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15)화 (215/266)

제215화. 사막의 형벌 (5)

주차를 마치고 공항으로 들어온 사윤을 반긴 건 대체 언제 온 건지 모를 경진 무리와 건주였다. 풀어진 건주의 표정에서 전보다 느슨해진 분위기를 눈치챈 건지 차에서 부리나케 도망쳤던 세 사람의 표정이 빌어먹게 좋다. 화기애애 떠들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빌런 심기가 다 상했다.

“누구는 심란해 죽겠는데 신났지, 아주….”

먼발치에서 작게 중얼거린 사윤이 한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구두 끝으로 땅을 한 번 직 끌었다. 작은 음성과 행위였으나 믿을 만한 소수 정예로 구성한 팀은 다섯 중 넷이 S급이다. 그 등급의 신체 능력을 지닌 이들이 사윤을 눈치채지 못할 거리가 아니었다.

예상했던 대로 경진을 제외한 세 사람이 일제히 사윤을 발견했다. 옌이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활짝 웃는다. 레드 컬러의 머리카락이 시선을 확 잡아챘으나 그보다 더 눈길이 가는 상대가 있었다.

침착한 얼굴의 한건주.

이쪽으로 흘러들어 온 그의 시선엔 일말의 당황도, 분노도 담겨 있지 않았다. 혼자서 감정을 다 갈무리한 건지 평소와 다를 거 없는 정돈된 얼굴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딱히 마음에 드는 광경은 아니었다.

차라리 우는 게 낫지.

사윤은 한건주의 저 표정이 가장 꺼림칙했다. 화를 낼 거면 화를 내고 속이 상하면 우는 게 낫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무표정은 사람 속을 답답하게 만든다. 속내를 숨기는 것 같은 옅은 미소 역시 비슷한 부류였다. 그나마 사윤에게는 잘 지어 보이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종종 한건주가 저럴 때면 사윤은 이유 모를 불편함을 느껴야 했다. 이번에도 평소 느끼던 불편함과 유사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슬쩍, 한건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가면 같았던 표정이 사라지는 듯하다.

이윽고.

“신경 쓰여요?”

담백하고 단조로운 목소리가 시끄러운 공항 사람들의 음성을 뚫고 고막까지 직행했다. 그런 남자가 뜬금없다고 생각됐던 건지 다른 일행들의 시선이 건주에게로 돌아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남자의 시선은 허튼 데로 굴러가지 않았다. 저를 오롯이 담아내는 눈동자에 사윤은 순간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저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인식하려던 찰나 한건주의 입술이 한 번 더 움직였다.

“형.”

“…….”

모른 척 옆으로 돌아갔던 고개가 다시 정면으로 향한다. 눈이 휘어진 건주가 첫 순위로 시야에 들어왔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반대로 사윤의 표정은 구겨졌다.

자신의 앞에선 솔직하게 구는 편이라고 했던가. 그 말 그대로다. 지금의 한건주는 딱히 뭔가를 숨긴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드러낸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숨기지 않은 무언가가 뭔지 짐작도 해내지 못하는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마술사가 트릭을 보여 주고 있는데도 이해하지 못하는 꼴이다.

멍하니 서 있는 제 꼴이 꼭 부연 설명을 기다리는 관객 같다고 느낀 사윤이 숨을 삼켰다. 손끝이 움찔거린다. 요즘따라 끊었던 담배가 절로 생각이 났다.

“짜증 나네.”

차에서 한건주로부터 실컷 들었던 말을 이번엔 사윤이 뱉어 냈다. 숨을 길게 흘리며 쌓아 둔 감정을 녹여 낸 사윤이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예정보다 꽤 지체됐다. 혼란스러운 일이 생긴 탓이다. 그런데도 눈앞의 남자는 자신이 겪었던 혼란에서 발을 쏙 빼낸 것처럼 여유로워 보여 눈빛이 번들거린다.

배알이 좀 꼴리는데.

이쪽은 차 안에 틀어박혀 운전대에 이마만 스무 번가량 찍다가 돌아온 참이었다. 심란한 자신과 달리 태평해 보이는 건주가 마음에 들지 않아 습관적으로 교육을 생각하던 사윤은 이내 고개를 털어 버렸다.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니 빨리 움직여야 한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경매가 열릴 곳을 미리 탐색해 두는 거였다.

…한건주를 곁에 두는 것이 맞나?

사윤은 이쯤에서 또 한 번 헷갈렸다.

그가 곁에 없으면 물론 짜증이 난다. 전적이 얼만데 그를 제 곁에서 떼어 놓는단 말인가. 어디 가둬 둔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장담컨대 한건주는 자신이 감시를 붙이고 한 시간마다 확인하러 오지 않는 이상 이번에 제작을 부탁한 특수 우리에 가둬 놔도 이틀 안에 빠져나올 놈이었다.

