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사막의 형벌 (3)
“형은 왜 저를 다른 사람이랑 못 엮어 먹어서 안달이에요? 형네 길드 사람들은 저를 형이랑 엮어 먹으려고 안달이던데.”
“그게 우리가 안달 나서 엮는 거겠어? 우리를 뭐로 보고….”
경진이 자신들이 한가해 보이냐며 길드원들을 대표해 억울함을 토했다. 우리를 꺼낼지 말지 고민하던 사윤은 건주로부터 흘러나온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생각을 멈추고 눈꺼풀을 슴벅거렸다. 저도 모르게 눈길이 향한 곳은 재희 쪽이었다.
“…….”
시선이 마주치자 이재희가 머쓱한 듯 고개를 숙였다.
어쭈?
누가 봐도 외면하고 있어 사윤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피해?
자기 멋대로 도와주고 조언할 때는 언제고 이젠 또 사람이 몇 번 쳐다봤다고 알아서 하라는 양 무시하는 게 같잖았다.
이럴 거면 그동안은 왜 도와줬나?
형용할 수 없는 괘씸함과 배반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헛웃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분명 가벼운 음성이었는데도 누군가 송곳을 박아 넣고 망치로 내려찍기라도 한 것처럼 강렬하게 느껴졌다. 눈동자가 굴러갔다.
“또 저 사람 보네.”
입꼬리를 비튼 남자가 시선 끝에 놓인다. 질타하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를 노려보는 이에 사윤의 시선이 굳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아니, 분위기만 얼어붙은 게 아니다.
“형님, 형님…!”
고문 별장 바닥에 성에가 끼고 있었다.
서리의 기운이 주인을 숙주로 삼고 뿜어져 나와 고문 별장 전체를 뒤덮는다. 신발이 얼어붙기 시작해 경진이 당황했다. 다급한 음성이 채근하듯 저를 불러 대 정신 차린 사윤이 상황을 눈치채고 욕설을 지껄였다.
시발 이건 또 언제 나왔어.
서리의 기운이 멋대로 개방됐다는 건 한순간 능력이 통제를 벗어났다는 뜻이다. 기습 공격을 당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나가 바닥을 친 것도 아닌데 능력 컨트롤을 실패한 사윤이 의문을 느끼며 고개를 기울였다. 경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부 싸움이 칼로 물 베기라고 한 새끼들을 다 죽여 버려야지, 원.”
범죄 길드의 일원답게 살벌하게 중얼거리며 손을 풀고 자리에서 벗어난 경진이 재희의 팔을 붙들었다.
“저 둘끼리 싸우게 두고 우린 튀자, 형님. 내가 보기엔 이거 우리가 새우 등 처지인 것 같거든.”
여기 있으면 둘 다 등 터져 죽게 생겼다며 호소하는 이의 표정이 제법 진지하다. 들어주는 이재희의 표정 역시 진지해 보였다.
콩트 보듯 그걸 지켜보고 있던 사윤의 입에서 비웃음이 터졌다. 박쥐 같은 자식. 언제부터 그의 형님이 자신이 아닌 이재희가 된 건지 모르겠다. 제 눈앞에서 당당하게 도망을 선언하는 경진을 어처구니없게 바라본 사윤이 입을 열었다.
“경진아.”
“형.”
그러나 곧바로 따라붙은 음성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하게 했다. 타이밍을 잰 경진은 ‘이독제독 승리!’라는 말을 외치며 이재희를 들추고 달려 나갔다. 두 사람이 고문 별장을 벗어나기까진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일할 때나 저렇게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보든가.
기막히게 그 모습을 따라가던 사윤이 닫힌 문을 마주 보았다가 건주를 돌아보며 표정을 구겼다.
“예쁜아. 너 하나 때문에 내 체면이….”
“지금 그게 중요해요?”
뚝, 말의 허리를 잘라 먹는 게 보통 익숙한 솜씨가 아니었다. 몇 번 이 상황을 겪어 본 사윤은 눈앞의 남자가 화난 상태라는 걸 쉬이 직감했다. 동시에 사윤도 짜증이 치밀었다.
