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4화. 특훈 (6)
“해석 방법이 흥미롭네요. 희망이 폭력이라고 생각해요?”
“죽고 싶은 사람한테는 삶이 폭력일 수도 있으니까요. …비슷한 느낌을 겪어 보긴 해서 알아요.”
낮게 늘어진 말끝에 연민이 매달렸다.
한건주에게 탑에서의 시간은 끔찍하기 짝이 없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헌터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자살은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수단이었으나 탑에서는 그 단어가 머릿속에 깃들어 줄곧 떠나지 않았다. 낙심을 못 이겨 자행한 적도 있었다. 결과적으론 탑을 탈출하며 사라진 감정이었으나 기억까지 소멸된 건 아니다.
그러니 얼추 공감할 수 있었다. 사윤의 입장을 이해해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감히 희망이 다정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에게 탑이 죽음을 갈망하게 만드는 공간이었다면 사윤에겐 삶을 이루는 그 모든 것이 탑과 같을 거였으므로. 그걸 생각해 봤을 때 살라고 하는 말은 꽤 폭력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전 형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주는 희망이 폭력이라고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살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다양한 감정을 느끼면서, 언제 어디로 길을 틀지 모르는 생애에 긴장감과 흥미를 느끼면서, 설령 살아 봤자 별 의미 없더라, 하는 탄식적인 결과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살았으면 좋겠다.
왜냐면.
“…제가 보기엔 그 사람 딱히 행복하게 산 것 같지 않아서요.”
한 번 태어나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그대로 죽기엔 너무 아쉽지 않은가.
“전 이렇게 생각해요. 삶에서 일어난 문제는 반드시 삶에 해답이 있다고요. 형이 죽으려고 하는 건, 닥친 문제에 대한 도피밖에 되지 않아요. 물론 그게 아주 달콤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탑에서 그 고통을 겪지 않고 자살만으로 죽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편했을까?
“문제가 해결된 후 펼쳐질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거죠. 어쩌면 그게, 죽음으로 도망치는 것보다 더 달콤할 수 있어요.”
죽음은 단순히 도망치는 것으로 끝나지만 문제를 해결하고 눈을 가렸던 걸 거둬 냈을 때는 꽤 많은 것이 보일 것이다. 더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될 거고 죽음보다 소중한 게 생길지도 모른다. 특별한 목표가 생긴다거나, 무엇 때문에 더 살아 보고자 느낄 수도 있다.
그 무한한 가능성을 전부 포기하고 사는 게 삶이 고역인 이들에게 구원일 순 있을지언정 최선의 선택지는 아니라는 게 한건주가 탑을 겪고 나와 사윤의 곁에 있으면서 그를 지켜보며 깨달은 지론이었다.
한건주가 보기엔 사윤은 죽음 외에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기 충분한 사람이었고 자신이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그리하여 종국엔….
생각을 이어 가던 건주가 어느 순간부터 탁탁, 무릎 위를 가볍게 두드리고 있던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추고 굳었다. 얼빠진 사람처럼 멍한 낯빛에 그를 응시하고 있던 재희의 입에서 허밍이 흘러나왔다.
“사윤 씨를 좋아해요?”
그 물음에 눈동자를 왼쪽으로 기울여 생각에 잠겼다가 발끝을 까딱거린 건주가 웃었다.
“아니요.”
“음?”
“그런 감정과는 느낌이 달라요. 저는 그냥….”
죽지 않는 이상 살아가는 과정에서 느끼게 되는 모든 영속적인 감정들. 그걸 사윤이 다 견뎌 가며 살았으면 했다. 어떤 상황이든, 미래에 놓인 것이 희망이든 절망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 감당하며 살아 줬으면 했다.
자신을 이유로 삼으며.
그렇게 해서 자신은 추억이나 흉터, 그 어떠한 형태로라도 그에게 제 흔적을 남길 생각이었다.
그건 자신이 타인에게 최선을 다해 선의와 노력을 베풀었다는 훈장 같은 명패일 수도 있었고, 제 삶에 그가 들어온 만큼 저 역시 그에게 등가의 족적을 새기고 싶다는 저열한 심정일 수도 있었으며, 삶에 들어온 자극을 놓치지 않으려는 졸렬한 발버둥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건 좋아한다든가, 동정이라든가, 연민 따위의 감정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그냥….