그래서 떨어트려 놓을 수 없었다. 이번 샌프란시스코행에 건주를 데려가기로 결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곁에 두자니….

“자꾸 거슬린단 말이지.”

계륵 같은 상황이 아닐 수가 없다.

한건주는 곁에 두면 손톱 근처의 거스러미처럼 신경 쓰이고 거슬렸다. 득보다 실이 많았다.

사윤은 그와 걸핏하면 사사건건 부딪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한건주의 앞에서 성질머리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의 태도도 불만스러웠다. 한건주라는 상대를 고려하고 변수로 생각해 계획이 번번이 비틀리는 일에도 슬슬 이골이 났다.

그런데도 포기는 못 하겠다.

게이트 안에서. 아델리아 무덤 안에서 자각했던 그 순간의 감정이 지나치게 달았기에.

그 깨달음의 부피가 커서 비워 낼 수가 없었다.

입가를 매만진 사윤이 씁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켰다가 혀를 찼다. 이렇게 무언가에 흔들려 본 것도 오랜만이다. 한건주가 자신을 바꿔 놓고 흔들어 놓는 게 참 묘했다. 유쾌하면서도 불쾌하고 또 오묘하게 중독적이다.

각종 약물에는 다 무감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사람한테 휩쓸리고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자극이다. 자극은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고 그걸 사윤은 오랫동안 유실했다가 한건주로부터 되찾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모든 게 그가 곁에 있어야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놓을 수가 없다. 자신이 조금 포기하면 그도 자신도 편하다는 걸 머리도 알고 감정도 안다. 그래서 놓아주기로 마음도 먹었는데 막상 놓으려 하다 보면 또 어떻게든 붙들어 두고 있는 제가 보인다. 이번에 그를 조수석에 태워 기어코 공항까지 데려온 것 역시 그 예였다.

지나친 양가감정이다.

모순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앞으로 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고 핸드폰만 손에 쥔 채 가만히 서 있으니 경진이 안 오냐고 얘기했다. 옌이 이어 재촉하는 동안 재희와 건주는 조용하기만 했다.

“같이 가요.”

타이밍도 귀신같지.

별말 없다고 생각했을 때 정확히 입을 연다. 사윤은 이쯤 되면 시스템이 그에게 제 속마음을 독백 창으로 다 띄워 주는 거 아닌가 싶어졌다.

고민하다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발걸음을 뗐다. 협회 직원들에게 짐을 넘겨 미리 호텔로 가져다 놓으라 일러두었기에 꼴사납게 끌고 갈 캐리어는 없었다.

아무런 제재도 없이 출국장을 지나치니 건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사 안 받아도 돼요?”

그 목소리가 지나치게 순진하게 들려 사윤은 질문을 한 이가 한건주라는 것도 잠시 잊고 고개를 돌렸다. 어리둥절한 눈동자가 시야에 잡혔다. 한건주가 보안 검사를 위해 출국장에 줄을 선 인파를 흘깃거리며 말을 이었다.

“…기다렸다 가야 하는데.”

푸하하!

덧붙여진 말에 잠시 눈을 끔뻑거리던 경진과 옌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재희는 뭘 몰라서 그러는 건지 한건주에게 무안을 주지 않기 위해 그러는 건지 몰라도 부드럽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사윤은 농담하나 싶어 건주의 표정을 살폈다가 웃음을 터트리는 옌과 경진을 보며 인상을 쓰는 표정을 확인하고 그가 진심으로 물은 것이란 걸 깨달았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었던 거다.

덕분에 사윤 역시 황당한 웃음이 터졌다. 이윽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탈피해 여유를 되찾은 밤쥐의 수장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얘 봐라.”

촌스럽게 구네.

웃음기를 보태 얘기하자 한건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얼굴색은 몰라도 귀 등은 조금 빨개졌다. 사윤은 비로소 유쾌해진 마음으로 건주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절차 밟을 거 없어.”

“네?”

“비행기 표 끊고 시간 기다렸다가 우르르 출국장으로 몰려간 다음 짐 검사받고, 사람들한테 밀리면서 타고. 그럴 일 없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줬는데도 한건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사윤은 정말로 황당해 실소를 흘렸다.

얘는 지금까지 자기가 누구랑 다닌다고 생각했던 거야?

어디로 가든 제 이름 석 자를 대면 최소한의 대접은 받을 수 있을 거였다. 사윤의 이름이, 밤쥐의 이름이 잘 알려진 나라면 나라일수록 사윤과 교류가 밀접했던 고위 관리가 있는 나라일수록 더 그랬다.

그런데도 한건주는 그 사실을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하기야 허구한 날 다니는 데가 게이트고 길드 건물뿐이었으니 짐작이 안 갔을 수도 있다.

그제야 사윤은 깨달았다.

얠 데리고 어딜 가 본 적이 없네.

이재희는 적어도 축제에 데려가기라도 했지 한건주를 데리고 간 곳은 게이트밖에 없었다.

