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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14)화 (214/266)

제214화. 사막의 형벌 (4)

경매에 참여하기 위해 미국으로 출발하는 날이 당장 내일로 잡힌 탓에 사윤과 건주의 냉전에 피해를 본 이는 당연히 함께 가기로 확정된 밤쥐의 길드원이었다. 더 정확히는 경진과 옌, 재희 세 명 말이다.

아침부터 얼굴도 안 마주치려 하더니 공항으로 출발하기 직전까지 서로 쳐다도 안 보는 두 사람에 제대로 새우 등 터진 꼴이 된 셋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대체로 경진이 왜 저러냐 호소하고 재희가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쉬면 옌이 남 일인 양 어깨를 으쓱거리는 풍경의 연속이었다.

의문을 해소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던 경진은 차 안에서의 어색한 침묵을 견디다 못해 결국 폭발했다.

“대체 왜들 이래? 또 무슨 일이 있던 건데?”

이럴 거면 차라리 옆 좌석에 태우질 말든가. 운전대는 지가 잡고 옆좌석엔 제 썸남까지 태워 놓은 주제에 저러니 뒤에 탄 사람들만 곡소리였다. 경진이 앞 좌석 양쪽의 목 받침대 위를 붙잡고 상체를 앞으로 옮기며 소리치자 사윤의 시선이 룸 미러를 통해 그에게 돌아갔다.

종종 건주 쪽으로 싸늘한 시선을 흘리다가 이를 악물길 반복했을 때의 그 눈빛이었다. 거기에 살기까지 더해지니 직접적으로 마주친 게 아님에도 소름이 돋는다. 그러나 경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괜히 밤쥐에서 오래 버텨 간부가 된 게 아니다.

밤쥐 길드 내 연봉 1위다운 깡을 발휘한 남자가 재희를 방패 삼아 몸의 절반을 가리고 다시 혀를 놀렸다.

“아니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같이 가자고 부른 건 형님인데 우리가 여기서 눈칫밥을 먹어야겠냐고.”

“…….”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최악의 일이 뭔지 알아? 상사끼리 싸워 괜한 직원들이 눈칫밥 먹는 거랑 사내 연애 한 애들 사이에 끼어서 커플 싸움 관망하는 거, 월급이 밀리는 거. 이 세 가지야. 그중 둘을 내가 겪고 있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심지어 이 상태로 미국도 가. 와 나 미치겠네.”

그러더니 진짜로 미친놈처럼 헛웃음을 터트렸다. 옌이 잘한다는 듯 옆에서 경진을 부추기고 있는 그 말 같지도 않은 광경을 한심하게 지켜본 사윤이 마침 빨간불이라 차를 세웠다.

“그럼 내려.”

“…어?”

“내려서 뛰어오라고.”

이래서 예민한 사람 건드는 거 아니다. 졸지에 도로 한복판에서 내리게 생겨 경진이 눈을 깜빡였을 때 재희가 입을 열었다.

“경진 씨한테 너무 뭐라 하지 마세요.”

“둘이 사이좋네. 이참에 같이 내려서 뛰어와.”

재밌겠네, 아주.

사윤이 이죽거렸다. 말을 철회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진지한 눈빛에 세 사람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정말로 내리라는 듯 문의 잠금까지 열어 줬을 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건주가 끼어들었다.

“지금 저더러 눈치 보라고 시위해요?”

“뭐?”

쌓일 대로 쌓인 사윤의 분노가 20대 초반 애새끼를 향했다. 안전벨트를 매만지던 건주가 사윤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그렇잖아요. 저 사람들이 딱히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혼내고 쫓으면 저 사람들이 형한테 화내겠어요? 나한테 화내지. 그걸 원하고 이러는 거냐고요.”

형 정치질도 잘하네요.

덧붙이는 말은 칭찬이 아니다. 그건 아무리 눈치 없는 사윤이라도 알 수 있었다.

“…어제부터 자꾸 기어오르지.”

“왜요. 저도 내릴까요?”

“…….”

