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화. 사막의 형벌 (2)
죽과 수프 중에 고민하다가 수프가 나을 것 같아 근처 식당을 방문해 음식을 마련해 온 사윤은 두 그릇의 수프를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먹여 달라고 하면 괘씸하게 여기며 한 번 털 생각이었는데 한건주는 손을 풀어 주자 저 알아서 잘 먹었다. 그릇 바닥을 긁는 소리가 시원하기까지 했다.
반면에 같이 굶어 놓고 식욕이 없는 건지 이재희 쪽은 영 깨작거리기만 했다. 숟가락이 입으로 들어가는 꼴을 못 본 것 같아 사윤이 입을 열었다.
“왜 안 먹냐?”
“꼭 먹어야 합니까?”
이재희가 난처하게 웃었다. 이유를 몰라 눈만 깜빡거리고 있으니 경진이 옆에서 어우, 하고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형님 같으면 이 상황에 음식이 입에 들어가겠어?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들어가네.”
잘만 먹고 있는 건주 쪽을 턱짓하자 경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쟤는, …쟤는 좀 이상한 거고 이 형님 반응이 정상인 거지.”
“쟤가 뭐가 이상해? 잘 먹으면 좋은 거지.”
“됐다. 이미 눈깔 돌아갔는데 내가 뭘 더 말해?”
안 그래, 형님?
언제 그렇게 친해졌는지 이재희의 어깨 위로 팔을 걸친 경진이 측은한 시선을 보냈다. 동병상련의 눈빛을 하길래 사윤은 더 애틋해지라고 옌을 시켜다 경진까지 바닥에 무릎 꿇렸다. 순식간에 죄인이 셋으로 늘었다.
“형님?”
간부에서 죄인으로 전락하게 된 경진이 황당함을 표했다. 사윤은 더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왜 못 먹는데?”
“시체 냄새 가득한 곳에서 밥이 넘어가겠냐 이 말이지.”
무릎을 꿇렸더니 말투가 조금 공손해졌다. 역시 폭력 앞에서 장사는 없는 모양이다.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사실을 곱씹으며 사윤은 코를 킁킁거려 냄새를 맡았다. 확실히 피비린내가 짙게 배어 있긴 하다. 워낙 익숙한 냄새라서 딱히 고려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건주가 제법 깔끔 떨었던 것 같은데.
처음 이 별장에서 깨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한건주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정말로 별생각이 없어 보이는 듯해 살짝 그러쥔 손에 머리를 기대고 그를 응시하자 수프를 얌전히 먹던 이가 시선을 마주쳐 왔다.
왜 그렇게 보냐는 듯 눈꺼풀을 느릿하게 감았다 뜬다. 사윤은 상처를 회복시킨다고 쏟아부은 포션에 살짝 젖어 가닥가닥 뭉쳐 있는 속눈썹을 빤히 보았다.
“너는 왜 멀쩡히 먹고 있어?”
“뭐가요?”
“쟤는 시체 냄새 나서 못 먹겠다는데.”
재희 쪽으로 시선을 굴렸다가 단조롭게 얘기하자 음, 하고 목을 한 번 울린 이가 사윤이 그랬듯 코를 한 번 킁킁거리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비위가 강해졌나 보죠. 한두 번 맡아 보는 냄새도 아니고.”
그러더니 다시 먹는다. 사윤은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건주의 모습에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저것도 성장으로 쳐야 하는 건지, 아니면 안쓰럽게 여겨야 하는 건지.
“쟤가 빌런이었으면 성장인데….”
범죄 길드의 일원이었으면 장하다 해 줄 텐데 이젠 그것도 아니니 기준이 모호해졌다.
차라리….
문득 사윤의 눈동자에 이채가 번뜩이자 옌과 경진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반대야.”
“안 돼.”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우리가 형님을 원투 데이 보는 줄 아나…. 이 이상 간부 늘리는 건 반대야. 내 연봉 깎여.”
“애초에 형님 예쁜이는 이제 우리 길드원도 아니잖아.”
