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3화. 특훈 (5)
“고생 좀 하겠어요.”
“…제가요, 아니면 사윤 형이요?”
뜸을 들인 반문엔 은근한 견제와 경계가 녹아들어 있었다. 매끄러운 웃음을 지은 재희가 어깨를 한 번 들었다 놓았다.
“글쎄요. 둘 다이려나요.”
“……?”
“어쩌면 건주 씨가 조금 더 고생할 수도 있겠고요. 뭐, 선택의 결과니 본인은 큰 후회를 하지 않을 것 같지만 사윤 씨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군요.”
“형이 후회할 거라고요?”
“어떨 것 같습니까?”
침묵 속에서 시선만 날카롭게 마주쳤다.
불편한 화법이다. 분명 먼저 질문을 던진 건 이쪽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물음에 대한 답을 의문으로 받게 된 찝찝한 상황이었다.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 가지 않는 의미심장한 말을 늘어놓는 상대에 혀를 찬 건주가 인상을 구겼다. 그냥 무시하려고 해도 저 남자의 말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자꾸만 신경 쓰이고 거슬려 함부로 넘겨짚을 수 없었다. 무당 앞에 신점을 보러 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런 건가 싶었다.
대답도 없고 새로운 질문도 없다. 한참이나 서로 침묵만 하고 있자 남자가 먼저 한 수 접어 주겠다는 양 입을 열었다.
“일단 하던 얘기부터 마저 나눠 보죠. 앞으로 어쩔 계획입니까?”
“그걸 말해 주기 전에 듣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요.”
“음?”
남자의 눈썹 뼈가 아래로 살짝 내려온다. 선해 보이는 인상을 말없이 관찰하던 건주가 오랫동안 품어 왔던 의문을 패로 꺼냈다.
“정체가 뭐예요?”
“그게 궁금합니까?”
“그럼 안 궁금할까. 생판 모르던 사람이 와서 형 옆자리를 차지하고 상담사까지 자처하고 있는데. 그쪽이 악의가 없다는 건 알겠는데 의도까지 없진 않겠죠. 목적이 뭐예요?”
질문을 끝내는 순간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목적이 뭐냐니.
이 말을 또 입 밖으로 꺼내는 날이 올 줄이야. 게다가 이번에도 사윤에 의해서 꺼내게 된 말이다. 곁에 있든 없든 지독하게 얽혀 물음표를 그리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새삼스러운 감정에 젖어 있으니 대답을 보류하듯 으음 하는 허밍만 길게 끌고 가던 재희가 돌연 다 비워진 찻잔을 거꾸로 엎어 놓았다. 의도를 알 수 없는 난해한 행위였다.
무슨 의식 같은 걸 하나 싶어 건주의 어깨가 살짝 치솟았다. 그러고 보니 저 남자 소환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저것도 소환 과정의 일환인가. 그렇다면 왜 소환하려는 거지?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혹시라도 뜻밖의 위기가 닥친다면 바로 반응할 수 있도록 감각을 끌어올리니 낮은 웃음이 번졌다.
“그렇게까지 경계할 필요 없어요.”
“…별로 경계하진 않았는데요.”
“그럼 뭐 그런 거로 치고요. 전 그냥 절 경계할 이유가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뿐입니다. 우리는 꽤 비슷한 목표를 공유하고 있으니까요.”
“비슷한 목표?”
생각도 못 한 말이다. 건주가 재희의 전신을 느릿하게 훑어봤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나랑?
기가 차 한쪽 눈이 가늘어진다. 대체 자신과 그가 어떤 목표를 공유하고 있단 말인가.
심지어 그와는 알고 지낸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이쪽은 그의 목표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사이비인가?
은근히 여유로운 태도 하며 나른한 말투가 의심에 기름을 부었다. 수상하다는 심정을 숨김없이 드러낸 건주가 옅은 불쾌감마저 섞어 든 시선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남자는 조용히 찻잔의 바닥 면을 둥글게 따라 그렸다. 가는 손톱 끝이 엎어진 찻잔의 위를 회전하는 모습이 최면술을 연상케 했다.