저 새끼는 남들한테는 잘만 싱글싱글 웃더니 왜 나한테만 지랄이야?
한건주가 남들한테 틱틱대는 걸 본 적은 있어도 화내는 꼴은 본 적 없다. 그런데도 제겐 웃는 꼴보다 화내는 걸 더 많이 보여 주는 게 기분이 아주 된장에 비벼지는 것 같았다. 말도 못 하게 구리다는 소리다.
얕보인 건지, 무시하는 건지 모르겠다. 붉은 입술 사이를 한숨이 가르고 나왔다.
“또 뭐가 문젠데.”
뱉어 놓고도 당황했다. 제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드라마에서나 나왔을 법한 어투였으므로. 재작년쯤 종식과 한창 챙겨 보던 연속극에서 7년째 싸우고 헤어지고 재결합하기를 반복하던 연인의 말투가 학습이라도 된 것처럼 제 입에서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지금 느낀 지긋지긋하다는 감정이 그때 드라마를 보면서 느낀 감정과 비슷해서 그런 듯했다.
“그러는 형은 뭐가….”
소리치려다가 감정을 억누른 것처럼 성대를 꽉 조인 음성을 흘린 건주가 머리카락을 털었다. 누가 누구더러 애새끼래? 남자의 입에서 자그마한 혼잣말이 흘러나온다. 말이 혼잣말이었지 그냥 저더러 하는 이야기였다. S급 청력에 저 정도 목소리가 안 들릴 턱이 있나.
“지금 누구 들으라고 그딴 식으로 말해?”
“안 지쳐요?”
“뭐?”
“저랑 매번 이런 식으로 말다툼하는 거 안 지치냐고요.”
염증이 난다는 말이 어떤 건지 직접 체감하고 있을 때쯤 들린 얘기라 얼굴이 일그러졌다. 질린다는 표정을 보란 듯이 지으니 한건주가 툭 하고 수프 그릇을 밀었다.
“짜증 나게 왜 매번 그런 오해만 해요? 햄스터도 아니고 쳇바퀴만 몇 번을 돌아. 뭐, 취미예요?”
“무슨 오해.”
“1년 전부터 계속 오해하잖아요.”
“그러니까, 뭐가. 말 알아듣게 안 해?”
“왜 자꾸 가르치듯이 얘기해요? 내가 진짜 애예요?”
“그럼 네가 애새끼지 뭐-.”
새끼가.
듣기 싫다는 듯 질끈 눈을 감아 버리는 이에 사윤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대신 날뛴 건 흉포한 서리 기운이었다.
“그래, 내가 요즘 너무 봐줬지.”
역시 저 새끼는 주기적으로 물에 빠트려 줘야 정신을 차린다. 한건주의 성질머리가 수용성이라는 걸 재자각한 사윤이 굳은 표정으로 한곳에 서리 기운을 밀어 넣고 있을 때 건주의 입이 열렸다.
“능력으로 가둬 봐요. 다신 얼굴 안 볼 테니까.”
“모가지 잘라 보관하면 돼.”
답변은 즉각적으로 튀어나왔다.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사윤을 바라본 건주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잠시 그 상태로 대치가 이어졌다. 먼저 눈살을 구긴 건 한건주였다.
“무슨, 무슨 사람이 그래요?”
기가 찬다는 듯 자리를 박찬 이가 신경질을 부렸다. 일어나느라 발에 차인 식기가 나뒹군다. 쟤가 저걸 처먹을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 상황을 복기하고 있을 때였다.
“형도 저한테 좀 맞춰 봐요.”
“…….”
“아니, 맞춰 보라는 것도 아니지. 그냥 얘기 좀 제대로 들어 주면 안 돼요? 왜 그런 오해를 하냐고 물었잖아요. 왜 또 싸워요, 우리?”
“그러게 누가 따박따박 대들라고 했냐? 어디서 배워 먹은 말대꾸야?”
