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08)화 (208/266)

제208화. 꼬리잡기 (4)

-어이구. 인상 그렇게 쓰면 표정 구겨진다?

사윤의 표정이 썩어 문드러지기 무섭게 가벼운 핀잔이 날아왔다. 귀신같은 타이밍이라 홱 저도 모르게 길드 천장과 벽을 살핀 사윤이 의심스러운 눈을 했다.

“뭐야. 내 건물에 CCTV라도 달아 놨어?”

-척하면 착이지. 내가 널 한두 해 봤니.

핸드폰 너머의 미정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어찌나 기분 좋아 보이던지, 누가 보면 그에게 경사가 생긴 줄 알 터다.

나한테 일이 생긴 게 경사인가 보지?

안 그래도 저조했던 기분이 두 배로 바닥을 기었다. 핸드폰을 쥔 손에 빠악 힘이 들어가자 종식이 간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손수건을 입에 물며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에 힘을 뺀 사윤이 휴게실을 찾았다. 안에 들어가 있던 길드원을 눈빛으로 내쫓은 뒤 넓은 소파를 혼자 차지했다. 뒤따라 온 종식이 시종이라도 되듯 얇은 담요를 덮어 주고 차를 내렸다.

“형님, 이후 인터뷰 요청은….”

“전부 거절해. 나한테 올라오는 보고는 종식이 네가 먼저 확인했다가 보관하고.”

미정과 통화할 시간 동안은 전화를 받으며 놀겠다는 선언이다. 그 말뜻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는 종식이 지금 올라오는 보고가 몇 개인데, 하고 억울한 듯 중얼거리다가 따가운 눈총을 받고 물러났다. 사윤은 소파 팔걸이 위로 두 다리를 교차해 올리며 미정을 상대했다.

“그 얘긴 또 어디서 들었어?”

-무슨 얘기. 너 한건주한테 바람맞았단 얘기?

“말을 해도 꼭….”

30대도 아니고 40대다. 그 나이를 먹어 놓고도 채신머리없이 구는 이를 타박하자 젊게 살면 좋은 거라며 반박한 미정이 궁금했던 한건주의 얘기를 꺼냈다.

-정보상들 사이에서 네가 예쁜이 위치랑 정보 수소문하고 다닌다는 얘기 돌길래 혹시나 싶어 물어봤지. 암시장이긴 해도 나도 정보상이잖아?

흥얼거리듯 말한 미정이 찔러보면 반응이 재밌을 것 같은 정보라서 건드려 봤다며 이실직고했다. 이건 뭐 화도 못 내게 맑은 목소리였다.

-그래서, 정말로 바람맞았어? 웬일이래 걔는? 너한테 지극정성일 것처럼 굴더니 아델리아의 무덤 나온 지 뭐 얼마나 됐다고 그렇게 홀라당 게이트 들어가 안 나온대? 네가 괴롭혔어?

“괴롭혔겠어?”

오히려 한건주가 저를 괴롭혔다. 억울해서 죽을 맛이라 혀를 차자 스피커로 미정의 흥미로운 음성이 샜다.

-걔가 아델리아의 무덤에서 쓰러진 너 업고 나왔을 때 어땠는지 알아?

“…어땠는데.”

-어머, 몰라? 그럼 맨입에는 못 알려 주는데. 얘, 정보가 공짜니.

“…….”

대체 제 심정을 달래 주려 전화한 건지 약 올리려 전화한 건지 모르겠다. 행동을 보니 후자 같아 잠시 침묵한 사윤이 머리카락을 몇 번 손끝으로 비빈 다음 밤쥐 간부들이 들었다면 소름이 돋을 만한 목소리를 흘렸다.

나긋하고 친절한, 인터뷰용 목소리를.

“누나 요즘 암시장이 잘 돌아가나 봐. 누나네 길드 상품 유통 경로에도 별 탈 없고, 경매장도 테러 없는 곳으로 유명해서 잘 팔리고. 하는 일마다 잘 풀려서 기분이 좋은 것 같은데.”

