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2화. 특훈 (4)
누군가 새하얀 시멘트를 머리에 물처럼 끼얹은 기분이었다. 일순 머릿속부터 시야까지 백지처럼 새하얗게 물들었다가 차츰 원상태로 돌아온다. 다시 두 눈에 한건주가 오롯이 비쳐 보일 때 호흡을 이어 갈 수 있게 된 사윤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걸음을 물렸다.
끼익. 앉아 있던 의자가 그에 따라 듣기 싫은 소음을 내며 밀려났다. 사윤이 흠칫 놀랐지만 건주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형이 싫어하는 건 알아요. 별로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무서워한다는 것도 알죠. 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모종의 이유가 있다는 것도 알아요. 죽어야 할 이유가 있다는 거. 다 아는데….”
침묵하는 상대를 두고 혼자서 대화를 이끌어 간 건주가 말끝을 흐렸다. 큼지막한 손이 깍지를 꼈다가 손가락을 쓸어내리며 풀려 나간다.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굳은 침묵이 흐르는 방에서 미동을 보이는 것이라곤 그 손뿐이라 건주의 손에 시선을 두었던 사윤은, 그가 손목을 돌려 양 손바닥을 내보이는 걸 확인했다.
빈손이다.
그가 쥐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전 형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
“아무런 흑심 없이 그냥, 순수하게요.”
말갛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목소리가 깨끗했다. 그것이 그가 말한 순수를 증빙하는 듯해 숨이 막혔다.
사람의 선의는 늘 사윤을 숨 막히게 했다. 그럴 때마다 꼭 자신은 선의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몸이 알려 주는 듯해 고욕이 따로 없었던 사윤이 눈을 흐리게 떴다. 갈라진 속눈썹이 잘게 떨린다. 의자 다리에 둔 발이 바닥을 직 끌었다.
내가 살았으면 좋겠다고.
낯선 조합의 문장이었다. 늘 제가 죽었으면 하는 사람들만 보다가 그런 말을 들으니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저 말의 저의가 뭘까. 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동정일까, 위선일까, 적선일까. 어느 쪽이 됐든 비굴한데.
사윤의 시선이 흔들렸다.
노아마저 나를 동정했는데 너는 나를 동정하는 걸까, 연민하는 걸까.
생각이 깊어질수록 호흡이 전력 질주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점점 밭아진다.
제가 그를 비참하게 만든다고 했나. 그대로 돌려줄 말이다. 그는 종종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이보다 더 비참할 순 없는 삶을 살고 있는데도 늘 거기서 한 단계 더.
끝도 없는 수렁에 빠져 있는데 그런 제 발목을 끄집고 더 깊은 곳으로 끌고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추락하는 기분에 허억, 하고 숨을 들이켠 사윤의 턱에서 액체가 떨어졌다. 언제부터 흘리고 있었는지 식은땀이 턱에 맺혀 있었다. 손등으로 그걸 닦고 있으니 섬뜩할 정도로 고요히 눈을 형형히 빛내며 사윤을 응시하고 있던 건주가 할 말을 쏟아 냈다.
“그러니까 날 곁에 둬요. 그럼 내가 찾아볼게요. 형이 살아야 하는 이유요. 내가 찾은 그 이유가, 형이 죽어야겠다고 생각한 원인을 상쇄할 만큼의 파급력이 있다면 그때부턴 살아요.”
낮은 어조에 답지 않은 다정이 배어 나온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사윤은 저능아가 된 것만 같았다.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고 똑바로 곱씹을 수도 없었다.
아니, 사실 그냥 듣기 싫은 것에 가까웠다.
그가 말하면 말할수록 긴 시간 유지되어 온 제 신념과 제가 살아왔던 순간의 기둥이 뿌리째 흔들리고 무너지고 있었으니. 속에서부터 느껴지는 진동에서 벗어나고 싶다.
“네가 왜 그 이유를 찾아.”
말이 날카롭게 나간 건 그 탓이다.
냉랭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한건주의 눈동자가 휘어졌다.