“저는 그냥, 이기적인 거죠.”
종합해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이 그것뿐이라 입가에 그려진 호선이 자조를 품었다. 사윤에게 물었던 제가 이기적이냐는 물음에 혼자서 답을 내린 순간이었다.
잠시 흐르는 침묵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 차분한 시선을 건주에게 두었던 재희가 설핏 웃었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한 것 같네요. 그래서 앞으로 어쩔 생각입니까? 사윤 씨를 어떤 식으로 살릴 생각인지 궁금한데요.”
계획을 물어보는 말에 건주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우선 특훈 좀 해 보려고요.”
“특훈?”
“아무래도 형이 저를 의지하게 만들려면 지금 위치로는 안 되겠더라고요.”
형이 강한 사람을 원한다는데 뭐, 해 봐야죠.
무릎을 양손으로 꾹 눌러서 몸을 일으킨 건주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재희를 바라보았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뭔가 불길하다고 여겨졌을 때 부스러기 하나 없이 매끈한 입술이 열린다.
“도와주실 거죠?”
우리, 같은 목표를 갖고 있다면서요.
혼자서 잔뜩 경계하며 사람을 몰아넣을 때는 언제고 이제는 또 순한 양처럼 웃는다. 저렇게 부드럽게 웃는데도 속셈이 있어 보이는 게 참 쉽지 않은데 인상도 그렇고 성격도 그래서 사람이 무척 교활해 보였다. 조금 황당한 눈으로 건주를 쳐다보던 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어떤 식으로 특훈을 진행할 건지 얘기를 들은 그는 뼛속부터 머리가 지잉, 하고 징 치듯 울리는 걸 느끼며 몇 번 하하, 웃었다.
고집 있고 독한 건 둘째 치고 무모했다. 찾아 달라는 게이트가 죄 위험했으며, 들어가려는 모든 게이트 난이도가 평균 S급이었다. 왜 그가 사윤의 조력자인지 여실히 깨닫게 되는 순간에 그럼 부탁한다며 등을 보이고 나가는 건주의 흔적을 좇던 재희가 고개를 젖혔다. 뒤통수가 의자에 닿으며 눈이 감긴다.
정말이지 인연이 맞닿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저 정도는 돼야 운명으로 이렇게까지 엮일 수 있나 보지.”
홀로 남은 방에서 작게 중얼거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꼬리를 옅게 올렸다.
“너랑 나도 저랬을까, 연아.”
강한 힘의 작용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인연을 보다 보니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리운 이름을 중얼거리자 구석에서 낮잠을 청하고 있던 라이가 다가와 컹! 하고 짖었다. 천연덕스러운 소환수를 느릿하게 쓰다듬던 재희가 바닥에 그려진 남은 소환진에도 제 힘을 불어넣었다.
주로 의지하는 늑대와 구미호 소환수가 나타나 제게로 달려든다. 세 마리 털 뭉치에게 둘러싸인 재희의 입에서 편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앞으로 조금만 더 하면 되었다.
제게 남겨진 일만 끝내고, 연이 제게 부탁한 일만 끝내고 나면 기다리던 평온으로 아무런 죄책감 없이 향할 수 있으리라.
그곳에서 다시 만날 연인을 떠올린 재희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 * *
“시발, 저 새끼가 또….”
밤이 물러나고 햇빛이 강렬하게 비추는 방 안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겹겹이 쌓였다. 숨이 막힌 듯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가 다시 펴길 반복하던 사윤은 별안간 허억,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한건주!”
비명과도 같은 외침은 이제 옵션이었다.
두 눈을 크게 뜨며 이불을 붙잡았다가 조금 뒤 상황 파악을 위해 눈을 끔뻑인다. 서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워 주위를 둘러본 사윤은 뒤늦게야 제가 본 모든 것이 꿈이며 이곳은 밤쥐 길드 내 건주 방이라는 걸 깨달았다. 입술 사이로 옅은 한숨이 탄식처럼 흘러나왔다.
“하.”
