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05)화 (205/266)

제205화. 꼬리잡기 (1)

가을 특유의 써늘한 바람과 저물어 가는 꽃의 향기가 느긋하게 풍기는 건조한 계절. 밤쥐 길드의 대회의실에는 간부 넷과 길드원 넷이 묘기를 부리고 있었다. 그들의 길드장인 사윤의 ‘대가리 박기는 너무 식상하다 한 손으로 물구나무를 서서 위에 사람 한 명 정도는 얹어야 범죄 길드의 면이 사지 않겠니’라는 의견이 반영된 기합 탓이다.

때문에 감히 상사의 발 위에 올라가 곡예와도 같은 중심 잡기를 하게 된 죄 없는 길드원들이 덜덜 떨었다. 물론 그보다 더 떨고 있는 건 한 손으로 중력에 저항한 채 성인 남자 한 명의 무게마저 견디고 있는 간부들이었다.

“아, 또 왜!”

경진이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 두 시간째 저러고 있어 피가 꽤 쏠렸는지 시뻘게진 얼굴과 목에 핏줄이 선명했다. 서류를 넘기고 있던 사윤이 회의실 벽 한쪽에 도열한 간부들을 바라보았다.

이재희랑 한건주를 멋대로 내보낸 간부 넷은 괘씸했는데 그 위에 죄 없는 길드원들의 표정은 꽤 안쓰러웠다. 자기들은 여기서 내보내 주면 안 되겠냐는 눈빛이 애처로울 지경이었으나 사윤은 무시했다.

원래 자연재해에 휩쓸리는 건 선택 사항이 아닌 법이다.

“니들은 한건주랑 이재희 돌아올 때까지 그러고 있어라. 이참에 체력 기르고 좋네.”

등급도 올려 보자고, 어?

으름장을 놓듯 이르는 이의 표정엔 뒤끝이 가득했다. 경진은 자기가 자고 있어 연락을 못 받아 놓고 집합을 세운 미친놈을 세상에 둘도 없을 쓰레기 보듯 바라보았다. 아니, 정정한다. 사윤은 원래 세상에 둘도 없는 미친놈이었으므로 무언가 조금 더 강력한 표현이 필요했다.

미친 재앙이라고 하자.

저 사람이 살아서 돌아다니는 게 재앙이었다.

역시 일찍 퇴사해야 했는데 그놈의 돈이 뭐라고.

평소에는 그나마 멀쩡한…, 그나마 덜 미친 사람이 한건주만 엮이면 아주 돌변한다. 경진이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형님, 우리라고 그 사람들이 일주일이나 안 돌아올 걸 예상하고 보내 줬겠어? 그 새끼들이 망할 놈의 게이트에서 일주일이나 있을 줄 알고 보내 줬겠냐고!”

이재희와 한건주가 몸 좀 풀고 오겠다며 게이트에 들어간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다. 아무리 S급 게이트라고 해도 S급 각성자 둘이 들어갔는데 이 클리어 속도는 기괴했다. 작정하고 게이트에서 시간을 끌고 있는 게 아닌 이상 나올 수 없는 공략 시간이었다.

물론 아주 가끔 사윤도 이렇게 한 게이트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올 때가 있었다. 새로운 스킬을 얻기 위한 시도를 할 때 그리했으니 건주와 재희가 그걸 목표로 시간을 끌고 있는 거라면 이해는 갔다. 그러나 문제는 하필이면 사윤을 빼 두고 갔다는 거였다.

군대 간 애인 꽃신 신고 기다리는 여인이 된 것도 아니고 사윤은 일주일째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는 이들을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림’이란 개념과 거리가 먼 그에게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처음 하루 동안은 길길이 날뛰었다. 이틀 차엔 길드 내 물건을 전부 부숴 종식을 울렸고 3일 차엔 화를 풀고 오겠다며 게이트에 이틀 있다 나오더니 대망의 일주일이 지나자 마음이 평안해진 건지 한결 여유로운 표정으로 길드원들을 굴리고 있었다. 덕분에 폭군이 된 사윤의 아래에 놓인 길드원들은 죽을 맛이었다.