데이트 가기로 했는데.

망령의 늪에서 농담 삼아 했던 말을 기억해 낸 사윤이 고개를 슬 외로 꼬고 건주를 바라봤다.

“…뭐, 이번에 미국 데려가니 시작은 되겠지.”

“네?”

무심코 튀어나온 혼잣말에 건주가 반응한다. 사윤은 대꾸하지 않고 남자의 얼굴만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렇게 보니 조금 어려 보이긴 했다.

제 생각보다 더.

미래가 꽤 창창하게 어려 보인다.

그렇다면, 자신이 조금 데리고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조금 전까지 골몰하고 있던 고민과 이어져 입을 달싹였다. 이전까진 마주 보지 않았던 감정이 고개를 든다. 지독한 이기심이었다.

어차피 저항하는 자가 활성화되면 자신은 죽음과 한 발짝 가까워질 것이다. 한건주를 데리고 있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그 시간 정도는 자신이 써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지금까지 그랬듯, 계속 흔들리고 휩쓸리며 다채로운 감정을 느끼는 거다. 남은 생을 삶으로 만끽하는 거다.

설령 그게 서로 갉아먹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해도 그가 도망간 그 순간부터 자신과 그는 꽤 오랫동안 서로를 갉아먹고 있는 관계였으니 몇 달 더 지속된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사윤의 손끝이 한 번 떨렸다. 어째서인지 이재희에게로 시선이 돌아갔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모호하게 웃는다. 그 웃음이 슬퍼 보이기도 했고 안쓰러움을 담은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사윤은 다시 시선을 굴려 건주를 마주 보았다.

계획은 간단하다.

제 곁에 있는 건 한건주가 선택한 거였고, 자신은 그 선택이 최악의 선택임을 알면서도 눈감아 주면 되었다. 그러다 이용할 순간에 이용해 먹고 자신은 죽음으로 도망치는 거다.

더할 나위 없이 이기적이면서 비굴하고 그렇기에 꽤 어울리는 결말이다.

‘한건주를 제 곁에 두는 게 맞는가?’에 대한 고민이 종결된 순간 사윤은 명쾌함이 아닌 답답함을 느꼈다. 시선이 자꾸만 이재희 쪽으로 돌아가자 누군가 형 하고 저를 부른다. 반사적으로 입이 움직였다.

“해외 나가 봤니.”

갑작스러운 물음에 건주가 수상쩍다는 눈빛을 한다. 이런 질문도 못 하나 싶어 억울해하려던 순간 대답이 들려왔다.

“어릴 때 몇 번이요.”

“어릴 때 언제.”

“갑자기 이런 조사는 왜 하는 거예요? 저 또 뭐 의심받아요?”

그 의심은 지금 내가 받고 있는 것 같은데.

사윤은 조금 자괴감을 느꼈다. 내가 지금 애새끼랑 사랑과 전쟁을 찍고 있는 것도 아니고 대화에 오가는 게 무슨 의심과 분노뿐이었다. 또 언쟁이 번질 것 같아 손을 내저은 사윤이 한 발 앞으로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해외 많이 다닐 거라 물어봤다. 왜 괜한 의심을 하니.”

“해외 자주 다닐 거라고요?”

“그래. 그러니까 다음에 올 땐 그렇게 촌스럽게 굴지 마.”

사윤은 말을 하다 말고 건주 쪽을 돌아본 다음 픽 웃었다.

“밤쥐 신분으로 가든 노아 신분으로 가든 한국에서의 출국은 걱정 없거든. 입국 심사가 문제지.”

“……?”

“특혜받아 권력 남용하고 다니니 출국 검사 절차는 필요 없다는 얘기야.”

간단히 요약하자 건주가 아, 하고 탄식을 흘렸다. 이윽고 그게 지금 당당히 말할 거리가 되냐는 듯한 핀잔이 돌아와 못 들었다는 듯 귀를 한 번 막고 콧노래를 흘리니 누군가 곁으로 다가왔다.

“사윤 씨 선택을 존중해요. 누구나 자신의 끝을 정할 자격은 있죠.”

이재희였다.

사윤은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다가온 이를 놀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이재희가 시선으로 바닥을 한 번 훑었다가 다시 사윤을 응시했다.

“하지만, …제 경험상 남은 사람은 꽤 많이 공허할 겁니다.”

“…….”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부드러운 웃음에서 기시감이 느껴진다. 사윤은 본능적으로 물었다.

“뭘 봤어?”

“…….”

“네 그 빌어먹을 능력으로 또 뭘 본 거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말할 수 있는 거면 얘기해.

협박조가 뒤섞인 추궁에 가까운 물음이다. 사윤의 날이 선 시선에도 불구하고 태평하게 목을 한 번 울린 남자가 나직이 대답했다.

“그건 대답하기 조금 곤란한 질문이에요. 제 계산상, 그건 말하면 죽을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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