“형을 살리고 싶은 게 저니까요.”
그러니 제가 노력해야죠.
겁을 먹지도 않고 간신배 같은 감언이설을 늘어놓는다. 쳐 내야 하는데 쳐 낼 수 없다. 과거 간신들에 의해 나라를 팔아먹은 황제들이 이런 기분이었나 싶은 생각마저 들 수준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설득될 성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에 앉아 있던 시간은 단 몇 분에 불과했는데 그 짧은 사이 온몸이 너절해졌다.
“네가 그렇게 살린다고 내가 좋아할 것 같아?”
“싫어하겠죠. 말했잖아요. 형이 살기 싫어하는 건 알고 있다고.”
“그런데도 날 살리겠다고.”
그쯤 되자 사윤의 입꼬리에는 자학적인 웃음이 걸렸다. 대놓고 제 일생일대의 목표를 방해하겠다는 사람을 두고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쫓아냈어야지.
나를 살리겠다고 말했을 때부터 쫓아내고 멀리 뒀어야지.
한건주는 위험하다.
S급이 되고 나서, 밤쥐의 수장으로 자리 잡고 나서 위협이란 단어를 인지하지 못하며 살아온 사윤에게 한건주는 실로 오랜만에 맞닥뜨린 위협이었다.
협박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짜증을 내도 수그러들지 않는다. 저런 이를 계속 곁에 두었다간 자신이 무너질 게 뻔했기에 시선이 차가워졌다.
“검은 머리 짐승 들이는 거 아니라더니.”
“억울해요?”
과거의 행동을 책망하듯 중얼거리니 그가 묻는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박한 어투로 얘기하는 게 꼭 사람 골리는 것 같았다. 조롱으로까지 느껴져 눈살이 구겨졌을 때 남자가 사윤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억울해하면서 살아요. 내가 당신을 살렸다고, 그냥 절 원망하면서 살아요.”
“뭐?”
“지금 시스템 때문에 강제로 살고 있는 것처럼 나중에는 저 때문에 살게 됐다고 짜증 내면서 살라는 말이에요. 평생 미워하면서 살든지….”
전 다 받아 내고 살 자신 있어요.
떡 줄 사람은 줄 생각도 없는데 자기 혼자 위풍당당이었다. 기막혀 헛웃음만 흘리고 있을 때 건주가 사윤의 어깨를 붙잡아 돌렸다. 그러곤 침대로 데려가 자리에 앉혔다. 뭘 하는지 모르겠어 가만 두고 보던 사윤이 매트리스에 닿고 나서 눈을 게슴츠레 떴다.
“뭐 하는 수작이야?”
“거기 있어요. 자리 피할 생각이잖아요. 제가 나갈 테니 형은 여기서 생각 정리 좀 해요.”
“건방지게 굴지 마, 새끼야.”
“언제는 당돌한 게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요.”
내가 언제?
기막히다 기막히다 하다가 진짜 기도까지 다 막히게 생겼다. 사윤의 인상이 험악해졌을 때 이불을 어깨 위로 덮어 준 건주가 눈치 빠르게 선수를 쳤다.
“화내지 마세요. 무서워요.”
“…….”
그건 정말로, 할 말을 잃게 하는 말이었다.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말문이 막힌다는데 그게 딱 지금 상황인 것 같았다. 황당해 화도 내는 것도 잊고 눈을 깜빡이느라 사윤의 눈매가 순해졌다. 그 모습을 본 건주가 입꼬리를 올리곤 뒤로 물러났다.
“제 목표는 방금 말한 게 전부예요. 그냥 형을 살게 하고 싶어요.”
“네가 왜.”
“그러게요.”
“……?”
“저도 제가 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욕이란 욕은 다 먹어 가면서 해야 할 일인 게 뻔한 일을 하겠다고 한 건지 모르겠는데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요. 그리고….”
한 걸음 더 물러나 제가 쓰는 이불을 어깨에 걸친 채 제 쪽을 응시하고 있는 사윤을 전시 그림 관람하듯 쳐다본 건주가 웃었다.
