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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11)화 (211/266)

제211화. 사막의 형벌 (1)

각종 커뮤니티에서 사윤이 여차하면 해외로 뜰 거라는 여론이 대두되어 협회가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을 때 모든 일의 주범인 사윤은 특수 제작된 우리를 인벤토리에 든든하게 챙겨 들고 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망 나간 두 사람을 포획하겠답시고 몇 주간 게이트 근처에 길드원들을 포진시켜 뒀더니 사람들의 눈이 너무 쏠렸다나 뭐라나. 아무튼 경진이 계속 핑계를 대길래 가까운 별장으로라도 옮겨 두라고 명령을 번복한 탓이었다.

그 결과 재희와 건주의 임시 거처는 고문 별장이 되었다. 옛 생각이 난다며 흥얼거린 사윤이 무거운 철문을 열었다. 고문 별장 지하로 내려가니 손이 뒤로 묶인 채 죄인처럼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두 사람과 그런 둘을 감시하고 있는 양아치 같은 길드원 수십 명이 시야에 들어왔다.

“형님!”

사윤이 들어오자 그들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니들이 무슨, 조폭이냐? 조폭이야?”

한 번 보면 쉽게 잊을 수 없을 장면이라 힐난한 사윤은 혀를 차며 그들을 물렸다. 썩 꺼지라는 말에 안 그래도 좁은 별장을 빠듯하게 채우고 있던 덩치들이 나간다. 이제 고문 별장에 남은 건 사윤과 묶인 두 사람, 그리고 얼결에 이 일의 책임자가 된 경진과 옌뿐이었다.

사윤은 준비된 의자에 앉아 묶인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윤 씨? 이재희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는 무시했다.

스킬 하나 각성해서 온다고 했지.

그들이 무슨 핑계를 대고 게이트에 들어가 무려 보름이 넘도록 안 나왔는지 기억해 낸 사윤이 천재의 눈을 사용했다. 한건주부터 훑어봤던 사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끼익거리며 사윤이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밀려났다.

“그.”

“그?”

혹시라도 형님이 또 사고를 쳐 아끼는 예쁜이를 죽이고 살려 내라 히스테리를 부릴까 노심초사하며 사윤의 반응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경진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림자 지배?

사윤은 하마터면 입 밖으로 뱉어 낼 뻔했던 남의 전용 스킬을 간신히 삼키며 기함했다.

스킬 하나 열고 오겠다는 게 설마 전용 스킬일 줄은 몰랐다. 그것도 L급 스킬 말이다.

L급 스킬을 한 달도 안 돼서 개방하고 온 거라면 얘기가 다른데.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괘씸한 게이지가 절반은 내려왔다. 놀라서 눈을 깜빡거리고 있자 시선을 받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사윤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얼굴은 왜 그래?”

눈 옆에서 턱까지. 한건주의 얼굴에 긴 자상이 나 있었다. 이제 보니 안색도 별로 좋지 않다. 입술이 퍼렇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게, 꼭 독에 당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익숙한 몰골에 눈을 가늘게 떴던 사윤은 한건주의 상태창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상태 이상: 중독’

시발.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상태 이상이 떠 있었다. 한건주가 보라색을 넘어 푸르게 변한 입술을 열었다.

“보다시피, 치료도 하기 전에 잡혀 와서요.”

다 죽어 가는 꼴이면서 목소리는 또 차분했다. 사윤이 홱 경진을 노려보았다. 써늘한 눈길을 받은 경진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라고 얘가 중독인 거 알았겠어? 애초에 상태가 뭐 어떻게 됐든 잡아 두라며?”

“그렇다고 애 꼴이 이 지랄 났는데 잡아 두니. 넌 어떻게 센스가 없어?”

“염병.”

“염병?”

“…여어어엄.”

경진이 딴청을 피우기 위해 말을 질질 끌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사윤은 말을 돌리려다 실패한 남자를 한심스럽게 쳐다보다가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건주에게 던졌다. 그러고 나서 아차 싶었다.

쟤 손 묶였는데.

한건주는 직접 포션을 복용할 상태가 아니었다.

“시발. 그러게 게이트는 왜 지들끼리 들어가서 다치고 지랄, 지랄….”

필드에서 한건주는 저만큼 다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이 같이 갔어 봐라. 얼굴에 저 상처가 나는 걸 허용했겠는가? 머리카락 한 올 안 다치고 나오게 해 줄 수 있었는데 왜 저들끼리 작당해 이미 수박인 얼굴 또 줄 긋고 나온단 말인가.

다시 보니 이재희의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한건주가 중독 상태에 흉터가 남을 만한 상처를 안고 나왔다면 이재희는 마력이 바닥나 피를 토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역소환을 겪은 듯했다.

그럼 그만큼 핀치에 몰렸다는 뜻인데.

대체 뭔 짓을 하다 왔냐는 눈빛을 던지니 이재희가 하하 웃었다. 하하는 얼어 죽을 하하라 짜증만 흘리고 있을 때 염치도 없이 죄인 하나가 입을 열었다.

“형.”

쓸데없이 처연한 목소리였다.

중독 상태가 심해진 건지 음성에 호흡이 섞여 있어 사윤의 눈이 가늘어졌다. 옆에 있는 A급 헌터인 경진만 건주가 중독으로 숨넘어갈까 안절부절못하며 사윤과 건주를 번갈아 보았다. 건주가 걱정되었다기보단 그가 숨넘어가면 저승길 동무가 될 제 목숨을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그걸 눈치챈 사윤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갈 때쯤 날아든 음성 하나가 그 시선을 묶어 놨다.

“저 아파요.”

“…허.”

뻔뻔한 한마디에 사윤이 헛숨을 터트렸다. 한건주는 기막히다는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혀를 놀렸다.