“시발 또 애 취급. 이런 게 싫어서 내가…. 짜증 나. 어디에 장단을 맞추라는 거야?”
“시발?”
되묻는 말에 한건주가 입술을 감쳐물었다. 할 말이 많은 표정인데도 역설적으로 입을 꽉 다문 이가 신경질을 내다가 자리에 풀썩 앉았다. 뛰쳐나갈 줄 알았더니 생각 외의 반응이었다.
꼰대.
작게 웅얼거리는 말에 사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어라 쏘아붙이기도 전에 남자가 먼저 선수 쳐 말을 쏟아 냈다.
“저는 형한테 다 맞춰 보려 하잖아요. 형이 좋아하는 거를 기준으로 삼고 눈치도 보고 비위도 맞추고 그러는데 형은 왜 맞춰 줄 생각을 안 해요? 전에도 말했잖아요. 그냥 좀 먼저 물어봐 주면 안 되냐고요. 아니면 얘기나 들어 주라고요. 이번에도 그래요. 제가 처음부터 짜증 냈어요? 황당해한 거죠, 그건. 형이 빌어 처먹을 오해를 하니까.”
무슨 한 맺힌 사람처럼 말을 쏟아부었다. 아주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릴 기세라 건주와의 대화를 곱씹던 사윤이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저 새끼가 건방지게 말해서 그렇지 계속 같은 말을 하긴 했다.
“내가 무슨 오해를 했는데.”
“제가 옌이라는 사람 좋아한다는 식으로 얘기했잖아요. 이번만 그러면 모를까, 제가 무슨 가벼운 새끼로 보여요? 왜 매번 상대를 바꿔서 오해해요? 애초에 그걸 오해하는 것도 웃긴데.”
“뭐가 웃겨? 네가 오해할 만하게 구니까 나도 오해하는 거 아니야. 이게 내 탓만 하네?”
“내가 오해할 만하게 굴었다고요? 제가 뭘 했는데요.”
“뭐 하는 사람인지 묻거나 계속 쳐다보잖아.”
잠시 뼛속이 아릴 만큼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황당함과 실망감 외엔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눈이 사윤을 향했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금 겨우 그거 했다고 오해해요?”
기막힌 표정을 한 이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몇 번 웃음을 터트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초에 기준점을 질문으로 삼으면 안 되죠. 누구 때문에 물었는지, 누가 신경 쓰여서 쳐다봤는지 그런 거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딴 눈치도 없는데 사람이 어떻게 살지?”
“뭐?”
참을 만큼 참았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난 사윤이 발을 내디디려는 찰나 한건주가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다 형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형이 궁금해서 물었고 형이 신경 쓰여서 쳐다봤고 형 때문에 그렇게 군 건데 무슨 오해를 그딴 식으로 해요?”
“그럼 시발 네가 나 좋아하냐? 좋아해?”
“…….”
고딩 새끼들도 하지 않을 대화가 한바탕 오갔다. 화가 치밀어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막 뱉은 사윤이 거친 호흡을 들이켜다가 눈을 깜빡였다. 입을 다문 한건주가 침묵 속에서 사윤을 노려보다가 성큼성큼 보폭을 넓히며 걸어가 사윤을 지나쳤다.
“형이 알아서 생각해요.”
잔뜩 지친 목소리로 불퉁한 티를 팍팍 내면서 얘기한 남자가 옌과 경진, 재희가 차례로 사라진 그 문을 열고 멀어져 갔다. 지하실 안에 덩그러니 남은 사윤이 허, 하고 숨을 토해 냈다. 결국 특수 제작한 우리는 꺼내 보지도 못하고 대화가 끊겼다.
“저 새끼는 무슨 보여도 신경 쓰이고 안 보여도 빡치고….”
스스로가 어이없어 인상을 찌푸렸다가 콰아아아앙! 모아 둔 서리의 기운을 일시에 폭발시키며 신경질을 부리자 끼익, 하고 지하실 철문이 닫혔다.
“워우….”
재밌는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예감에 돌아왔던 옌이 철문 뒤에서 감탄사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