“…전 판을 뒤엎을 생각입니다.”
이야기는 갑작스럽게 시작됐다.
“게이트와 헌터, 시스템이 삼각형의 미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지금의 판을.”
그리 중얼거린 남자가 줄곧 원을 그리던 손을 멈춰 삼각형 하나를 그렸다.
“지금은 이 피라미드 꼭대기에 시스템이 있죠. 그걸 바꿔 볼 생각입니다. 우선 이루고 있는 균형부터 원형으로 부순 다음, 최종적으론 헌터도 몬스터도 아닌 평범한 시민이 제일 꼭대기에 올라설 수 있도록. 그리하여 일상을 침범했던 모든 게 원위치로 돌아오도록 말이죠.”
필요하다면 신까지 끌어내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 만들 생각입니다.
덧붙이는 목소리가 유연한 인상에 맞지 않게 비장했다. 그런데도 표정만은 여전히 차분하고 담백해 묘한 괴리감이 느껴진다. 혼란을 겪은 건주가 재희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현 세상을 구현하고 있는 것을 전부 뒤엎겠다는 파격적인 선언을 한 남자의 얼굴을. 조금 전의 말이 진심인지, 가식인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깊게 파고들어 보지 않아도 남자의 말이 진심인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재희란 사람에겐 그런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판의 흐름을 전부 뒤바꿔 놓을 듯한.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죠? 저도 자각은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하진 않죠.”
“진심으로 하는 소리예요?”
“거짓말 같습니까?”
딱히 그렇진 않았다. 할 말을 잃으니 재희의 눈웃음이 짙어졌다.
“이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선 사윤 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사윤 씨가 시스템과 깊이 엮였다는 점에서 그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이 꽤 많거든요. 사윤 씨 상태가 흥미롭기도 하고. 그리고 이젠….”
거기서 말을 한 번 멈춘 재희가 눈을 가늘게 떠 건주를 응시했다가 무해하게 웃어 보였다.
“건주 씨도 마찬가지군요.”
무릎 위로 얹어 두었던 손끝이 발작이라도 하듯 위로 튀었다. 순간적으로 제 속내가 꿰뚫린 것 같아 불편한 표정을 지은 건주가 재희를 노려보았다. 뭔진 몰라도 저 남자가 제게 무슨 짓을 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 탓이었다. 그에 재희가 끊어진 대화를 다시 이어 가기 위해 화제를 바꾸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가요? 제 목적이 뭔지는 다 얘기한 것 같은데.”
“아직 그쪽이 누구인지는 안 밝혔죠.”
“제 이름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름을 묻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잖아요.”
“그럼 서로 얘기하기로 할까요?”
“……?”
얘기하긴 뭘 얘기해?
제 정체에 대해선 별로 숨기고 있는 게 없었다. 오히려 이쪽은 사윤으로 인해 눈물까지 다 빼내며 저 남자의 앞에서 정체와 생각을 다 밝힌 적이 있는데 이제 와서 또 무슨 말을 하란 말인가.
자세히 말하라는 듯 쳐다보자 남자가 가볍게 웃으며 허리를 쫙 폈다.
“새로운 성향, 생겼잖아요?”
“……!”
건주의 눈이 커졌다. 화들짝 놀란 이쪽에 비해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상한 표정을 지은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재희입니다. 성향은 흐름을 비트는 자고, 특성으론 천기를 읽는 능력이 있는데 그리 대단한 능력은 아니에요. 읽는 데엔 한계가 있고 그걸 말하는 건 제한적이죠. 수명을 좀 써야 하긴 하는데 듣고 싶은 게 있으면 한번 물어보세요.”
한꺼번에 쏟아 낸 말이 듣는 사람을 당황하게 했다.
“수명을 쓴다는데 어떻게 물어봐요?”
“싫어요? 그럼 넘어가죠. 이제 건주 씨 차례네요.”
속전속결로 차례를 넘기는 실력이 아주 능숙하다. 정신 차리고 보니 휩쓸린 상황에 어이가 없어 기가 찬 웃음을 흘리던 건주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었다.
“그쪽도 제정신은 아니네요.”