실소를 토하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사윤이 눈을 흉흉히 빛냈다.
개꿈도 이런 개꿈이 없다.
한건주로 인해 제가 받은 스트레스가 어지간했던 건지 이젠 꿈에서도 그가 나오고 있었다. 나올 거면 좀 예쁘게 나오든가 내용도 거지 같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남자가 괴상한 퀘스트를 수락하고 제 발로 죽으러 가는 걸 그저 제3자의 관찰자 시점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지랄맞은 꿈이었다.
흐른 식은땀을 닦은 사윤이 현실과 꿈을 혼동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며 이불을 매만졌다. 당연한 얘기였지만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제 그런 얘기를 하고 사라졌으니 뻔뻔하게 다시 기어들어 와 잠을 청하진 않을 것이다.
잠깐만.
어제?
그제야 자신이 한건주의 방에서 하루를 보냈음을 제대로 자각한 사윤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촤악! 커튼을 치자 천을 뚫고 들어오던 햇빛이 곧바로 사윤의 얼굴을 향해 작렬하듯 내리꽂혔다. 누가 봐도 아침의 풍경이었기에 멍해진 사윤이 몸을 돌렸다.
이렇게 깊게 잠든 적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이게 그건가?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아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잠으로 도망친다는 그런 거?
제 몸이 그딴 나약한 선택을 할 리가 없는데 그것 말고는 이 숙면의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한건주도 없고 라이도 없는데 이렇게 잔 게 말이 되나 싶어 묘한 표정으로 뒷덜미를 매만지다가 세수부터 했다. 물이 피부에 닿는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한건주부터 찾는다.
그를 곁에 둘지 말지로 밤새 고민하다가 잠들었는데 오늘 꾸었던 악몽이 선택에 힘을 실어 주었다.
버려두면 어디서 뭔 짓을 할지 모르는 놈이다. 그의 생존 여부를 시종일관 신경 쓰고, 헛짓거리하진 않는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매일같이 위치 추적기의 흔적을 따라갈 바엔 대충 눈에 보일 만한 곳에 두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제 심신을 위해서라도 좋을 듯했다.
그 계획에 건주의 동의는 없었다.
그라면 그냥 제 곁에 있을 것 같아 폰을 들어 한건주의 가면에 심어 둔 위치 추적기의 신호를 확인해 본 사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인벤토리에 넣었나?”
분명 허리춤에 걸어 둔 걸 봤는데 잡히지 않았다. 핸드폰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경진에게 연락하니 뜻밖의 소리가 돌아왔다.
-한건주? 걔 게이트 들어갔잖아? 형님이 들어가라 했다면서.
“…뭐?”
-아 참 재희 형님도 같이 갔더라. 도와주기로 했다던데?
“이재희가 같이 갔다고.”
-…뭐야. 형님이 부탁한 거 아니야?
사윤의 지독하리만치 낮은 음성에 일이 틀어졌다는 걸 눈치챈 건지 경진이 슬그머니 물었다. 숨을 들이켠 사윤이 신을 신으며 방을 나섰다.
“넌 그걸 왜 허락하고 지랄이야? 어디 게이트 들어갔어.”
-제랑시의 몽중저택인데 아니, 그 둘이 나한테 찾아와서 형님이 허락했다고 하는데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형님이 아끼는 둘을….
뚝.
목적지만 듣고 이어지는 경진의 말은 무시한 사윤이 매정하게 전화를 끊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나 잠든 사이 둘이 신혼여행이라도 가듯 게이트에 들어갔다 이거지.
별로 친하지도 않은 것들이?
분노가 치밀었을 때 문득 핸드폰 상단 알림창에 문자 하나가 와 있는 걸 발견했다.
[건주 씨 스킬 하나 얻을 때까지만 여기서 도와주겠습니다. 사윤 씨는 사윤 씨가 해야 될 일 하세요. 신경 쓰이는 일 있으셨잖아요.]
시발 나는 빠지라 이거야?
눈이 돌아가는 문자에 사윤이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드드득. 폰이 버거운 신음을 내지르는가 싶더니 얼마 버티지 못하고 와지끈 구겨져 파손된다. 어디선가 종식의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