두 간부가 일리 있는 반박을 했다.
…아니지. 연봉 깎인다는 건 그다지 일리 있는 반박이 아니니 옌만 그럴듯한 말을 했다. 사윤은 자신이 한건주를 간부로 올려 볼 생각을 했다는 건 어떻게 알고 귀신같이 반대하는 이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다 혀를 똑딱 튕겼다.
“어차피 생각만 해 본 거였어. 어떤 놈이 동등에 미쳐 있어서 상사 부하 관계는 안 돼.”
나긋하게 얘기하자 동등에 미친 놈이 제 이야기 하는 줄 알아듣고 고개를 들었다. 배가 고팠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어느새 접시가 깨끗하다. 사윤의 힐난 어린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재희 쪽으로 향했다.
쟤는 나이가 많아도 몇 살은 더 많으면서 애를 왜 굶겼단 말인가.
책망의 시선이 짙어지자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을 달싹거렸던 재희가 이내 체념의 눈빛을 했다. 누가 보면 굶게 된 사람이 그라고 오해할 법한 표정이었다.
생긴 게 사연 있어 보여서 저런 처연한 표정을 지으면 제법 잘 먹힌다. 사윤은 혀를 차며 다시 건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일 당장 미국으로 갈 준비 해.”
명령은 갑작스러웠다. 방금까지 식기가 달그락거리던 장소에서 할 법한, 적어도 고문 별장에서 이루어질 말은 아니었다.
게이트에서 나온 직후 끌려온 두 사람에게도, 일 처리를 도맡고 있던 두 간부에게도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기에 경진이 목소리를 키웠다.
“미국? 갑자기 왜? 아니, 갑자기는 아닌데 간다는 건 들었는데… 그거 일주일 뒤 아니야?”
사막의 형벌이 경매품으로 나올 장이 열리기까진 아직 한참 남았다. 무어라 태클 걸기도 민망한 시기상조라 당황해하는 이에 사윤이 관리를 안 해 귀 아래까지 길게 내려온 제 머리카락을 문지르듯 비볐다. 검은 눈동자에 싸늘한 냉기가 서렸다.
“스콜피언이 국내까지 침투한 흔적이 있는데 협회장한테 말한 대로 움직이면 그게 등신이지. 안 그래도 인터뷰로 도발해 놨으니 이쪽 행보에 관심이 많을 거야. 일주일 뒤에 출발하면 준비할 시간을 너무 주는 거니 허를 찔러야 돼.”
“우리 팀 허도 찌른 것 같은데.”
“남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야 하지 않겠니.”
뻔뻔한 한마디에 경진이 머리를 헝클였다. 예산부터 계획까지 다 다시 잡아야 한다고 발광하던 그가 모든 것에 초연한 표정을 짓더니 몸을 늘어트렸다.
“나 퇴사할게.”
담백하고 애처로운 말을 사윤은 무시했다. 이어서 경진이 품에서 사직서를 꺼냈지만 건네지기도 전에 얼어붙어 열 수 없게 됐다. 벌써 아흔 번째 있는 일이었기에 옌은 익숙한 표정으로 구경했다. 이 광경을 처음 보는 건주와 재희만이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왜!”
“왜는 무슨 왜야. 너 얼마 전에 연봉 올려 줬잖아.”
“1년 치 연봉 반납하고 퇴사할게.”
“목숨까지 반납하고 싶은 거 아니면 남지 그래.”
“미친 새끼.”
그 간략한 단어는 갑작스러운 통보를 들은 네 남자의 마음을 요약하기 딱 적합한 단어였고, 불쌍한 밤쥐 간부 하나가 고문 별장 의자에 묶이기에도 적합한 말이었다.
명령이 떨어지자 옌이 녹발을 휘날리며 경진을 묶는 데 열중했다. 경진이 중간에 살이 씹혔다며 비명을 지르든 말든 즐거워하는 미친놈을 한심하게 보던 사윤은 주머니에서 작은 공병을 꺼내 밧줄 공작을 마친 옌에게 던졌다.