“으음. 천편일률적인 감상이네요. 제정신이 아닌 건 저만 그런 게 아니잖아요.”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여기엔 제정신인 사람이 없을걸요?
그건 또 그랬다. 갑자기 허공에 나타난 시스템을 보고 이능을 각성한 사람들이 어떻게 제정신일 수가 있겠는가. 은근히 맞는 말을 해 반박하기도 어려워진 건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과는 상성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았다. 일적 관계가 아니라면 정말로 그다지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럼 이제 건주 씨 얘기를 들을 수 있습니까?”
권유를 가장한 재촉을 늘어놓은 남자가 엎어 두었던 잔을 다시 입구 쪽이 천장을 향하도록 돌려놓았다. 건주는 그 모습을 한참 응시하다가 눈을 감았다.
인정하자.
미친 사람 같긴 해도 악의를 지닌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특별히 경계할 필요도, 그를 견제할 이유도 없다. 무엇보다 제 계획을 이루기 위해선 사윤이 걸핏하면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는 대상인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의 존재 유무에 따라 제가 세워 둔 계획의 성공 여부도 갈릴 테니까.
이러니 달리 선택지가 있나.
협력한다.
마침 그도 자신이 필요하다는 뉘앙스를 풍겼으니 서로 필요한 것을 내어 주고 원하는 걸 얻어 가면 되었다.
“그쪽이 말한 대로 새로운 성향 하나가 생겼어요. ‘조력자’라고 하던데 제가 보기엔 이거, 사윤 형을 돕는 성향인 것 같거든요.”
“꽤 괜찮은 해석이네요. 어떻게 도울 겁니까?”
뭐야?
놀라지도 않고 태연하게 받아치는 게 묘하게 짜증 났다. 이게 제게 어떤 성향인데 저렇게 덤덤하게 반응한단 말인가. 눈꼬리가 뾰족해지고 있으니 이재희가 계속 말하라는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건주는 볼멘소리를 삼키고 말을 이었다.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전 형을 살릴 생각이에요.”
“사윤 씨가 그걸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요?”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요. 그쪽은 형이 죽고 싶다고 하면 죽여 줄 거예요?”
기습적인 물음의 어투가 날카로웠다. 대답에 따라 판단을 달리하겠다는 태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어 웃음을 흘린 재희가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사윤이 죽고 싶어 한다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몇 번이고 그가 속을 드러냈고, 드러내지 않은 속내마저 자신이 몇 번이고 꿰뚫어 봤지 않은가.
가끔은 애처롭게까지 느껴지는 간절한 염원이다.
그걸 무너트리는 게 과연 옳은가?
사윤을 볼 때마다 재희는 그것을 고민해 봤으나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글쎄요. 삶과 죽음이라는 게 타인이 가볍게 휘두를 수 있는 무기와 권력이 아니니 뭐라 할 말이 없네요. 사윤 씨가 그걸 원한다고 해도 제겐 그걸 내어 줄 자격이 없는 거죠. 비슷한 의미로 사윤 씨를 강제로 구할 이유도 없고요. 물론 시스템에게서 벗어나게 도와주는 건 최대한 노력해 보겠지만요.”
꽤 보수적인 얘기였다. 첫마디만 들으면 신실한 기독교 신자 같기도 해 코웃음을 흘린 건주가 눈을 감았다.
저 말은 그가 패닉에 잠긴 사윤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망령의 늪에서, 한 번 무너져 허물을 벗은 사윤의 모습을 본다면 그 누구도 저렇게 냉정하게 말할 수 없으리라.
그런 상태로 죽는 게 과연 안식이 될 수 있을까?
그 상태로 시체처럼 사는 건 또 어떻고.
둘 다 별로다. 그렇기에 건주는 사윤이 살아갈 방향을 먼저 바꾸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그 빌어먹을 시스템부터 어떻게 해 보는 것부터 시작해서….
“저랑 생각이 좀 다르시네요.”
“건주 씨 생각은 뭔데요?”
“전 형한테 다정한 죽음보단 폭력적인 희망이라도 주고 싶거든요.”
최종적으론 사윤이 스스로 살아갈 의지를 키우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