대체 한건주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억울해하던 경진은 이내 후회했다. 사윤이 건주를 각별히 여기고 있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는데 방심한 자신이 안일했다. 이재희가 오고 나서 사윤의 날 선 분위기가 한껏 풀려 있어서, 거기에 한건주가 되돌아오고 나서 시일이 꽤 지나니 사윤이 꽤 편안해 보여 자신도 같이 풀려 버린 게 실책이다. 이런 분위기일수록 사윤의 신경 안정제인 두 사람을 잘 잡아 두고 있어야 했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경진이 어윽거리며 흐느낄 때, 한쪽 팔이 바르르 떨고 있음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있는 옌이 감기듯 떠 있는 눈을 죽 찢어 웃었다.

“길드장님, 해야 할 일 있지 않아?”

떠보는 듯한 물음에 경진과 찬희, 종식이 움찔거렸다. 말 한마디 잘못 해서 옌 하나 죽는 거면 모를까 연대 책임이라도 받게 되면 그것만큼 최악의 결과가 없었다.

사윤이 서류를 내려놓고 옌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꿀꺽 침을 삼켰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대하는 것만 같은 긴장감이 흐를 때 침음을 뱉은 사윤이 두 발을 책상 위에 얹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할 때가 됐긴 했지.”

화악!

얌전한 반응에 간부들의 얼굴 위로 화색이 돌았다. 사윤은 빙글, 의자를 돌려 책장에 꽂혀 있던 서류 파일첩을 꺼냈다. 일전에 경진에게 부탁했던 스콜피언 관련 조사 자료였다.

조금이라도 연관되는 건 다 긁어 오라고 시켜 놨더니 파일첩의 두께가 무슨 성경만 했다. 여러 개의 파일첩이 하나로 묶여 제법 묵직한 그것을 확인한 사윤이 입을 열었다.

“위에는 내려와.”

기다렸던 명령이 떨어지자 무고한 길드원들이 재빠르게 간부들 위에서 내려왔다. 하지 않아도 되는 사죄를 하고 있는 그들을 손을 저어 물린 사윤이 파일첩을 묶고 있는 줄을 끊어 자신의 앞에서 재롱을 부리듯 머리를 좌우로 움직이고 있는 까마귀에게 내주었다.

검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뜻을 알아차린 까마귀가 파일첩을 하나씩 물어다 간부들의 앞으로 옮겼다.

“조사랑 주요 인물 확보 일주일 안에 끝낼 수 있는 놈만 내려와.”

파일첩 하나당 100페이지가 넘는다. 말도 안 되는 기간이었음에도 밤쥐의 네 간부는 기다렸다는 듯 자세를 풀고 내려와 제 몫들로 분류된 서류 파일을 들었다. 아고고고. 그들의 입에서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 힘들지도 않았으면서 과장하기는.

S급, A+급들인데 물구나무 몇 시간 섰다고 곡소리가 날 턱이 있나.

팔 좀 쑤시고 말 수준일 텐데 엄살 하나는 세계 1위였다.

혀를 차고 있으니 팔을 돌려 원을 그리던 경진이 뚝뚝 목을 꺾고 파일을 흔들었다.

“이딴 거 좀 그만하면 안 되나.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는 밤쥐가 이런 악습이 웬 말이야. 안 그래, 형님?”

“넌 파일 하나 추가.”

너스레를 떨던 경진이 과중한 업무를 전달받고 입을 꾹 다물었다. 나머지 세 사람은 그 모습을 보며 알아서 침묵했다. 사윤은 이틀 전 종식이 새로 사다 준 폰을 쳐다보았다. 손가락을 뻗어 툭툭 건드리자 화면이 켜진다. 기존에 쌓인 알람 외 새로운 알림은 없었다.

“한건주는.”

지난 일주일간 매일같이 했던 질문을 또다시 반복하자 진저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은 경진이 손목에 걸린 스마트워치를 눌렀다가 미간을 좁혔다.

“아직 안 나온 것 같은데.”

“그 주변에 애들은 깔아 놨고?”