“오, 새로운 염료?”
단번에 물건의 정체를 알아본 옌이 즐거워하며 공병의 뚜껑을 땄다. 입구에 코를 가져다 댄 그가 숨을 깊게 들이켠다. 녹색의 헤어가 서서히 적발로 물들었다.
“색 예쁘네. 가면도 쓸까?”
머리카락을 슬쩍 들어 색깔을 확인한 옌이 신이 나 물었다. 사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사람 묻으러 가냐? 경매하러 가는 거지. 너 기자 만났을 때도 녹발이었잖아. 슬슬 색 바꿀 때 됐으니 준 거야. 가면은 나중에 써.”
“그거 아쉽게 됐네.”
대답하는 어투가 과장스럽고 연극 톤이라 뮤지컬을 보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몇 번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옌이 단도 하나를 꺼내 들어 묘기처럼 휘리릭 던지고 놀더니 별장을 나섰다.
“어디 가게?”
침투한 목소리는 사윤이 아니었다. 붙잡힌 경진이 자기만 두고 가지 말라며 배신자 보듯 옌을 응시하며 묻자 입꼬리를 올린 남자가 놀러 갔다 오겠다며 손을 흔들고 나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냉정한 이별이었다. 경진이 저거 미친놈이라며 사윤에게 이르듯 얘기했고 사윤은 순식간에 사라진 옌의 자리를 응시하다가 곡소리를 냈다.
어지간한 미친놈들을 모아 둔 게 밤쥐 길드긴 했지만 저건 감당 불가다.
원래 예술에 미친 또라이들이 제일 상대하기 힘든 법이었다.
“저건 언젠가 길드에서 쫓아내야 해.”
습관처럼 중얼거린 말에 경진이 묶인 채로도 열심히 혀를 놀렸다.
“쫓아내도 다시 돌아올걸? 자기 애들 다 끌고 돌아오겠지.”
쟤는 형님 너무 좋아하잖아.
진저리 난다는 듯 얘기한 이가 몸을 한 번 떨었다. 나는 쟤 취향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런 식의 약 올리는 말을 늘어놓는 이에 사윤의 시선이 가늘어질 때쯤이었다.
“저 사람이 형을 좋아해요?”
옌이 미친 짓을 할까 주의를 쏟느라 잠시 신경 쓰지 못했던 이의 목소리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경진이 합 입을 다물었고 사윤의 시선이 건주에게로 돌아갔다. 밥을 다 먹고 상처 회복도 마쳐 얼굴이 제법 봐 줄 만하게 된 이가 사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데굴, 옌이 나간 문으로 향했다가 다시 사윤을 본다. 어서 말해 달라는 눈빛에 사윤은 기시감을 느꼈다.
그가 이재희를 처음 보았을 때 지은 표정이 지금과 꽤 유사했다.
종식을 처음 봤을 때와도 마찬가지다.
참 일관적인 반응에 잠시 입을 달싹거리며 가설을 이어 붙인 사윤이 한 발 물러났다.
“야, 건주야. 쟤는 아니다.”
“……?”
“물론 취향이야 존중은 하겠는데 쟤는 너무 아니지 않니. 너 쟤 별명이 광대인 건 알고 좋아-.”
“지금 무슨 오해를 하는 거예요?”
한건주가 기가 막힌다는 듯 실소 섞인 목소리를 토했다.
“음?”
사윤이 목을 한 번 울렸고 그와 비슷한 타이밍에 이재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내가 퇴사 안 하고 이딴 꼴이나 보고 있어야 하냐고….”
경진이 괴롭다는 듯 중얼거리는 음성을 마지막으로 고문 별장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사윤의 당황스러운 눈동자와 건주의 어이없는 시선만 공중에서 마주칠 뿐이었다.
…우리 꺼낼까.
어색해진 상황을 수습할 방법으로 인벤토리에 보관된 것을 떠올린 사윤이 목을 한 번 매만졌다.
저거 또 쓸데없이 삐진 것 같은데 선물이라고 하면 좋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