“독에 당한 것 같은데 극독인가 봐요. 상급 해독제를 먹긴 했는데 상태가 안 나아요.”

학교 다녀온 애새끼가 부모에게 미주알고주알 있었던 일을 보고하듯 게이트 안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이에 사윤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툭, 이마에 맺혀 있던 식은땀이 한건주의 턱을 타고 흘러내린다. 빌어먹을 새끼. 사윤은 속으로 욕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 죽일 건 아니지, 형님?”

경진이 지레 겁을 먹어 그리 얘기했을 때 사윤은 최고급 마나 포션을 그에게 던졌다.

“넌 이거나 쟤한테 먹여.”

이재희를 힐끗거리며 얘기하자 눈이 마주친 남자가 살짝 웃어 보였다.

웃기는.

뭘 잘했다고 웃는 건지.

속으로 잔뜩 욕을 씹으며 바닥에 떨어졌던 포션을 주워 들고 한건주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꼴이 더 가관이다.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목까지 적시고 있었기에 혀를 찬 사윤이 포션을 열었다. 찢긴 상처에 다짜고짜 포션을 쏟아붓자 건주가 신음음 흘리며 몸을 물렸다.

“엄살 부리지 마.”

사윤은 가볍게 타박하고 상처가 회복되는 걸 지켜본 다음 해독제를 꺼냈다. 엄지로 아랫입술을 꾹 누르자 순순히 입을 벌린다. 그 안으로 해독제를 밀어 넣던 사윤은 건주를 훑어보았다. 새카만 흑안이 저를 똑바로 직시한다. 이번에는 엄살을 피울 생각이 없는 건지 해독제를 목구멍으로 꿀떡 넘기면서도 시선을 허튼 데로 흘리지 않는 이에 사윤은 기묘한 충만감을 느꼈다.

뭐가 채워진 건지 모르겠는데 배가 불렀다. 기이한 감각이었다.

“화났어요?”

회복 정도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으니 엄지로 짚고 있던 입술이 움직였다. 손끝에 점막이 닿는다. 점막은 사람의 신체 부위 중 가장 취약한 부위였다. 그걸 내주고도 얌전히 있는 이에 사윤은 눈을 한 번 끔뻑였다. 뒤늦게 남자의 말이 떠올라 표정이 구겨졌다.

“그럼 화가-.”

“형한테 잘 보이려고 그랬어요.”

짓씹듯 뱉어 낸 말을 자르고 들린 음성에 사윤이 멈칫거렸다. 한건주는 기회를 놓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틈을 노린 그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형이 저더러 네가 뭔데 간섭하냐고 그랬잖아요.”

“…….”

“형은 능력 있는 사람 좋아하니까 스킬 개방해서 오면 좋아할 줄 알았어요.”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어색한 침묵에 젖은 고문 별장을 울렸다. 경진이 기막혀 입을 가리고 옌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사윤은 여전히 자신만 담아내고 있는 흑안을 보다가 해독제 병이 비었다는 걸 자각했다. 한건주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창백했던 인상이 도로 회복되어 이제 슬슬 우리에 가둘 만큼 상태가 좋아졌다는 판단이 들 때쯤 한건주가 툭, 하고 사윤에게 머리를 기대 왔다.

“배고파요. 거기서 밥 하나도 못 먹어서.”

“…그래서 뭐.”

“저 사람은 형처럼 밥 안 줘요. 같이 굶었어요.”

한건주가 볼멘소리하듯 이재희를 불만스럽게 훑었다가 사윤을 빤히 보았다. 보름도 넘게 게이트에 처박혀 있다 상처투성이로 나와선 밥 달라고 하는 미친놈을 어이없게 쳐다보던 사윤은 제가 대답하지 않아 눈을 가늘게 좁히는 이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화났어요?”

그건 아주 묘한 효력을 지닌 물음이었다.

여기다 대고 화났다고 얘기하면 자신이 쪼잔한 사람이 된 것 같고 그를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다고 이실직고하는 것 같아 지는 기분이 들어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화가 나지 않았다고 하려니 노발대발하며 날뛸 수가 없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행동.

지금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이성적인 행동이 뭐가 있는지 생각하던 사윤은 조금 전 배고프다는 건주의 말을 떠올리고 욕을 지껄였다.

“비열하게 굴 줄도 알고.”

작게 흘러나온 말에 건주가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사윤의 손에 반쯤 기댄 채였다.

“아양 부리는 거라고 해 줘요.”

잘못한 건 아는 모양인지 아주 저자세다. 입에 발린 아첨에 제가 여우 새끼를 들였다며 비탄한 사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경진이 따라왔다.

“그…, 가두게?”

드디어 올 게 왔다 싶어 긴장한 채 입을 연 이에 사윤은 쓰레기 보듯 경진을 바라보았다.

“넌 애가 상처투성이로 돌아와서 보름간 굶었다고 하는데 가두고 싶냐?”

“아니 시벌….”

“시벌?”

“…….”

사나운 반문에 경진이 입을 다물었다. 대신 잔뜩 불손한 눈빛을 쏘아 보냈지만 걸음을 빨리해 경진을 지나쳐 버린 사윤은 음식을 가져오기 위해 별장을 나섰다. 다른 때 같았으면 부하를 시켰을 텐데 이번에는 그런 생각도 못 하고 직접 나선다.

그래서 사윤은 보지 못했다. 한건주가 이재희에게 거보라는 듯 웃어 보이고 이재희가 한숨 돌렸다는 듯 길게 숨을 토하며 안도하는 장면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옌만 깔깔거리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우리 형님도 참 비슷한 사람한테 저당 잡혔지.”

역시 사람은 끼리끼리라는 게 틀린 말이 아닌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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