-너 지금 누나 협박하니?

미정이 황당해했다. 사윤은 화상 통화를 하는 것도 아닌데 눈을 휘어 접어 웃었다.

“협박은. 누나 일이 다 잘되고 있으니 부럽다고 말하는 거지.”

목소리가 간드러지는 게 어디로 보나 협박이었다. 그 태연자약한 대답에 애가 순진한 맛을 잃었다고 불만을 표한 미정이 아델리아의 무덤에서 나온 직후 한건주의 반응을 말해 주었다. 그 내용이 썩 마음에 들어 사윤은 돌아오면 1년 동안 가둬 놓을 생각이었던 건주를 반년만 가둬 두기로 마음먹었다. 선심도 써서 제 허락하에 목줄 차고 나갈 수 있도록 우리에 조치도 취할 생각이었다.

기분이 좋아졌음을 여실히 나타내는 콧노래에 미정이 혀를 찼다.

-얘가 뭐가 좋다고 걔는. …아닌가. 걔가 뭐가 좋다고 너는인가.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긴가민가해하는 미정에 사윤이 그 말속에 있는 오류를 정정했다.

“걔 나 안 좋아해.”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린 건 미정이었다.

-걔가 널 안 좋아한다고?

“뭐, 존경은 하겠지?”

퀘스트가 바뀐 이후로 한건주의 감정이 뜨지 않아서 자세히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과거에 그가 제게 경외심이나 존경심 따위를 품었던 건 확실해 자못 뿌듯해져 얘기하자 한 번 더 웃음을 흘린 미정이 청춘이구나, 따위를 중얼거렸다. 저리 말하니 사람이 새삼 옛날 사람 같았다. 솔직한 감상을 전하자 버럭! 화가 돌아왔다.

-넌 참 입이 문제야. 그래서 너는 걔 안 좋아해?

말끝에 늘어진 감정은 어째서인지 흥미와 기대 따위였다. 무얼 바라고 물은 건지 모르겠어 콧잔등을 찡긋거렸다가 한쪽 눈을 찌푸린 사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소유품에 호오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있나.”

-…….

담백한 대답에는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순간적으로 전화가 끊긴 줄 알았던 사윤은 핸드폰 화면이 여전히 통화 중임을 확인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왜 말이 없냐고 묻자 됐다고 대답한 미정이 한참 만에 전화한 용건을 꺼내 들었다. 안 그래도 바쁜 그가 별다른 이유 없이 저 하나 놀리겠다고 전화를 걸진 않았을 건데 역시나다.

알짜배기 정보를 기다리고 있던 사윤이 발끝을 굽혔다 펴며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네가 알아봐 달라고 했던 거 정보 들어와서 전화했어. 대체 협회장을 어떻게 꼬드긴 건지 모르겠는데 그 엉덩이 무거운 놈이 직접 움직여 에이든을 설득했더라고? 에이든이 사막의 형벌을 경매품으로 내놨어. 취소 의사는 없어 보이고. 무슨 거래를 했는지는 현재 확인해 보는 중인데 새는 정보가 없네. 네가 협회장 만나 보는 게 빠를 거야. 경매 날짜는 3주 뒤인데 초대장 줘?

당연한 말을 하고 있다.

사윤은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인 협회장에 배부른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제비 측 주소를 불렀다.

-밤쥐가 아니고 제비네? 사윤으로 활동하려고?

미정이 의아한 목소리를 내었다.

권사윤도, 밤쥐의 수장도 아닌 사윤.

그건 사윤이 노아로서 활동하기 위한 네임이었다. 직전에 인터뷰에서도 기사를 낼 땐 성씨를 붙이지 않은 사윤으로만 기재해 달라고 부탁해 놨던 사윤이 인터뷰 내용을 떠올리며 허밍을 흘렸다.

불행 경보나 다를 바 없는 허밍음에 미정이 의문을 품었을 때 발을 까딱거리는 걸 멈춘 사윤이 입을 열었다.

“누나 내 컨셉이 뭔지 알아?”