그 말 한마디와 함께 건주의 눈이 사윤에게로 돌아갔고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빠아아앙!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움직이지 않으니 뒤에서 차들이 연신 클랙슨을 울려 댄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운전 똑바로 안 해? 어떤 정신 나간 새끼가 운전대를 처잡고 있고 지랄이야!”

간 큰 누군가는 차선을 바꿔 가면서 사윤을 향해 목이 터져라 욕을 하기도 했다. 차종이 귀한 편이라 그런지 사윤이 한 괴랄한 짓에 비해 시비 거는 이는 드물었지만, 지금처럼 욕하는 이가 없는 건 아니다. 옆으로 차 수십 대가 지나갈 때까지 가만히 있던 사윤은 욕을 한 번 더 먹고 이쯤 되면 경찰에 신고도 들어갔겠다 싶을 때 입을 열었다.

“뭐 때문에 그래?”

“뭘요.”

“뭐 때문에 자꾸 사람 툭툭 건드냐고. 뭐, 내가 너한테 사과라도 할까? 이게 사과까지 받을 일이니.”

“제가 언제 사과해 달라고 했어요?”

“그럼 뭔데.”

“그냥 가라고요. 아무 짓도 하지 말고. 옆에서 짜증 난다는 듯 계속 한숨 푹푹 쉬어 대고 괜한 사람들 쪼는 게 저 눈치 주는 거지 아니에요? 저 말고 다른 사람들한테 짜증 내고 화풀이하고 그러면 제 기분은….”

말을 하다가 숨을 들이켠 이가 머리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러곤 다시 차가운 차창에 머리를 기대 열이 오른 듯한 얼굴을 식히더니 입을 열었다.

“그냥 제가 내릴게요. 그게 형도 저 사람들도 편하겠네요.”

그리 말하며 안전벨트를 풀려 하자 사윤의 목과 미간에 핏줄이 섰다. 룸 미러를 통해 그 모습을 확인한 경진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 그냥! 내가 내릴게!”

“나도 내릴게.”

“같이 내리겠습니다.”

눈치 빠른 성인 셋이 민첩하게 움직여 벨트를 풀고 하차했다. 이 와중에 꼼꼼하게 어디 공항으로 가는지까지 묻고 늦지 않게 가겠다고 얘기한 재희가 차 문을 닫는다.

“허.”

내리려고 했던 건주는 그 잠깐을 못 참고 차례를 앗아 간 어른 셋을 기막힌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반면에 사윤의 시선은 여전히 건주에게 꽂혀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진다.

빠아아앙!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시발.”

욕설을 지껄인 사윤이 결국 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숨 막히는 정적이 이어질 때 건주의 핸드폰이 한 번 울렸다. 사윤의 시선이 힐끔 그쪽을 향하고 건주는 몸을 돌려 사윤의 방향에서 핸드폰이 안 보이게끔 화면을 열었다. 의도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는 그 작태를 확인한 사윤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별 지랄은.

누가 화면이 궁금하다고 했나. 별 개같은 짓은 다 해 사람 짜증 나게 한다.

욕이란 욕을 목구멍 안쪽에서 죄 씹은 사윤이 신경질적으로 핸들을 쥐었다. 그사이 건주는 재희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했다. 웬 문자인가 싶었는데 인터넷 사이트 링크 하나를 보내 준다.

뉴스 사이트였다.

[화제의 루키 ‘제비’의 사윤을 만나다!]

링크를 꾹 누르자마자 뜨는 사이트에 시선이 가늘어진다. 그대로 스크롤을 쭉쭉 내리던 건주는 한 대목에서 멈췄다.

‘납치당했던 당사자이자 통칭 ‘가면남’이라고 불리는 사람과는 어떤 사이일까요?’

그 질문이 시선을 앗아 갔다. 스크롤을 내리던 엄지가 천천히 화면에서 떨어졌다. 숨을 한 번 삼켰다가 이어진 문장과 답변을 확인한 건주는 미간을 홱 좁혔다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미지 관리를 좀 한 것 같은데.

발언이 다소 거침없긴 했어도 모든 대답에 존댓말을 한 것과 제법 부드럽고 단정한 화법을 구사한 걸 보면 어느 정도 이미지 관리를 한 것 같긴 했다. 대충 친절한데 할 말은 하는 그런 컨셉으로 말이다. 그래서 이 인터뷰 내용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었다.