“사람 데려왔으면 책임을 져야죠. 납치해 놓고 버리면 유기인 거 몰라요?”
“무슨 개소리야?”
“그럼 다녀올 테니 쉬고 있어요.”
“어딜 가는데?”
“아, 침대 왼쪽에 있는 서랍은 열어 보지 말고요.”
내가 지금 사람 새끼랑 대화하고 있는 건지 짐승에 가까운 백치 새끼랑 대화하고 있는 건지.
말이 안 통해 주먹을 쥐었을 때 한건주가 기어이 방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으로 발을 내딛기 직전 사윤 쪽으로 고개를 돌린 이가 입을 열었다.
“형한테 간섭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돼 볼게요, 제가.”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던 건지 그 말을 끝으로 방문이 닫혔다. 순식간에 남의 방 안에.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제 건물이었으니 제 소유의 방이긴 했지만 그래도 남에게 내어 준 방에 홀로 남게 된 사윤이 닫힌 문을 보다 허무한 숨을 터트렸다.
“진짜로. 뭐야 저 새끼?”
제가 사람이 아닌 미친 여우 새끼 하나를 들였나 싶었다.
“…그래도 헛웃음, 자조, 조소 같은 게 아니라 제대로 웃는 꼴을 보니 좋은 게 좋은 건가.”
모르겠다.
머리가 복잡해 좌우로 턴 사윤이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일단 한건주가 말한 대로 생각 좀 정리하고 그를 내쫓을지 말지를 고민해 봐야겠다.
* * *
“처음부터 말할 걸 그랬어.”
방을 빠져나오니 긴장이 풀리고 속이 시원했다. 괜히 속에만 담아 두다 곯았던 게 억울할 지경이라 그리 중얼거린 건주가 향한 곳은 최상층 사윤의 방이었다.
제 방을 내어 주고 그의 방으로 올라가는 꼴이 우습긴 했으나, 볼일이 있었다.
사윤의 방이 아닌 그곳에 있을 사람에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방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안에 있던 사람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아, 왔어요?”
이런 순간이 오리란 걸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책을 덮고 안경을 벗은 이가 의자에서 일어나 소파로 이동했다. 앉으라는 듯 자리를 권하는 태도가 자연스럽다. 누가 보면 이 방에서 한평생 살아온 사람일 거라 착각하기 딱 좋은 작태다.
마음에 안 들어 콧잔등을 찡그렸던 건주가 이내 재희의 맞은편에 앉아 입을 열었다.
“한동안 형이 저를 피하고 다닐 거예요. 저도 억지로 거리를 좁힐 생각은 없고요. 혼란스러워할 시기니까 그쪽이 곁에서 챙겨 주셨으면 해요. 딱히 그쪽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닌데, 그래도 형이 그쪽을 의지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이상한 짓 하면 곁에서 좀 막고 그래 주세요.”
정말로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말하자 가볍게 웃은 재희가 건주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사윤 씨가 건주 씨를 피할 것 같습니까?”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말하고 왔거든요.”
“음?”
“형을 살릴 거라고 말하고 왔어요.”
“아….”
작게 탄성을 흘린 재희가 제 몫의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건주가 용건을 내놓았다.
“그러니 협조 좀 해요.”
맡겨 놨다는 듯 구는 행색에 남자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미지가 조금 바뀐 것 같네요. 예전에는 어른스러운 척이라도 하더니 이제는 솔직해지는 전략으로 가기로 했습니까?”
시비는 아닌 듯했으나 질문이 이상해 신경전을 거는 것처럼 느껴졌다. 건주는 잠시 자신을 대하던 사윤의 태도를 떠올렸다가 무릎을 꼬아 손을 올렸다.
“몰랐는데 형이 제가 애새끼처럼 굴면 좋아하더라고요.”
자주 이러면 효력이 떨어지니 자제할 생각이지만 그래도 써먹을 땐 써먹어야죠.
덧붙이는 말이 유쾌하다. 입꼬리에 그려진 호선이 뻔뻔할 정도로 둥글었다.