-컨셉?

“노아로 활동하는 사윤 컨셉.”

-신비주의, 뭐 그런 거 한다고 안 했니?

“신비주의긴 신비주의인데 앞에 단어 하나 붙어야지.”

한국 협회의 겸손한 미친놈, 예쁜 또라이 등.

자신이 앞으로 노아로 활동하면서 보일 행보에 사람들이 붙일 별명이 무엇일지 빅 데이터 분석 수준으로 추론해 본 사윤이 웃었다. 제법 마음에 드는 별명이었다.

“제비의 사윤으로 활동한다고 해서 내가 얌전하게 지낼 거란 보장은 없지. 초대장 보내 놔.”

3주 뒤 열릴 경매장은 사윤의 화려한 데뷔가 될 것이다.

들떠서 흘린 말에 사윤이 칠 사고를 직감한 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경매장 기물 파손만 말아 달라는 부탁에 알겠다고 대답하니 통화가 끝난다. 사윤은 조용해진 방에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사막의 형벌이 나왔으니 놈들도 움직이겠지.”

이쪽에서 스콜피언의 행적을 빠르게 쫓고 있으나 놈들이 다시 모래 속으로 숨을 준비를 하고 있어 단순 추적만으론 잡기가 쉽지 않았다. 미끼를 던져 놈들을 공개된 장소로 끌어내야 했기에 사막의 형벌의 현 소유주인 에이든과 절친한 관계인 협회장에게 설득을 부탁했던 사윤이 입꼬리를 올렸다.

사막의 형벌이 전갈 자리 신의 유물인 만큼 스콜피언 놈들은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함정이란 걸 알고도 나오려고 하겠지.”

성대한 경매가 될 거라 경진에게 해당 소식을 전한 사윤은 출처가 밝혀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사막의 형벌이 경매품으로 나올 거란 정보를 퍼트리라 알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혹시나 싶어 한 번 더 한건주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물었다. 돌아온 ‘ㅗ’이란 답에 핸드폰 화면을 끈 사윤은 길드 건물을 나섰다.

차를 끌고 밤쥐로 향해 방으로 올라가자 전에는 없던 문 하나가 사윤을 반겼다. 열고 들어가니 어제 갓 도착한 따끈따끈한 신상품이 텅 빈 방을 꾸미고 있다. 인테리어를 할 필요 없이, 하나만 둬도 방이 꽉 차는 물건.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든 최고급 우리다.

극독이 발려진 못만 육안으로 대충 헤아렸을 때 이백 개다. 과연 S급도 침을 꼴깍 삼킬 만한 위압감이라 만족한 사윤이 철장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침음성을 흘렸다.

“사람을 가둔 채로도 인벤토리에 들어가려나.”

아이템을 만들 수 있는 스킬을 각성해 공방을 차린 이들이 장인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제작한 모든 물건은 아이템으로 분류돼 인벤토리 보관이 가능한데 사람을 집어넣고도 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가 오자마자 테스트를 위해 제 인벤토리에 넣어 봤던 사윤이 고민하며 턱을 매만졌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릴 경매에 한건주를 두고 갈 순 없었다. 차라리 그들이 게이트에 천년만년 박혀 있으면 모를까 사윤이 아는 한건주는 스킬 하나를 개방하는 데 석 달까지 걸릴 이가 아니었다.

늦어도 2주다.

그 안에는 게이트에서 나올 거라 경매 전에 나오리란 건 거의 확정된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한건주를 우리에 넣고 데리고 가는 수밖에 없는데 운송 수단이 참 고민이었다.

“사람 하나를 집어넣고 확인해 봐야 하나.”

안 잡힌 성범죄자 한 명 찾아낸 다음 우리에 가둬 넣고 확인해 보기로 한 사윤이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날 저녁, 사윤의 인터뷰가 뉴스 기사, 언론 매체, 각종 커뮤니티를 타고 퍼졌다.

협회장 민철이 뒷목 잡고 쓰러질 만한 내용의 인터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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