도 하고.”

그래도 손끝이 미묘하게 간질거리는 게 나쁘진 않아 순순히 대답했다. 뒷좌석에서 심심하다며 고개를 쭉 빼 사윤 쪽을 확인한 옌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입가를 가렸다. 손바닥 뒤로 호선이 짙어졌을 때 뭔가 싶어 함께 몸을 일으켜 본 경진이 손잡고 있는 두 사람을 확인하고 표정을 구겼다.

“커플 여행엔 끼는 거 아니랬는데.”

욕설이 살짝 섞인 감상평이었다. 사윤은 뒤에서 들린 헛소리를 못 들은 체하며 설명을 이어 갔다.

“한 달에 한 번, 주문을 외면 저주로 지정 대상을 즉사시킨다.”

“…네?”

덤덤한 얼굴로 내뱉는 말이 파격적이었다. 두 귀로 듣고도 믿기지 않는 효과에 건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아이템이 있어요?”

“어.”

“…S급으로 불릴 만한 게 아닌데?”

“S급 이상이라고 했잖아. 정확한 등급은 안 밝혀졌어. 시스템이 등급 불명으로 띄웠거든. 대신 등급란엔 유물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고.”

“아.”

납득이 간다는 듯 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L급이겠네요.”

“그래.”

이미 L급을 경험해 본 적 있는 건주와 사윤이었다. 자신들의 상태창만 봐도 그 등급이 있었기에 쉬이 예측할 수 있던 사윤은 이어서 말해 달라는 듯한 건주의 표정을 보다 픽 웃었다.

저럴 때가 제일 낫네.

마음이 불편한 것도 없고 유쾌하기만 하다. 한건주가 ‘자신이 모르는 것’을 제게 물어볼 때 기분이 가장 괜찮다는 걸 자각한 사윤은 사막의 형벌의 발동 조건을 설명했다.

“대신 지정 대상은 유물 사용자의 반경 1미터 내에 있어야 하고 유물 사용자와 눈이 무조건 마주쳐야 해. 그런 발동 조건을 생각하면 까다롭지. 그리고 뭐….”

나한텐 안 통하기도 하고.

이쪽은 유물 하나로 죽을 수 있다면 오히려 고마운 정도였다. 과거 사막의 형벌을 보유하고 있던 스콜피언과 맞붙었을 때 사윤이 이길 수 있었던 이유도 저주 같은 불사의 능력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꽤 당연한 일이었다.

사막의 형벌은 저주로 사람을 말려 죽이는데 자신은 그보다 악독한 저주에 걸려 있었으니까.

문득 든 생각에 자조적으로 웃자 손가락을 쥐는 남자의 압력이 거세지는 게 느껴졌다. 사윤은 그것을 모른 척하며 설명을 이어 갔다.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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