“게이트 클리어한 뒤 나오자마자 제압할 수 있게 해 뒀어.”

“S급 둘이라 어려울 텐데.”

“움직일 수 있는 애들은 다 보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경진이 S급 둘을 한 번에 납치해 본 적은 처음이라 정확한 계산은 못 하겠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창문 쪽을 응시하다가 눈을 감았다.

“우리 하나 살 준비 해 둬.”

“어?”

“아니, 사는 거로는 부족하지. 지금 일정 비는 장인이 누구 있냐?”

갑작스러운 물음에 경진이 영문을 몰라 당황하면서도 알고 있는 장인 몇 명의 이름을 댔다. 사윤이 탁탁,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최상급 마정석 수십 개를 사용해도 좋으니 확실한 순간이동 방해 장치가 설치된 철장 하나 주문 넣어. 독은 제공해 줄 테니까 극독 바른 침 수백 개 고정시켜 S급도 함부로 탈출할 수 없는 철장으로 만들라고 전하고.”

최고급 재료로 최대한 빠르게.

단조로운 목소리와 달리 담긴 말은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살벌했다. 아이고야.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낸 경진이 지금쯤 게이트에 있을 두 남자를 떠올렸다.

둘 중 누가 갇힐지 아직 확신할 순 없었지만, 누가 갇히든 천문학적인 금액이 든 특수 우리를 빠져나가기 불가능할 거란 점은 분명해 삼가 죄인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그래도 우리 형님이 원래 저렇게까지 미친 사람은 아니었는데.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더니, 시종일관 싱글벙글 느긋하게 웃는 미친놈과 예쁜 미친놈 하나가 사윤 곁에 붙더니 안 그래도 또라이가 상또라이가 돼 버렸다.

그러게 사윤을 제대로 설득한 뒤 게이트로 떠나거나 아예 사윤을 데리고 가거나 했으면 좋았을 것을.

사윤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가진 것을 향한 통제욕이 강하다는 것쯤은 밤쥐 길드원이라면 누구나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길드원 배신 건을 직접 겪은 종식이 말해 주길, 처음에는 배신을 염두에 두고 강하게 통제했던 게 지금에 이르러선 아예 사람의 특성이 돼 버린 것 같다 했다. 그런 사람이었는데 아끼던 이 두 명이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굴고 있었으니 일주일이면 슬슬 한계를 보일 만도 하다.

심지어 한건주는 이번이 처음도 아니지 않는가.

어느 분야나 초범이면 어느 정도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었으나 한건주는 이미 지은 죄가 많았다. 이번에야말로 그 얼굴만 예쁜 놈을 말려 죽이려는구나 싶어 알겠다고 답한 경진이 핸드폰을 꺼내 장인에게 연락을 보냈다.

“하.”

우리 제작 주문을 넣고 나서야 요 며칠간 잔물결이 치듯 어수선했던 마음이 정돈되는 걸 느낀 사윤이 우웅, 하고 울리는 폰에 시선을 내렸다.

[제발 연락 좀 받아 주게! 제발 좀! 지금 자네로 난리가 났다고 몇 번이나 얘기하나!]

사윤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매시간 꾸준히 연락해 오던 협회장이 체면도 위엄도 잃고 애원하는 수준으로 보낸 문자가 화면에 떴다. 건주와 재희가 돌아오기 전까진 직접 움직일 생각이 없어 수백 통이나 되는 연락을 무시로 일관해 오던 사윤은 날짜를 확인하고 슬슬 움직일 때가 됐다 싶어 화면을 밀었다.

‘사윤 씨는 사윤 씨가 해야 될 일 하세요. 신경 쓰이는 일 있으셨잖아요.’

귀신같은 말이 떠올라 두 눈썹 사이를 모았다가 협회장이 보낸 문자의 자세한 내용을 확인했다. 협회에 방문해서 기자 회견 한 번 하자는 말과 함께 링크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심드렁하게 주소를 누르자 링크 속 사이트가 화면을 채웠다. 사윤도 알고 있는 유명한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였다.

[제목: 그래서 노아 소속 걔랑 가면남이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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