지금 같은 심정에선 별로 믿고 싶지 않았는데 이 인터뷰 기사 링크를 보내 준 사람이 마음에 걸린다.

이재희.

그가 허튼 이유로 이걸 보냈을 리 없다.

‘그는 제게 무척이나 소중한 사람이에요. 꽤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사람이고, 제비 길드가 세워지기 전부터 연이 맺어 있었죠. 다들 그런 인연이 하나씩 있잖아요.’

인터뷰 답변에 있던 그 문장이 사윤의 목소리로 음성 지원돼 들렸다. 실제로 들은 게 아닌데도 꽤 생생하다. 묘한 기분에 핸드폰을 매만지던 건주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크게 들려와 아차 싶었을 때.

“나더러 한숨 쉬지 말라더니 왜 자꾸 한숨이야.”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타박이 들려온다.

이런 게 짜증 난다, 이런 게.

건주는 마음 바꿔 먹고 생각할 틈도 제대로 주지 않는 이를 흘겨보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반항의 의미로 해석한 건지 사윤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또 싸움이 터질 기세라 공항까지 남은 거리를 확인한 건주가 말을 골랐다.

그래, 차라리 그 셋이 자리를 비워 준 게 다행이었다.

자신은 사윤을 겪었고 이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예전보다는 안다.

그는 문제를 직면하는 사람이 아니라 불편한 상황이 생기면 알아서 해결될 때까지 대화를 회피하는 사람이다. 그거에 질리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직접 떠나왔다 온 거 아닌가.

그러니 자신이 예전처럼 굴어선 바뀌는 게 없다.

그걸 자각한 건주가 머리를 젖혔다가 뻐근한 목을 한 번 풀었다. 정말로 한결같이 회피성이 짙은 사람이다.

“형에 대해 하나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열린 입술에 사윤의 관심이 건주에게로 쏠렸다. 숨을 한 번 들이켰던 건주가 핸드폰을 쥔 손을 무릎 쪽으로 내려놓았다가 눈을 감았다. 그간의 일들이 잠시 검은 화면 속을 스친다. 어제 나눴던 대화도 복기되었기에 주먹을 그러쥐었던 손에 서서히 힘이 풀렸다.

“이젠 형이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 보여요.”

“갑자기 뭔 소리야?”

“짜증 난다고요.”

“……?”

기습적으로 들어온 힐난에 사윤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가 당황스러움과 짜증을 숨기지 못하고 있을 때 건주에겐 공항이 보였다. 성이 난 사윤이 과태료는 신경 쓰지 않고 과속한 탓에 예정보다 더 일찍 도착했다.

내릴 때를 직감한 건주가 사윤을 응시하다가 안전벨트를 철컥 풀었다.

“저 형 만나고 나서 다른 사람 신경 쓴 적 없어요. 제가 누구를 신경 썼다면 그건 형 때문이고요. 그러니까….”

잠시 말을 한 번 멈춘 건주가 차 손잡이 쪽에 손을 얹고는 사윤을 돌아봤다. 시선이 맞물린다. 사윤의 시선은 전보다 순해졌고 건주의 눈빛은 전보다 깊었다. 생각에 잠긴 듯 침음성을 흘린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앓는 음성을 허밍으로 바꾼 뒤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저한테 좀 솔직하게 굴어요.”

…전 형 앞에서 가장 솔직하니까요.

자그맣게 말을 덧붙이며 얘기를 끝낸 남자가 먼저 내려서 기다리고 있겠다며 차 문을 열었다. 그대로 차에서 내린 뒤 다시 문을 닫고 공항 안으로 들어가는 일련의 과정을 멍하게 바라본 사윤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서 화가 풀렸다는 거야, 뭐야?”

너무도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눈동자가 빛을 잃었다. 말없이 시선만으로 건주를 따라가던 사윤은 잠시 뒤 정신 차리고 손을 움직였다. 주차는 해야 했으므로.

저한테 좀 솔직하게 굴어요.

주차하러 가는 내내 그 말이 계속 귓가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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